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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Aug 22. 2022

최악일 때 사랑하면 최악이 된다

8/25 개봉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개봉 전부터 이미 포스터로 유명해진 영화다. 배우 정재영이 주연을 맡은<나의 결혼 원정기>(2005)의 한 장면과 유사하다는 것. 배급사인 그린나래미디어는 공식 트위텅 정재영 배우로부터 온 메시지를 게재하며 이 밈(meme)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한국 사람들은 재미있다. 어쩌면 머나먼 노르웨이에서 온 이 영화가 포스터 때문이라도 한국에서 대박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선언은 진부하지만 나름대로 유효하다. 나는 자꾸만 '누구나 사랑할 땐 최악이 된다'로 제목을 혼돈했다. 주어의 자리를 어디에 둘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누구나 사랑할 땐 최악이 된다고 할 때는 최악이 되는 사람의 변명 같이 들리지만 주어의 자리를 바꾸었을 때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종종 저지르는 귀여운 어리석음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사랑할 때 사람들은 자주 바보가 된다. 나도 그렇다.


사랑할 때 나는 얼마나 최악인가를 떠올렸다. 성숙한 사람들은 사랑할 때 최고의 모습만 보여줄까? 지나고 나서 보면 나는 항상 최악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미성숙해서일까.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며 성숙해지기는 할까. 언젠가 성숙한 어른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는 할지 의문이다.


'사랑할 때'라는 때는 언제일까. 영화의 원제는 덴마크어, 영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이다. 세상에서 제일 별로인 사람. 그 제목이 어쩌다 '사랑할 땐'이라는 조건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이 멋지다. <더 워스트 퍼슨 인 더 월드>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오랜만에 음차번역을 하지 않은 제목을 만나 반갑기까지 하다.


우리나라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라고, 그렇기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선언에 공감하며 영화표를 끊을 관객도 많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나?


율리에는 의학을 공부하다가 때려치우고,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또 때려치우고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진을 공부하면서 연애도 하고, 사람도 만난다. 그러다 <밥캣>의 작가로 유명한 악셀과 사랑에 빠진다. 악셀과 살림을 합치고, 악셀의 친구들과 가족을 만난다. 40대 중반인 악셀은 율리에와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어한다. 그러나 율리에는 이제 겨우 서른이다.



'서른'이라는 숫자는 유난히도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마치 서른이 되면 인생이 끝난다는 듯이, 혹은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듯이. 나는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 살로 넘어가던 날 밤에 혼자 집에 앉아 나의 이십대에 관하여 구구절절 썼다. 이제 그 파일은 어디에 갔는지 지워졌는지 기억도 안 나고, 그 사이 내 노트북이 두어 번 바뀌었으며 뭐라고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문장이 '다 사랑 때문이었다'였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렇게 나는 어리석었다. 사랑할 때 최악이 되었다는 진부한 생각을 했다. 나의 방황과 슬픔과 우울과 불면의 밤들을 사랑 때문이었다고 단순히 정의내렸다. 20대의 나는 공공연하게든 공공연하지않게든 늘 누군가를 만나왔고, 그것이 내 안에 있는 어떤 사랑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율리에의 부모는 이혼하였고 아버지는 새 가정을 꾸렸으며 율리에에게 절대 먼저 연락하거나 찾아오는 법이 없다. 율리에가 악셀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자 악셀은 그 점을 지적한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악셀에게 전이된 거라고.



악셀은 40대 중반의 남성으로, 카툰 <밥캣>으로 이미 성공을 거둔 작가다. 악셀을 제외한 친구들은 모두 결혼하여 자식을 키우며 평범하게 산다. 악셀은 율리에와 동거하면서 율리에와 친구들처럼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율리에는 자꾸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고만 한다. "넌 좋은 엄마가 될 거야"라는 악셀의 말들은 율리에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지만, 악셀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악셀은 다정하고 섬세한 남자다. 물론 그의 작품에 성차별적 요소가 다분하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여성혐오적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예술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졌지만.


율리에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엄마가 되면 앞으로의 인생은 오직 '엄마'로만 점철될 것이다. 악셀은 아빠가 되어도 여전히 유명한 만화가이자 아빠로 존재하지만 율리에는 그냥 누군가의 엄마일 뿐이다.


