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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Mar 24. 2022

가시,나

남편과 별거한 지 오 년이 되었다. ‘별거’는 목구멍에 깊이 박혀 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도 몰랐으면 했다. 그러나 이 몹시 사적이고 내밀한 일에 부단히도 개입한 사람이 있다.     


엄마는 전업주부로 살다가 40대에 숙박업을 시작해 줄곧 가정 경제를 책임져왔다. 엄마의 벌이가 괜찮을수록 아빠의 사업 야망은 커져갔고 실패와 손해도 거듭되었다. 엄마는 다섯 식구의 생계유지와 삼 남매의 대학 교육과 아빠의 끝없는 빚 청산을 정신없이 해대며 이십오 년을 달렸다.     


엄마는 70대가 되었고 여전히 그 일을 한다, 아빠는 몇 년 전부터 엄마 일을 돕고 있다. 자진해서라기보다는 더는 사업을 벌일 밑천이 없어서다. 엄마는 가게 일에 있어서 숙련자이고 아빠는 보조자인데, 엄마의 일은 보조자가 생기면서 더욱 가중되었다. 그의 삼시 세 끼를 차리고 옷과 간식을 챙기고 이따금 잔병 수발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종 그의 어정쩡한 일처리와 배려 없는 말 때문에 싸움을 하고 속까지 상한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내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늘어놓고, 나는 평생에 걸쳐 반복되는 그 레퍼토리가 지루하고 한심하다. “이혼해 엄마.” 듣다 못한 나는 무심하게 말한다.     

그러면 엄마는 돌연 다른 사람이 된다. 니 아빠가 그래도 엄마 눈치를 그렇게 본다, 나는 그게 가엾다, 나는 니 아빠 없어도 되지만 니 아빠는 나 없으면 못 산다..     

나는 웃음이 난다. “엄마, 아빠 사랑하네.” 그러면 엄마는 갑자기 막 역정을 낸다. 사랑만은 죽어도 아닌 모양이다.     


사랑만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아내로서 지극했던 엄마이기에, 남편 없이 애 키우며 살아갈 딸의 운명은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엄마에게 남편이란 의무와 책임과는 상관없이 안방에 자리보전하고 누워만 있어도 그 존재만으로 감사한 인물이었다. 엄마의 걱정과 한숨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런데 정작 나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매일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주고받는 묘한 배척과 경멸이 너무 피곤하고 서글펐기 때문에, 그 거북한 공기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새 봄처럼 홀가분했다. “엄마 나는 일단, 지금이 좋아.” 내 말에 엄마는 더 하려던 말을 주섬주섬 삼키고 “그래 니가 좋다면 어쩔 수 없지, 뭐.” 했다.     


아마도 엄마는 상황이 곧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재결합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견고하고 안정적인 별거 생활을 해나갔다. 내가 좋으면 그걸로 된 거라던 엄마는 참을 만큼 참고 나서, 잊을만하면 전화를 걸어 잔잔한 내 일상에 파문을 일으켰다.

아이구, 팔자도 좋다. 남편 내쫓고 밥이 넘어가니? 애 생각은 안 하니, 너 좋은 것만 하고 어떻게 살어? 애 크면 두고 봐라, 너 원망한다. 가시나가 얼마나 남자를 볶아댔으면, 안 봐도 알지 내가. 그러는데 어떤 남자가 붙어있어?     

엄마가 생각하는 나의 처지는, 눈물바람으로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빌거나 분연히 일어나 싱글 맘으로서 분투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그냥 집에서 아이 얼굴만 봤고, 꼭 껴안고 잤고, 책을 읽었고 조각 글을 썼다.     

엄마의 말이 모두 진심은 아니었다 해도 그것들은 작은 창처럼 나를 곧장 관통했다. 그러고도 날아가지 않고 남아 불쑥 깊은 곳을 찌른다. 그때마다 나는 아프고 슬프다.     


서른한 살의 나는, 남편을 잘 모르는데 결혼했다. 만나자마자 모든 상황과 사정이 결혼이라는 결말을 향해 빠르게 흘렀다. 아이도 너무 빨리 생겼다. 둘이서 사는 것도 익숙지 않은데 금방 세 식구가 되었다. 두 사람의 차이와 충돌은 모두 시간이 끌고 가 해결해 줄 거라고들 했다. 그러나 그런 말 말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누군가 알려주었다면,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보았을까. 우리는 시간이 손 쓸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다툼과 체념을 반복하다 남편은 집을 떠났다.     


새 봄 같은 이별에도 앓을 시간이 필요했다. 한 사람을 상실하고 하나의 미래를 포기해야 했다. 가정의 와해가 그의 잘못도 나의 모자람 때문도 아님을 복기해야 했고, 결혼의 실패가 비정상과 낙오의 낙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켜야 했다.     


꼬박 일 년이 지나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아이의 다섯 번째 생일날이었다.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이미 각자의 이별을 마친 사람들이었다. 둘이 모로 서서 아이만 내려다보았다.     


그는 집을 떠나 오히려 어려웠던 일이 잘 풀렸다. 같이 살 때 가족보다 일이 우선인 것이 늘 불만이었던 나는 사업의 성쇠가 아이의 양육비와 직결되면서 그를 응원하게 되었다. 그는 나의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이 오히려 아이를 빈틈없이 돌보기에 좋은 점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그보다 돈을 잘 벌 자신이 없고, 그는 나만큼 아이를 잘 보살필 수 없으니 우리는 각자 잘하는 것을 맡았다. 내가 못하는 것을 당신이 해내는 것에 대한 인정과 존경이 생기기까지는 동거보다 더 긴, 별거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의 별거가 지금껏 무리 없이 유지된 가장 큰 비결은, 그와 내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를 한평생이고 지고 갈 만큼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당신의 기쁘고 슬픈 일에 대해서, 일요일이 아닌 날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다. 다만 엄마 또는 아빠로서 아이에게만은 늘 최대한의 애정과 책임을 다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여섯 날만큼 멀고 하루만큼 가깝다.     


반면, 우리는 진작 다한 이별이 엄마에게는 아직 멀어 보인다. 엄마는 여전히 ‘우리 ㅇ서방.ㅇ서방.’ 한다. 네가 헤어져도 나한테는 영원한 사위라며 들어 본 적도 없는 장모의 지조를 지킨다. 우리에게 없는 재결합에 대한 소망이 엄마에게는 있다. ㅇ서방한테 잘해, 애교 좀 부려라, 여자 생기면 어떡하니? 자고 가라고 해~라는 엄마의 말을, 나는 되게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깔깔깔 웃고 치운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 햇살 한 줄이 눈꺼풀에 부딪히듯 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댄다.     

“근데 얘, 나는 가끔 니가 부럽다..”     

나는 그 말이 진짜인 것을 안다. 나는 엄마의 일생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역할이 이름으로 불려진 사람을, 미움을 연민으로 속이며 견딘 시절을, 고단함과 외로움의 무한 반복을 보아왔다. 엄마에게 파고든 수많은 가시의 내막을 나는 안다.     

나는 내 삶의 편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라도 편들지 않으면 사는 모습이 더욱 남루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다고, 더욱 좋기만 하다고, 꼭 봄날 같다고 감싸돌면서 얼룩처럼 남겨진 외로움과 패배감을 감추고는 했다. 엄마가 진짜 이야기를 해서 나도 가려진 이야기를 한다.      

“엄마 근데 나도 그래. 나는 미우나 고우나 내 남편이다, 그런 말도 못 하고, 백년해로도 해당 안 되고, 같이 늙어가는 게 어떤 기분인지도 모를 거야. 나는 아마 평생 그런 게 부러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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