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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Jun 23. 2023

향긋, 방긋, 싱긋

그는 오렌지꽃 향이 난다는 주황색의 칵테일에 코를 대고 향긋하다,라고 말한다.

옆에 앉은 나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한다.

- 향긋하다는 말 오랜만에 들으니 되게 아름다운 거 같아

- 그래?

- 응.. 근데 긋자가 들어가는 단어는 다 그렇다? 지긋 싱긋 방긋 나긋..

- 정말 그러네 ㅎㅎ

- 싱긋하고 방긋 중에서는 싱긋이 더 어린 말 같지 않아?

- 나는 방긋이 더 어린 말 같은데? 뭔가 순수함이 느껴져. 싱긋은 여유가 있고.

- 그러고 보니 그러네.

우리는 술잔을 비운다. 두서없고 나긋한 대화는 자정을 넘어선다.


나는 코끼리 얘기를 하다가 말고 자두 얘기를 한다고, 앞도 뒤도 없는 말을 한다는 핀잔을 곧잘 듣는 사람이었다. 떠오르는 대로 즉시 말하기 좋아하지만, 누군가에겐 무례하거나 당혹스러울 수 있는 일이기에 자주 흘려보내고는 했다. 진아는 처음부터 그런 말들을 잘 받아주었다. 작은 생각들은 그와 나누는 대화 안에서 마음껏 부풀고 오래 머물 수 있었다. 이제 당분간 향긋이라는 낱말은 잊기 어렵게 되었다.


글쓰기를 왜 하냐고, 어느 날 진아는 내게 물었다. 나는 아주 불안한 밤이면 자고 있는 아이의 방문을 몇 번이나 열어본다고 말하면서, 글쓰기는 나를 그런 식으로 확인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내가 거기에 잘 있는지 방문을 열어보는 마음으로 쓰는 거라고. 뭐라도 쓰고 나면 잘 있었군, 하고 안심이 된다고.

얘기를 하면서 나도 내가 그런 이유로 글쓰기를 한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물어주지 않았다면 대답할 기회가 없어 왜 글을 쓰는지 모르는 채로 또 썼을 것이다.


진아가 무엇인가 물으면, 나는 나를 조금씩 더 알게 된다. 질문은 서로에게 발견이 된다. 누군가의 질문은 한 사람의 놀랍고 진실한 고유함을 찾아내는 일을 해내기도 한다. 진아에게 나도 그런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물을 것인가 고민하다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을 담당하는 것에 대해말해달라고 요청했다. 사랑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더 깊어지듯 그의 행복이 말해지면서 한 번 더 부풀어 오르기를 바랐다.

거대한 이야기보따리를 가지고 다니는 진아는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웃음과 찰지고 유려한 말재주로 언제라도 마주 앉은 이의 혼을 쏙 빼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시집을 좋아해. 아침에 일어나면, 혹은 잠들기 전에 아무 시집이나 책장에서 집어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신기하게도 거의 모든 날 그날의 내게 필요한 시들이 열려. 그건 약간의 영적인 힘이 관여된 현상인 것 같아. 마법처럼.

시집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모으기 시작했어. 수집에 대한 욕구는 아주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뭐든 풍족하지 못한 형편 때문이기도 했지만 좋아하는 것을 마주하고 있는 그 순간의 묘한 행복이 너무 좋았어. 어릴 때 양철 과자 통에다가는 내가 보물이라고 이름 지은 것들을 모았어. 신기하게 생긴 돌, 용도를 알 수 없는 쇠고리, 머리핀에서 떨어진 인조 보석 같은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보물 상자를 열어서 들여다봤어.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황홀해졌던 것을 기억해.


동네 서점에서 처음 산 시집은 정채봉 시인의 「단 하나뿐인 당신」이었어. 천방지축 명랑해 보여도 실은 아무도 모르게 자존감이 몹시 약했던 어린이 마음에 그 제목이 번쩍 들어온 거야. 그 ‘당신’이 꼭 나인 것 같았거든. 시구들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읽고 또 읽었어. 시는 이해가 아니라 감응의 영역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 이렇게 오랫동안 시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사춘기가 시작되고는 원태연이나 이해영 같은 시인들의 사랑 시로 다이어리를 꾸미는 걸 좋아했어. 러브장이라고 불리던 것들 있잖아. ㅎㅎ 더 나중에는 이해인 수녀 같은, 맑은 기운을 주는 시들을 좋아했어. 지금도 시집은 한 달에 한두 권씩 빼먹지 않고 사. 편애하는 시인이 있는 건 아니지만 오래전 시집이 복간되면 그걸 가장 반갑게 사고는 해.







