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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Jul 24. 2020

대신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

2

나는 사랑을 받아서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애였다.
누군가 내게 관심을 보인다 싶으면 그의 턱 아래까지 바짝 다가가 왜 이러나 싶게 귀찮게 한다. 내 마음대로 선을 넘는다. 고양이의 원하는 눈으로 거기 당신의 귀하고 좋은 예쁜 거 저 주세요, 한다. 그 누군가는 머뭇거리다가 뭐에 홀린 것처럼 그 귀하고 좋고 예쁜걸 내게 준다. 나는 말도 못 하게 좋다. 당신의 것을 나에게 주어서. 내가 뭐라고 나에게 주어서. 이겨서 트로피를 차지한 것처럼 기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게 실은 간절했던 만큼 소중해서 조심하고 아껴야 한다는 것도, 어쩔 땐 꽉 쥐고 어쩔 땐 두 손으로 살살 받치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나는 몰라 난감하고 부담스러워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걸 나한테 왜 줬지? 내가 뭐라고. 나한테 줬으니 별거 아닌 거야.라고 비겁한 생각을 하고 만다. 나는 누군가와 좋은 길을 가고 싶으면서도 좋지 않은 생각만을 한다. 의심과 집착, 무시와 비교. 결국에는 정말 나쁜 일들만 생기고, 나와 누군가는 가만히 있어도 서로에게 상처 받는다. 마침내 나는 어느 날 밤 귀하고 좋고 예쁜 그것을 가던 길에 슬그머니 놓아버린다. 그 뒤의 일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길가에 버려진 마음을 발견한 이의 얼굴 같은 건 떠올려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사랑을 받아서 책임질 줄 모르는 그런 애였다.

주원은 정말 그때부터 매일 저녁 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매일 보장된 둘의 시간은 서로에게 훌쩍 가깝게 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는 자주 집에 가다 말고 아무 데나 차를 세우고 한참을 얘기했다. 어떤 날은 한강이 내려다보는 갓길에서, 어떤 날은 골목길 구석에서, 어떤 날은 집 앞 주차장에서, 얘기가 길어지는 날은 새벽에 다다랐고 차창은 두 사람의 숨으로 뿌옇게 흐려졌다. 시원한 캔 커피를 마시다가 나는 맥주 그는 콜라를 마시다가 어느 사이 따뜻한 차를 호호 불어 나눠 마시며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다.

그는 여전히 알맹이가 터지는 듯한 소리로 웃었고 나중에는 내가 쳐다만 봐도 웃기 시작했다. 나는 갈수록 그를 더 웃기고 싶었다. 그가 좋아하는 드라마 주인공 흉내를 내기도 했고 다른 선생들을 성대모사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안 하던 짓들이었다. 뭔가 작은 사건이라도 생기면 나는 그에게 어떻게 더 재미있게 말해줄까 생각하며 종일 신이 났다.
그에게만은 잊거나 감추었던 지난 이야기도 하고는 했다. 우스운 꿈과 먼 바람들을 고백했다. 언제나 마음에 가시 몇 개쯤을 품고 살던 내가 그 차 안에서만큼은 , 그의 옆자리에서는, 반들반들 부드럽고 유연하며 별걸 다 하는 애가 되어갔다.
무엇도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어려운 일이 없었을 뿐인 그를 금수저라고 타박하고 질투하면서도 그의 편안하고 좋은 기운들이 나에게 묻는 것이 좋았다. 그가 웃는 만큼 나도 웃었고 그의 말이 곳곳으로 흘러들었으며 그가 물끄러미 보는 얼굴을 나는 만졌다.
나는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몰랐지만 그가 어떤 방향을 선택했다는 것은 알았다. 나는 아무 생각도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던 것 같다. 사실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선택한 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이었고,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그토록 불편함 없도록 그가 차츰 이루어내고 있었다. 사랑과 배려, 이해와 인정과 같은 흔하지만 실제 하지 않았던 명사들을 나는 그를 보며 처음처럼 배워갔다.

그 수많은 밤 중의 무수한 순간들마다 나는 주원에게도 당신의 귀한 것을 나 주세요- 했을 것이다. 매일 열심히 간절하게 그랬을 것이다. 주원은 당연한 것처럼 자신의 것들을 주었다. 그에게는 망설임과 혼란이 없었다. 그런데 받고 보니 그것들은 전과 너무 달랐다. 그건 내 생각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3보 주원이라고 불렀다. 내가 3 보이상 걸으면 그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거였다. 주원은 나를 자기가 낳은 아이 같다고 말하며 아꼈다. 아무거나 먹고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것에나 상처 받게 하지 않았다. 내가 식탁 위에 티슈 한 장을 펼치고 손톱을 깎은 다음 티슈를 오므려 정리하는 것을, 그런 것도 할 줄 알고 너는 정말 사랑스러운 애야!라고 쓰여있는 얼굴로 내내 지켜보았다. 하루하루 자라는 손톱마저 신기해했다. 매번 무릎을 굽히고 신발끈을 묶어 주었고, 어제 잡고 또 잡는 손을 잡으면서도 설레어했다. 케첩을 새로 사고 욕실을 청소하고 원피스 길이를 수선하는 나의 시시콜콜한 일상들에 기쁘게 상관했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다.

한 사람에게는 오직 한사람이면 된다. 한 사람의 사랑은 나의 존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스스로 알게 하는 일이었다.
주원으로 인해 나의 작은 몸 안에서 많은 부분들이 새로 생겨났다. 너의 눈 아래 작은 점, 너의 오른쪽 덧니, 너의 하얀 손가락, 이라고 그가 사랑한다는 말을 덧붙여 꼼꼼하게 일러줄 때마다 그것들은 마치 그 자리에 이제 막 돋아나는 것 같았다. 그가 말하는 나의 구석구석을 나는 그제야 보았고, 또한 사랑하게 되었으며 내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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