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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r 30. 2021

[뚜벅뚜벅, 다시 제주] 안녕 아름다운 제주

(넷째 날 #04) 서우봉에서 함덕해수욕장으로, 아름다운 제주 말과 바다

다시 서우봉에 올라 올레길을 따라 함덕으로 향한다.

닿을 듯이 가까이 있던 바다가 이제 저 멀리 보인다.

조금 더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조선시대 서산봉수대가 있던 터에 도착한다.

지금은 봉수대는 터만 남았고 철책으로 둘러싸인 군사시설과 여행자가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두 개 놓여있다.

서우봉 길에는 곳곳에 안내도가 잘 정비되어 있었는데 지역 단체에서 관리하는 것 같았다.

안내도에는 다양한 산책 코스가 그려져 있었는데 안내도대로 따라가다가 내가 자꾸 길을 잃는 이유가 빼도 박도 못하게 지도를 잘 못 봐서 그렇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안내도 중에 마음에 드는 코스는 해안 산책로였는데 갈수록 점점 바다에서 멀어졌다.

망오름에 도착하니 멀리 제주 시내가 내려다 보이고 한 편으로는 산소가 있다.

재밌는 모양의 나무도 한 그루 보이는데 지역 주민들한테는 일출 명소라고 한다.



함덕 해수욕장에 근접했을 무렵 밭에서 풀을 뜯는 말 한 마리를 발견했다.

몇 년 전 캄보디아에 갔을 당시 아무 데나 풀어놓고 키우는 소를 만나 한참 쓰다듬었던 기억이 났다.

제주도에서 말을 자주 보긴 했어도 아주 가까이서 쓰다듬은 적은 없었기 때문에 멀찍이 쪼그려 앉아서 관찰했다.

말은 질퍽한 흙바닥에서 흙 목욕이라도 즐기는지 온 털이 흙칠이 되어 있었고 내가 쳐다보는 중에도 계속해서 머리를 흙바닥에 부벼댔다.

항상 반지르르한 말만 보다가 흙투성이 말을 보니 왜 그러는지 알 수는 없어도 귀엽게 보였다.

오분 정도 가만히 쳐다보니 말은 호기심이 생겼는지 먼저 다가왔다.

고양이 집사로서 다른 동물은 잘 모르지만 일단 상대가 먼저 다가오면 그땐 나도 다가가도 된다고 믿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가까이서 보니 말고삐가 한쪽으로 돌아가서 녀석의 눈을 찌르고 있었다.

다시 오분 정도 이마와 갈기를 쓰다듬어 주다가 고삐가 더 이상 눈을 찌르지 않도록 위치를 조정해줬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녀석이 고마웠는지 연신 냄새를 맡고 핥기 시작했다.

너무 귀여워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더니 끝도 없이 부비적 거린다.

결국 바지며 폴라티가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카메라는 안 돼"

말을 알아 들었는지 더 집요하게 카메라를 핥으려 든다.

결국 카메라도 흙이 잔뜩 묻었다.

어제는 비, 오늘은 흙. 내 카메라 고생이 많구나.




이내 엉덩이를 들이민다.

고양이는 궁디팡팡을 하면 좋아하는데 말도 그런가?

엉덩이를 쓰다듬어주다 토닥거리니 몹시 좋아한다.

말의 생리를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말이 왜 엉덩이 두드려주는 걸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근데 멈추면 뒤돌아보고 멈추면 뒤돌아보더니 점점 더 엉덩이를 밀착시킨다.

"기분 좋아 보이니 다행이다. 근데 나도 이제 함덕 해수욕장으로 가야지. 잘 있어."

신이 나서 엉덩이를 뒤로 자꾸만 들이밀던 녀석이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마도 짧은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할 테다.




저 말은 외로울까.

주인아줌마나 아저씨가 잘해주니?

그래도 해변가나 승마체험장에서 쉴 새 없이 같은 코스를 돌며 고통받는 말들 보단 행복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방에 넣어둔 후드티를 다시 입었다.

다행히 말이랑 같이 흙밭에서 구른 꼴은 면했다.

함덕에 도착해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어느덧 사위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이 저무는구나.

역시 비수기여서 그런가. 산책로 끝부분에 홀로 앉아 다시 바다를 한참 바라본다.

모래사장에서 사람들 틈에서 예쁜 사진을 남기는 것도 좋지만 혼자 여행을 왔을 땐 되도록 혼자 조용히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에 앉아 멍하니 바라본다.

풍경에 무슨 뜻이 있을까. 그저 멍하니 바라보면 마음이 조용하고 평화롭다.