�️사실 나는 어릴 때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나쁘지 않은 그림 실력은 엄마에게서 온 것 같아. 딱 한 번 엄마가 지구 색연필로 무심히 그림 그리는 걸 본 적 있는데 실력이 정말 놀라웠어. 숨은 고수가 우리 집에 있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기분이었지. 그런 엄마가 어느 날 ‘너는 재능이 없어’라고 딱 잘라 말하는 거야. 내가 소위 돈 많이 드는 예능의 길로 들어서는 걸 말리고 싶었던 건지 냉정한 조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어. 둘 다일지도 모르지. 근데 엄마의 그 말이 아주 오랫동안 나한테 박혀서 내 그림에 대한 욕구를 방해했어. 실력도 없는데 그려서 뭐를 하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지. 사실 그림을 좋아한다고 해서 꼭 그림으로 무엇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닌데 말이야.

음악도 못지않게 좋아했는데 나는 그런 예술적 향유가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압박을 받으면서 자란 것 같아. 나중에 피카소가 ‘모든 어린아이는 예술가이고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 40년이 걸렸다.’라고 말했다는 걸 알고 내가 어릴 때 가지고 있었을지 모를 어떤 예술적 능력이나 영감, 솔직함과 자유로움이 너무 아까웠어. 억지로 잃게 된 것 같아 억울했고 되찾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예술은, 자기 존재를 표현하는 방식이잖아. 표현의 욕구는 사람 누구에게나 있고. 그러니 예술은 원래가 사사롭고 고유한 거 아닌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그야말로 나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말이지. 그걸 일찍 알았다면 나는 꼭 잡고 있었을 것 같아. 나의 예술을.


나는 모든 몰입의 시간이 좋아. 시를 읽고 묵상하고 필사하고, 그림 그리고 음악 듣고 뜨개질하고 장신구를 만드는 시간 전부 다 좋아. 그 시간과 행위 통째로 다 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해.








�️나는 사실 아주 예민하고 내향적인 사람인데 광대로서의 책임이 있는 사람처럼 자랐어. 목회자의 딸이기 때문에 바르고도 밝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아마도 엄마 뱃속에서 부터 가지게 된 것 같아. 작은 동네, 작은 학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죄다 나를 알고 지켜보고 판단하고 있다는 걸 늘 의식했어. 스스로 품행을 단속하고 검열하느라 편한 날이 없었어.


열아홉 살에 처음 공황을 겪었는데, 사실 그때는 그게 공황인 줄도 모르던 시절이야. 갑자기 녹아내리는 것처럼 스러져서 두세 달 동안 먹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고 누워만 있었어. 고3인데 학교도 못 가고. 나는 내가 꼭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어. 내가 없어지니 정말 갑자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가만히 누워있을 수밖에. 그러던 중에 학교 선생님들이 나 때문에 기도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아빠한테 전해 들었는데 며칠 동안 그 얘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더니 신기하게도 조금씩 증상이 나아지는 거야. 말도 다시 하게 됐고 밥도 먹었고 집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봤는데, 내가 실은 엄청 사랑받고 싶었는데 사랑받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기운이 난 걸 수도 있겠고, 그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몸을 일으킨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정확한 병의 시작과 끝의 이유는 알 수 없어. 나는 다만 그때부터, 너무 살고 싶은 열망과 죽고 싶은 마음은 나란히 공존한다는 걸 이해하게 됐어. 언제나 두 마음이 똑같은 무게로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아. 그게 나한테 남은 깨달음이고 후유증이야.


애초에 공황이 나한테 온 것이 혹시 괴리 때문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안의 나와 밖의 나. 진짜 나와 가짜 나.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호두 같아. 진짜 나는 아주 단단한 껍질 안에 보이지 않는 알맹이로 있는 거야. 정말로 그 안의 나는 아주 아름답게 여물었는데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 그래서 사람들에게 막 보여주고 싶어. 내가 말이 많은 건 그것 때문이야. ㅎㅎ 나는 말하는 게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서 내가 만약에 말이 없어지면 그건 굉장히 큰 병이 났다는 얘기야. 나는 아플 때도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왜 아픈지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나거든. 나를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자꾸 말하게 해.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듣는 것보다 자기 얘기하기를 더 좋아하잖아. 그래서 일단 내가 먼저 들어야겠다 생각했어. 내가 먼저 잘 들어주면 남들도 내 얘기를 잘 들어주겠지 싶어서. 근데 어떻게 해도 충분하지가 않더라고. 내 이야기가 제대로 경청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늘 다른 방법을 찾았던 것 같아. 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방법.

완전한 몰입의 상태로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 말소리 없이도 충분히 말하고 있다고 느껴져. 들어주는 상대가 없어도 허무하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나한테 스스로 놀라는 일이야. 오늘 아침에 <나비가 쓰고 남은 나비>라는 시를 읽었는데, ‘나비가 어머나 비가’라는 구절을 보고 너무 좋아서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어. 그런 식의 언어유희가 갑자기 너무 사랑스럽더라고. 내가 그런 걸 좋아하는구나, 하고 오늘 또 새로운 발견을 한 거야.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나도 아주 다양하고 복잡하고 입체적인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나를 속속들이 탐지하는 일은 재미가 쏠쏠해.


