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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로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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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Jul 17. 2023

여름 나라의 먼 들

- 서로의 달 ◐ 1편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

                                    

별 같고 시 같은 애틋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때때로 깊이, 기쁘게 그리움 속으로 침몰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떤 대상을 미세하게 다룰 줄 안다면 그건 사랑도 섬세하게 할 줄 안다는 뜻이다.’라는 문장이 여름 한낮 수풀 속으로 기운 한 쌍의 작은 몸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그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어린 나는 방학이 되면 먼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겨지곤 했다. 나는 그게 꼭 싫지만은 않았는데, 우선 할머니는 엄마만큼 잔소리와 참견이 심하지 않아 숙제 걱정 없이 마음대로 놀고먹고 잘 수 있었기 때문이고, 집성촌이었던 그곳에는 방학마다 나처럼 도시에서 내려온 멀고 가까운 친척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보다 여름에 아이들은 더욱 많았고 더욱 열렬히 뛰어놀았다. 논과 밭을 지나 오솔길과 들로 나가 달리고, 개울에서 헤엄치고, 곤충과 올갱이와 물고기를 잡고, 과일을 따고, 모닥불을 피우며 해가 긴 날들을 아낌없이 즐겼다. 밤이 늦도록 플래시를 비추며 얼음 땡을 하다가 동네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으면 그때서야 겨우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 손발을 닦고 잤다. 어느 집에 몰려가도 옥수수와 수박을 대접받았고, 어느 평상에서도 주인처럼 누워 별을 보았다.      

가장 단짝이었던 친구는 나이도 같고 키도 비슷한 먼 친척뻘의 아이였다. 할머니집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나는 그 애가 내려왔느냐고 물어보았다. 엊그제 왔더라. 하면 마음이 급해져 다음날 새벽닭이랑 같이 일어나 나가 놀 채비를 했다. 그러나 막상 다시 만나면 서로 서먹하여 하루쯤은 거리를 두었다. 머리 길이도 몸집도 말투도 지난 계절과는 달라 보였기 때문에, 딴 애들과 섞여 놀며 조금 떨어진 채로 서로를 탐색하고 낯섦을 추스르는 시간이 꼭 하루쯤은 필요했다.

다음날이 되면 우리는 본격적으로 서로를 겨드랑이에 끼고 온 동네를 쏘다녔다. 그 애는 수영을 잘했고 나는 올갱이를 잘 잡았다. 그 애가 개울에서 물개처럼 헤엄치는 사이 나는 할머니의 작은 소쿠리에 다슬기를 가득 채웠다. 그러다 얼룩 물뱀이 수풀 사이에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면 그 애는 나를 재빨리 끌어다 넓은 바위에 올라서게 했다. 종일 개울에서 놀고 난 뒤에는 할머니가 데쳐 준 올갱이를 이쑤시개로 백 개쯤 빼먹고 우리는 화면 조정 시간이 될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다가 함께 잠들었다.

나는 벌레를 무서워하고 그 애는 가축을 무서워했다. 소금쟁이가 모인 웅덩이를 만나면 그 애가 먼저 첨벙첨벙 물에 교란을 일으킨 뒤에 내가 눈을 꼭 감고 웅덩이 위를 달렸다. 개가 있는 이웃집에 들어갈 때는 내가 앞서가 개의 주의를 끄는 동안 그 애가 쏜살같이 대문을 통과했다. 한 번은 우리 옆집의 돼지가 나무판자로 만든 울타리를 부수고 탈출한 사건이 벌어졌다. 온 동네 아이들이 돼지와 함께 논길 위를 널뛰며 흥분했다. 난리통에 겁을 먹고 하마터면 오물이 잔뜩 묻은 돼지와 정면충돌할 뻔한 그 애 손을 잡고 나는 뒷길로 돌아가 담장의 개구멍 앞에 앉았다. 뒤늦게 밭일하던 어른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돼지를 잡았다 놓쳤다 난리법석은 이어졌고, 그 진귀한 소동을 우리는 끝까지 안전하게 관망했다.     


여름에 모든 존재는 신이 나고 빛이 나고 살아난다. 터질 것같이 싱그러운 그 계절을 호쾌하게 가로지르던 시절이었다.     


