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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Jul 15. 2020

대신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

1

나는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대학에 입학해서는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던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가, 6년이나 학교를 다니고도 졸업을 못한 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출소한 사람처럼 약간의 사회적 감각들을 잃은 뒤였다. 졸업장 없이는 제대로  취업을   없어서 휴학생 신분으로  군데 면접을  끝에 강남에  보습 학원의 국어 강사로 처음 일하게 되었다.

주원은 그곳의 영어 강사였다. 그는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좋은 대학을 졸업했으며 대학원에 진학하기  아르바이트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환한 얼굴로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피부가 하얗고 약간 곱슬의 갈색 머리카락은 손을 대면 스르르 부드럽게 쓸어 올릴  있었다. 대다수가 여자인 교무실에서 그는 모든 사람들과  어울렸는데, 사람들은 자주 그를 둘러싸고 동그랗게 모여 수다를 떨었다. 어디서든 그의 호탕하고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는 스스럼없이 터졌다. 마치  알맹이 여러 개가 한꺼번에 터지는  같은  소리는  어린아이의  같았다. 나는 가끔  소리가 순수함이 모르는 무례함인  같았다. 그가 그럴  있는 것은 세상이 그에게는  관대하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눈치 보는 일도, 마음 다치는 일도 없는 사람 특유의 천진한 기운을 그는 혼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처음부터 싫었다.

내가 그를 부지런히, 보이지 않게 싫어하는 와중에 여름이 시작됐다.
어느 주말, 특강을 마치고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서 회식을 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주원과 나란히 앉았다. 더위가 기승 일 때라 꽁꽁 얼린 500밀리리터 맥주잔에 음료가 담겨 나왔다. 처음에는 시원하고 신기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냉기가 식으며 컵의 표면에 지저분하게 물이 배어 나왔는데, 나는 그게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마침 옆에 앉은 주원이 들어 올리는 컵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나는 얼른 두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컵 아래에 받쳤다. 냅킨이 멀어 급하게 해 버린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놓지도 먹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컵을  채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나는  단어의 생김새를 그때 알았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보아도 나는 오직 떨어지는 물이 신경 쓰여 냅킨을 가져다 손을 닦고 그의  밑동도 그걸로 틀어막았다.

주원이 그때 반하다, 라는 평생 모를  같았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을, 나는 아주 나중에 알았다.
토요일  , 의미 없는  찰나의 기억을 마지막까지 다치지 않게 가지고 있을 거라고, 그는 다짐처럼 자주 말하고는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휴일에 주원은 뜬금없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상수동에 있던  자취방 앞으로 차를 가지고 왔다. 드라이브나 하자며 촌스러운 말을 했었던  같다. 그토록 꾸준히 싫어한 그의 이유 없는 연락과 맥락 없는 만남을 내가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날  나는 그의 차에 탔고, 그는 재빨리 에어컨 날개 방향을 일일이 건드려 내쪽으로 향하게 해 주었고, 능숙하게 운전해 강변북로에 들어섰고, 나는 서울 사람이면서 한강의 야경을 처음  것처럼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부터 나는 내가  그와 함께 있었는지 이상했지만 정작 그의 옆에 앉아 있을 때는  이상한 사실을 몰랐다. 그저 내가 그날 넋을 잃고 바라본 도시의 밤은, 불규칙하게 빛나는 수백의 불빛은, 검고 투명한 강물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게 보였다. 나의 거칠고 소란스러웠던 대부분의 밤에 바라본 모든 풍경은 나를 아프게만 했는데, 그날의 반짝거리는 것들은 모두 아주 편안하고 고요한 시간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가 가진 여유와 친근함은 작은 공간 안에서 그토록  힘을 내어 내가 알고 있던 것을 다시 알게 했다.
한참 조용하던 주원은 대뜸 나에게 연애 중인지 물었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신은 오랜 연인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럼에도 자꾸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잡을  없는 속도로 가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오직 사실만을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거기에 어떤 의도도 섞지 않았다. 나는 놀랍게도 그의 고백이 놀랍지 않았다. 원래 거기에 있는 사람에게 어제 들었던 어떤 사실을  듣는  같이 익숙했다.  고백은 바로 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길이가 짧고 두꺼운 창처럼 곧장 나에게 박혔다. 나는 그가 많지 않은 단어로 많은 것을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대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인 것도 알았다.

하지만  밤은 아무것도 변하게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가끔 그가 혹은 내가, 늦은 밤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뜬금없이 서로에게 전화를 걸어 가벼운  마디 나누는 일은 있었지만 주원과 나는 한 뼘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열심히 싫어했던 마음이, 증발하듯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어떤 것은 손대지 않아도 무너질  있다는 것을 나는 차츰 알게 되었다.

아직 열대야였던  , 나는 수업을 마치고 몇몇 사람들과 지하철역으로 느리게 걷고 있었다.  한번 타본 그의 차가 우리가 걷는 방향의 도로 위를 또한 느리고 달리고 있는 것을 나는 몰래 발견했다. 그때  선생이  팔을 붙들며 맥주 한잔만 하고 가자고 졸랐다. 한잔만, ? 하며 검지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팔짱을  끼었다. 사교성이 별로 없었던 나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되었고 , 아니요  하나를 고르지 못해 옹알거렸다. 그러느라 그의 차가 도로를 벗어나 우회전하여  앞에 정차하는 줄도 몰랐다. 그가 차에서 내려 나를 불렀을  나는 이상하게 깜짝 놀랐고 요란하게 심장이 울렸다.
내가 옆자리에 앉은 뒤에도 한참 동안 조용하던 주원이 말했다.

내가 그냥 매일 데려다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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