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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Jul 28. 2020

대신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

3

찰나와 같은 아주 짧은 순간으로부터 사랑이 시작되듯 이별도 사소한 조각 하나에서 비롯된다.
나는 연애의 수만큼이나 많은 이별의 장면들을 기억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별을 예감하던 순간이다. 잊는다면 잊을 수도 있고 그럴  없다면 이렇게 가시처럼 박히고 마는 기억들이다.
거짓말에 거짓말을 보태는 비겁함을 보던 , 만취하면 무섭게 변하는 눈동자를 발견한 순간, 자꾸 잡았던 손을 놓고 앞서가는 무심한 등을 천천히 바라볼  나는 이별을 알아차리고는 했다.  예감의 순간들은 모두 두 사람 중 하나의 혹은 둘의 마음이 이미 멈추었다는 것을, 둘의 시절이 저물어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주원과의 헤어짐만은  조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별이 우리에게 파고든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나의 한계였고 여전히 아픈 자국이었고 알고 싶었던 정답이며 끝내  읽지 못하고 덮어놓은 어려운 이야기가 되었다.

이제 와서 얘기하자면  많은 순간에 내가  많이 그를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와 견주어   있었다면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있었을까. 그의 마음을. 그것은 가만히 바라보아도 가슴이 저릿한 것이었다. 작은 투덜거림을 기억하는 것이었고 하지 못할  같은 노력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책임의 양과 무게를 알게 되는 것이었고 내 것을 조금 혹은 많이 잃어도 억울함을 금방 잊고 마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그의 마음을, 그것을 지나 그의 깨끗한 목덜미와 갈색 머리카락을, 곧고 예쁜 다리를, 부드러운 발꿈치를, 이따금 땀에 젖는 솜털들을 나는 몹시 사랑했다.

그러나 부족할 틈도 생각할 새도 없이 퍼부어지는 그의 애정은 또한 당연하게도 나를 결국,  혼자   아는 오만한 아이로 만들었다. 오랫동안 학교 안에서만 지내 자신감 없고 우물쭈물하는 외톨이였던 나는 주원을 만나고  년 만에 다른 사람이 되었다. 시끄럽게 웃고 커다랗게 말하게 되었다. 나의 존재가 매일 커가는 것을 느끼며 황홀하고도 버거웠다. 황소개구리처럼 몸집을 부풀렸고 그게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말하고 싶은  하고 싶은  하고 싶지 않은  전부를 마음대로 했고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상처 주고 싶으면 서슴없이 그렇게 했다. 문득 상냥하고 싶으면 상냥했고 갑자기 너무 사랑하고 싶으면 그것도 그렇게 했다.

몸집을 부풀리고 제멋대로 구는 어린애 같이 살아도 끝나지 않는 가난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현실은 그대로여서 나는 때로  깊이 우울하고는 했다. 주원은 보다 못해 함께 유학을 떠나자고도 했는데 나는  환상적인 제안이 기쁘면서도 두려웠고 고마우면서도 시샘이 났다.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그가 원하는 우리의 미래를 위한 어떤 선택도 미루어 놓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 갈수록 다툼이 많아지고 지난한 충돌과 화해가 이어졌다. 언제나 그대로였던 그를 나는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이 평온하지 않아서 오히려 그를 자꾸 시험하고 싶었다. 그것은 다분히 악마적인, 강도를 조절하며 고문하는 사람의 잔인함과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그와, 속으로는  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무관심한 얼굴로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는 나는 어느새 사나운 물살에 던져진 널빤지 위에 서있었다. 마침내 널빤지는 부서져  사람은 추락했다. 반대방향으로 떠내려가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서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참담할 수밖에 없었던 이별의 순간까지도 주원은 자신의 잘못을 생각했다. 되돌릴  있을까 절박하게 되짚었다. 그러나 답은 그가 찾는 곳에 없었다.

그와 헤어지고 헤어진 이유를 찾기 시작했을 , 처음에는 그의 천진함과 여유를 시기하고 미워했던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눈처럼 쌓여가는 그의 헌신과 마르지 않는 배려와 양보가  딴에는 충분히 지루할 만했다고도 생각했다. 아니면 내가 가지고 싶었던 모든 것을 가진 그의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질투가 사랑 같은  덮어버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망각이 시간과 비례해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수많은 가정의 문장 앞에 그의 이름을 놓으면서, 또한 그것이 대부분 후회로 이어지자 나는 비로소 헤어짐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었을까, 떠올린 순간부터 그것은 피부 아래 숨어있다 서서히 솟아나 점점  단단하고 고통스럽게 번지고 있는 종기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외면할 방법이 없을 만큼 분명하게 아파왔다.

그토록 사랑했음에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변하지 않고 죄가 없는  하나의 이유는 주원이 남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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