지금도 공황은 언제든 다시 나를 덮칠 수 있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인정해. 그건 다만 관리하는 거야. 그래도 나는 나의 공황을 다독이고 잠재우는 방법을 알아.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 돼. 나는 작은 것들을 좋아해. 그러니까 공황을 관리하면서 나는 가성비 좋은 인간이 됐어. 작은 일에도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으니까.








�️ 기록은 말 그대로 나를 남겨두는 일이고 나에 대한 증거인 것 같아. 내 방식으로 읽어 낸 시를 가지고 시화 하나를 완성하면 마치 그 시 한 편을 통째로 먹은 것처럼 포만감이 느껴져. 그 시는 이제 내 것이 된 것 같아. 그러니까 시화는 나한테는 단순히 시 베껴 쓰기가 아니고 오늘 나의 일부를 만들고 남기는 일과 같아.


무언가를 가지런히 그리고 쓰거나 뜨개질 같이 반복되는 작업을 하는 기분은 산책하고 비슷해. 시공간이 가지런해지고 떠다니던 생각들도 자기 자리를 찾는 것 같아. 그러니까 그것들을 며칠만 안 해도 우울해져. 질서 없고 불안한 것들이 내 안에서 막 우왕좌왕하니까 너무 피곤하고 소란해.







 �️내가 지금까지 만들고 쓴 것들은 하나도 버리지 않았어. 비록 집에 보관 공간이 넉넉잖아서 여기저기 따로 맡겨두긴 했지만.  빨리 모두 가져와서 한번 대대적으로 정리해보고 싶어. 가장 먼저 열어보고 싶은 건 오래전에 쓴 일기장이랑 어릴 때 친구들하고 주고받은 편지들이야. 아마도 지금 내 기억을 훨씬 넘어서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 거야. 그건 사진보다도 더 분명하게 예전의 나를 담고 있을 테니 생각만 해도 반갑고 애틋해. 

날마다 '지금 여기 내가 있다'는 증거를 모두 남기고 지켜 온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 존재 증거물에 있어서 나는 확실한 부자야. ㅎㅎ







�️내 꿈은 언제나 사적이야.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가족이나 여러 상황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아. 

내 꿈은, 작은 전시회를 여는 거야. 나의 궤적을 한 곳에다 모조리 진열해보고 싶어. 나는 항상 나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잖아. ‘보러 오세요, 나를’ 이렇게 크게 걸고 사람들을 많이 초대하고 싶어. 그동안 써둔 조각 글을 모아서 소책자도 내고 내 손으로 만든 모든 물건과 그림들, 시화들을 전시하는 거야. 그건 정말로.. 모든 시간의 나와 모든 곳의 내가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이 될 거야. 내가 누군지 한마디 말도 필요하지 않을 거야.









진아의 세계는 소소하고 다채롭고 사랑스러운 것들로 가득하다. 책장 켜켜이 시집들을 모으고, 갖가지 장식품과 문구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고, 매일 밤 빈티지 스타일로 정성스레 꾸민 다이어리에 시화를 그린다. ‘플러리’ 어플에서 개인 라디오 채널을 녹음하고, 매달 교회 책자에 글 한 편을 기고한다. 오색의 실로 엮어 만든 그만의 액세서리들이 서랍 가득 채워져 있다. 좋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들 중 하나를 골라 솜씨 좋게 포장해 선물로 건넨다. 손수 만든 썬 캐처가 창가에 매달려 집안에 그려놓는 빛의 무늬들을 오래 바라본다. 철마다 오직 하나뿐인 귀여운 뜨개 모자를 만들어 쓰고, 펜 한 자루에 딱 맞는 앙증맞은 펜 커버 역시 뜨개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닌다. 그의 뜨개 가방은 그리고 쓸 작은 것들로 늘 묵직하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한다. 그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기가 훨씬 어렵고 중대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가 가끔 어지러운 것은 마치 멀미처럼, 나와 나 자신의 차이를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간극을 좁히고 더는 멀미하지 않기 위해 진아는,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걸 지켜내고 반복한다. 그는 그것들을 자기만의 예술이라고도, 일상이라고도 말한다. 그의 말대로 예술이 자신 존재를 표현하는 모든 시간과 행위를 뜻하는 것이라면, 진아는 언제나 예술가다. 잘 여문 호두알은 껍질 안에서도 날마다 예술적으로 꼼지락거리며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다.










 이야기를 잇는 상점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 이야기가 담긴 물건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상점'에는 '서로서로', '뜨ㅓ', '사부작 사부작', '개, 장소, 환대', '그 여자가 사제끼는 법' 5개의 이야기가 입점해 있고, 매주 각 상점의 이야기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always.spring111@gmail.com

서울특별시 마포구 포은로 134-1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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