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낱말 하나만 가지고도 길고 긴 글을 쓸 수 있다. 글자를 바라보고 바라보고 바라보면 거기에서 한줄기 뭔가가 피어오른다. 아니면 느닷없이 뭔가 펄쩍 뛰어 내게 건너온다.
지난가을 내가 끈질기게 보았던 것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라보아도 잠든 낱말에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동도 없는 것에 대해서 쓰는 일은 괴롭고 어려웠다.
아마도 쓰는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 자신의 일부를 두고 와야 하는가 보다.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글로 그려내고 싶은 자리, 반드시 그리 될 거라는 예감을 주는 자리. 어린 남매의 빵가루처럼 마음을 떼어서라도 남겨두고 왔어야 했는데. 그런 뒤에 시간의 새들에게 모조리 쪼아 먹히지 않도록 자주자주 돌아보았어야 했는데.
급히 갈 곳도 없었으면서 나는 영롱했던 순간들로부터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세월은 덩어리째 울컥울컥 삼켜졌다. 낱낱의 순간들은 발 아래 부스러기로 떨어졌다. 어떤 밤들에 내가 할 일은 어둠 속에서 부스러기를 줍는 것 뿐이었다. 이런 것이 다 있었지, 하고 들여다 보자 마음이 따끔거렸다. 눈 감은 낱말 곁을 어정거리며 그 가을 열 장짜리 글을 만들 때, 돌아갈 길도 되새길 주문도 하나 없는 빈손으로 서툴게 땜질과 바느질만을 반복되었다.
그래도 글을 다 완성하고 보니 그건 여지없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재현해 낼 수 없는 시절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