들꽃을 한 아름 꺾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문득 줄기에 붙은 애벌레 한 마리를 보았다. 나는 으악! 하고 흙길에 꽃다발을 내던졌다. 그 애는 얼른 애벌레가 있는 꽃송이를 찾아 줍더니 왔던 길로 몸을 돌렸다. 어디가? 물으니 빨리 와,라고 대답했다. 나는 꽃을 들고 조심조심 걷는 그 애의 뒤꿈치를 따랐다. 옥수수와 고추밭을 지나 들에 다다르자, 그 애는 애벌레를 검지 손가락에 태워 가장 무성한 풀더미 속 가장 푸른 이파리 위에다 살며시 옮겼다. 신중하고 세심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애벌레를 주시하는 그 애의 이마에 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수굿이 수풀 속의 작은 움직임을 들여다보았다.

애벌레가 떠난 꽃송이를 들고 다시 돌아올 때는 해가 막 기울기 시작했고 배가 고팠다. 쟤는 그럼 나비가 되는 거냐고 내가 묻자 그 애는 잠자코 생각하더니 작은 나방 같은 게 될 수도 있고.라고 대답했다. 소면 부스러기처럼 왜소하고 창백한 것이 영판 다른 모습으로 변해 날아오르는 신비를 생각하자 입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그 후로 무수한 여름이 지났다.     


얼마 전 나는 사랑하는 친구에게서 꽃다발을 받았다. 채도가 높은 알사탕처럼 달콤한 빛깔의 꽃잎이 겹겹이 포개진, 꼭 여름 나라의 먼 들마다 피어있을 것 같은 꽃들이었다. 꽃을 안아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나는 약간 감격했다.

꽃다발은 유리 꽃병에 담겨 우리 집 창가에 놓였고, 나는 아침마다 새 물을 갈아주었다. 사 일째 되던 날, 물을 갈아주려고 가까이 간 나는 무언가를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자세히 보니 작은 애벌레가 기울기를 맞추어 초록 줄기 위에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틀린 그림 찾기의 마지막 문제처럼 쉽게 찾을 수 없을 만큼 감쪽같았다. 아직도 모든 벌레를 무서워하는 나는 놀란 채로 몸이 굳어버렸다. 애벌레 역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죽은 체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아닌 척하며 마주 서 있다가, 내가 먼저 그 자리를 살금살금 벗어났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서 꽃을 준 친구에게 상황을 상세히 적은 메시지를 보냈다. ‘알겠어, 내가 갈게.’라고 간결한 답을 준 친구는 고맙게도 그날 오후 집으로 와주었다. 그는 씩씩하게 꽃병을 싱크대로 옮긴 뒤 다발을 꺼내 펼쳤다. 그는 꽃과 줄기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거침없는 손이 애벌레를 짓누를까 걱정이 되어 나는 조심하라고 작게 말했다. 한참 동안 고개를 파묻고 다발 속을 헤집은 끝에 우리는 더욱 교묘한 자세로 줄기에 밀착된 애벌레를 찾았다. 우리는 애벌레가 붙잡고 있는 꽃송이만을 조심히 받쳐 들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와 자동문과 횡단보도와 계단을 지나 물이 흐르고 나무가 많고 잡초가 무성한 산책로로 향했다. 친구는 물가의 풀더미 위에 꽃을 가까이 대고 살살 떨구었다. 새 풀 위에 안착한 애벌레는 약간 어리둥절한 듯하더니 이내 아주 조금씩 주름을 잡았다 풀었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풀잎을 다 벗어나는데도 하루쯤은 걸릴 것 같았다. 몸을 수그리고 애벌레의 너무너무 작은 몸짓을 바라볼 때 나의 몸과 마음도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작은 것을 다루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땀이 났고 그때, 나는 어린 나의 여름을 기억했다.     


온통 지금 안에 있을 때는 어떤 지금이 내게 기억될지 알지 못한다. 기억 중에 어떤 기억은 놀라울 만큼 오래 달릴 수 있다는 것도 모른다.


서른 번의 여름이 지났고 애벌레는 이번에는 들이 아니라 아파트 산책로로 돌아갔고 어린 친구는 어른 친구와 다른 얼굴이지만, 여름은 꼭 그때 그 여름인 것 같다. 애벌레를 돌려보내는 일에 진심인 친구와 빈집으로 남겨진 꽃송이를 들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나는 오래 달려온 기억이 마침내 내게 도착한 것에 조용히 놀란다. 하나의 시절과 계절과 풍경이 그림책처럼 열린다. 지금은 그 애틋한 풍경 속에 있는 것이라면 모두,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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