함덕 해수욕장으로 내려가자 점점 사람들이 많아졌다. 역시 제주의 대표적인 명소 중 하나인 만큼 비수기여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익살스러운 돌하르방도 있다.

가장 들뜬 건 아이들이다.

모래 장난을 치며 해변을 뛰어다닌다.

아직 물이 찬데 아이들은 추위를 모르는 것 같다.



[카페 델문도]에 앉아 잠시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커피나 빵 맛을 떠나 풍경이 정말 아름다운 카페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는 항상 눈치 게임이다.

지하철에 금방 빌 것 같은 자리를 찾듯 바다 쪽 자리를 훑어보고 잠시간 기다렸다.

다행히 얼마 안 되어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카페 바로 옆에 [함덕별장]이라는 빈티지 숍이 있어 잠시 들렀다.

마늘빵 사고 저녁 먹고 숙소에서 짐 찾아 비행기 타려면 시간이 촉박한데도 방앗간을 발견한 참새마냥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예쁜 소품이 많기도 했지만 점원 언니가 유쾌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잔뜩 사고 말았다.




오드랑베이커리의 마늘 바게트가 함덕의 명물이라고 한다.

꼭 먹어봐야 한다는 강력한 추천을 받은 터라 미리 전화로 남은 빵이 있는지 확인하고 들렀다.

다행히 두 개가 남아있어서 바게트를 살 수 있었다.

계산하는 몇 분 사이 뒤로 사람들이 줄을 섰다.

"빵 언제 나와요?"

"지금 거의 다 됐어요."

예전에는 다 팔리면 못 사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인기가 많으니 계속해서 바게트를 굽는 모양이었다. 

에그타르트나 케익도 맛있어 보였지만 뚜벅이라 더 살 수가 없다.

다행히 품에 안은 바게트가 갓 구운 듯 따뜻해 마음이 넉넉해진다.




흐뭇하게 매장에서 나오는데 매장 앞에 차 한 대가 열심히 후진 중이다.

저들도 빵을 사고 가는 길 같은데 바로 뒤에 전봇대가 있어 영 불안하다 싶더니 결국 세게 들이박고 말았다.

빠각

운전자는 두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져서 한 손으로 벌어진 입을 가리며 내렸다.

내 또래 여자였는데 얼굴에 '세상에'라고 쓰여 있다.

세상에. 내 마음이 다 쓰리다.

면허만 없다 뿐이지 남 얘기가 아니다.

내가 면허를 따고 제주에 와도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보험처리가 얼마나 되려나 걱정을 하며 [순풍해장국]에 갔다.

7시 반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어느덧 여섯 시라 정말 게 눈 감추듯이 허겁지겁 먹었다.

아마 옆 테이블에서는 며칠 굶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동네 맛집이라더니 맛이 자극적이지 않고 좋았다.

좀 더 시간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마지막에 맛있는 해장국을 한 그릇 먹으니 아쉽지 않다.




택시를 타서 기사님께 숙소에서 짐 찾고 공항으로 가려고 하는데 괜찮을지 여쭈었다.

"몇 시 비행기 타는데?"

"일곱 시 반이요."

"못 가. 이제 퇴근 시간 겹쳐서 못 가."

기사님이 아주 단호하게 비행기 못 탄다고 하신다.

못 타면 어쩔 수 없지. 표 값은 아깝지만 다행히 내일은 주말이라 회사 펑크낼 걱정은 없다.

"못 가요? 그래도 최대한 부탁드릴게요."

비행기를 못 탄다고 해도 태연하니 아저씨는 숫제 대책 없는 손님이 걱정되기 시작했나 보다.

아무 말씀도 없이 아주 노련하게 운전을 하시는데 어떤 마법을 부린 건지 숙소에서 짐을 찾고도 무려 일곱 시에 공항에 도착했다.

"벌써 공항이에요? 감사합니다. 기사님 덕분에 비행기 탈 수 있게 됐어요."

기사님은 당연한 걸 했다는 듯 돌하르방처럼 미동도 없다.

"정말 감사해요. 안녕히 가세요."

그러고 보면 제주에서 만난 아저씨들이 다 그랬다.

무심하게 툭툭 말씀하시는데 아무런 가식도 없이 정감 있다.




김포에는 제주에 갈 때만큼이나 빨리 도착했다.

이렇게 가까운데 다시 가려면 다음 휴가 때까지 몇 달을 기다려야 하겠지.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안녕 나의 아름다운 제주"


all photos taken with the X10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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