악셀이 새로 나온 만화의 출판기념회를 하던 날, 율리에는 떠들썩한 행사장에서 조용히 빠져나온다. 한참을 하염없이 걷다 어느 파티장으로 들어가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또 자기가 의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아무도 자기를 모르는 장소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설령 아무것도 되지 못한 사람이더라도.



익명의 파티장에서 익명의 참가자가 된 율리에는 익명의 남자와 대화를 시작한다. 둘 다 동거인이 있는 상황이기에 '선'을 정하고, 어디까지가 바람이고 어디까지가 아닌지를 테스트한다. 이들은 '테스트'라는 이름 아래 온갖 기행을 하는데, 이들 스스로가 '이건 바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동에 거침이 없다.


날이 밝아 헤어질 때까지도 서로의 본명을 모른다.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이름을 알면 궁금해지고, 찾아보고 싶어지니까. 그렇게 되면 그들이 정한 '선'을 넘어버리게 되니까.



중요한 건 타이밍


의사가 아니라 서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율리에의 앞에 운명처럼 그 날의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난다. 그의 애인과 함께. 아직까지는 아슬아슬하다. 그러나 어느날 아침, 그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결심한 율리에는 그가 일한다는 카페로 달려간다. 그의 이름을 부른다(에이빈드). 주변의 모든 시간이 멈추고 세상에 오직 그와 자신만 존재하는 듯하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율리에는 악셀에게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악셀은 '오래 살아봐서 아는데, 이런 사랑은 없다'며 율리에를 붙잡는다. 그러므로 율리에는 악셀의 곁을 떠나야 한다. 아직 이룬 것도, 원하는 것을 찾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직업적으로도 성공한데다 율리에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까지 미리 살아본 악셀과 함께 있으면 율리에는 자꾸만 스스로를 악셀과 비교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 마음을 티낼 수도 없다.


악셀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율리에의 상황이 최악이라서다. 타이밍이 안 좋다. 상황이 최악일 때 사랑(또는 연애)을 하면 최악이 된다. 가진 것도 없고 내밀 것도 없고 당당하지도 못하고, 하필이면 가장 가까운 사람과 비교하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고 마는, 세상에서 제일 후진 사람이 되는 거다.


에이빈드 역시 수니바와 헤어진다. 에이빈드의 여자친구였던 수니바는 어느날 자신의 멀고 먼 조상에 대해 알게 되었고, 별안간 요가를 시작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에이빈드는 딱히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하자는 대로 잘 따랐던 것 같다. 운명처럼 수니바는 요가와 명상을 위해 떠나고 SNS 스타가 된다. 헤어져야 할 타이밍이다.


각자의 관계를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율리에와 에이빈드. 이들의 앞에도 비단길만 깔려있지는 않다. 에이빈드는 환경을 위해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실수로 율리에가 임신을 하게 되고, 율리에의 눈에는 미래 계획도 없이 파트타이머로만 일하는 에이빈드가 한심해 보인다.  



영화는 프롤로그와 열두 개의 챕터,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는 의학을, 심리학을, 사진을 찍다 사귀게 된 남자친구를, 오슬로를 싫증내는 율리에의 모습을 담는다. 에필로그에서는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잘하는지를 찾아내고 마침내 홀로 선 율리에가 등장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쉽게 속인다. 어쩌면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연애가 아니라 성취가 아닐까. 율리에는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을 찾지 못한 채 불안한 서른을 눈앞에 두었을 때 연애에 몸을 내던졌다. 하지만 그 연애는 율리에의 내면 깊은 곳에 있던 결핍을 채워주지 못했다.


율리에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악셀과의 운명같은 사랑도, 에이빈드와 아이를 낳고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낭만적인 오역이다. 율리에는 사랑해서 최악이 된 것이 아니었다. 최악일 때 사랑하는 바람에 최악의 상황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공허함을 사람으로 채우려고 할 때 비극이 시작된다.



영화의 위의 장면에서 시작한다. 악셀의 출판기념회 현장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율리에. 사랑하는 사람을 질투하는 못난 사람, 세상에서 가장 별로인 사람(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되는 순간. 그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2021)

감독 : 요아킴 트리에

출연 : 레나테 레인스베, 앤더슨 다니엘슨 라이, 할버트 노르드룸 외

상영시간 : 121분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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