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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Jul 29. 2020

대신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

마지막

먹이를 원하는 새 같았을까.
그에게 받는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내가 그것으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거의 마지막에 다 달았을 때, 내가 그 밖의 것들을 원하기 시작했을 때, 그가 둘러놓은 것들을 답답하다고 여길 때, 그는 나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몹시 더운 날 밤, 어둡고 시끄러운 술집이었다.
의외의 이야기에 놀랐지만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그가 어떤 마음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사랑을 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랑은 그가 나에게 주는 것이지 내가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도 먹어야 살고 자란다는 것을 몰랐다. 그가 하지 않아도 되는 고통스러운 노력을 하고 있는 것도 몰랐다.
모르고 혹은 모른 척 지나가버려서 나는 그의 아프고 어려웠을 그 고백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그와 지내는 몇 년 동안 우리는 여자들만 만났다. 그 여자들은 모두 여자를 만났다. 나는 그들을 모두 좋아했고 그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고 그들과 일상을 나누었고 그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 즐거웠고 소중한 시절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도 나는 또한 자라났다. 그러나 이렇게 되고 보니 언제나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 언니는 의사야?’
‘응, 되게 유명한데.. 못 들어봤어?’
‘그래? 근데 왜 여자를 만나?’
동전처럼 떨어뜨린 말에 주원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 묻는다.
‘여자는 어떤 여자가 만나는 건데?’
그의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눈동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여자이고 그도 마찬가지라는 원래의 사실을 나는 언제부터 깨달은 걸까.
이별은 그 순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언니와 살던 자취방에 그가 와서 셋이 나란히 누우면 한 번, 그의 친구들과 그 애인들까지 온통 여자뿐인 자리에서 또 한 번, 나보다 더 부드러운 그의 손을 잡고 매일 걷던 거리를 걷다 문득 또 한 번, 이따금 사람들이 민망한 얼굴로 다가와 염려나 충고를 속삭일 때 다시 한번, 나는 따끔, 하고 작은 가시에 찔렸다.
주원이 여자라는 처음엔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사실은, 피부를 뚫고 들어간 작은 가시처럼 핏줄을 타고 빠르고 조용하게 온 몸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그가 단지 여자라서 나를 사랑하고 여자라서 언제나 져주고 여자라서 너그럽고 포근하고 세심한 것이라고, 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를 심각한 결함이 있어 다른 것들로 그 부족함을 만회하려 하는 가엾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여자라서’라는 전제가 붙으면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은 금세 우스워지거나 초라해 보였다. 그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 실은 나에게 하는 짓인 줄도 모르고 더 많은 그와 나를, 우리 두 사람의 모든 것을 비웃었다.

‘어쩐지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아주 작아지는 것 같아’라고 주원은 지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못 알아듣는 척 눈을 굴렸지만 나의 숨겨진 편견과 무시가 나쁜 연기처럼 그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그를 이미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신음과 같았다.

그 시절에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이었으므로, 그는 나를 두드려 세상을 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를 견디는 것은 세상을 모두 견디는 것만큼이나 버겁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온 세상보다도 가혹하게 그에게 무엇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주원이 내게 열어준 세상을 누리며 그것이 원래의 내 것인 줄만 알았다. 나는 그렇게 어리석고 비겁했다. 세상을 등지고 나를 사랑한 그에게 적어도 나 하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단 한마디 원망도 던지지 않고 그야말로 모든 것을 보았지만 못 본 것처럼 간단하고 다정한 짧은 인사를 건네고 그는 영영 떠났다. 오래지 않아 나의 세상도 사라졌다. 그가 발견했던 나의 눈 아래 작은 점과 오른쪽 덧니와 하얀 손가락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지만 어떤 특별함도 없었다. 나는 슬펐고 후회했지만 그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어 싫었다.

그는 내가 벗어난 세상에 남았고, 나는 원하던 대로 그를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나왔다. 시간은 고장 난 자전거 바퀴처럼 굴렀지만 무시했다. 평범하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살아가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했다. 때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그러면 다시 어떤 시절이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다. 사랑이라는 건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좋아져 버리고, 누구라고 해도 좋아서 어쩔 수가 없고, 그리하여 두 사람이 서로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는 것을 나는 알았으므로 또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원과 나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오직 단 한 번의 돌연하고 환상적인 사고였다. 내가 가장 원했던 시절은 그가 남아있는 거기에 있었다.

나는 다들 그러는 것처럼 살아나갔다. 아무도 모르게 주원을 떠올리면 주저앉고 싶어 지는 동시에 도망가고 싶었다. 많은 기억이 흘러가지 못하고 탁한 물처럼 고였다.
그는 유학을 앞둔 나를 어느 날 불쑥 찾아왔다. 나는 반가워하지도 못하고 괜히 화난 사람처럼 서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너 답냐고 말하며 그는 고운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여러 번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특별해서 어디서든 잘할 거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나를 꼭 안고 울었다. 또한 조용하고 보폭이 큰 걸음으로 돌아서 갔다. 모두 다 그 다웠다.
그에게 나는 너무 밉고 원망스러운 사람, 그러나 여전히 어쩔 도리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낙인처럼 남기고 간 밤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가 모두 잊었기를 바란다.
대신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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