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에 대해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서, 내가 본격적으로 걷기 좋아하고 그것을 인지한 시점이 언제인지 찾고 싶어졌다. 연인과의 기념일을 세듯 디데이를 세고 싶어 졌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그 시점을 찾을 수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활동적인 것들을 좋아했고, 걷는 것 물론 늘 좋아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의식적으로, 시간을 내어서 걸었던 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 것도 같았다.
기억은 사실과 다를 때가 많지. 역시 아이폰 앨범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수시로 기억에 남기고 싶은 장면들은 다 찍어버리는 나의 일기장. 지금 핸드폰 앨범에 있는 2018년 사진부터 스으윽 넘겨본다. (3만 장이 넘는다....ㅎ)
20대 후반 즈음까지도 야외활동사진이 많긴 많았다. 취직 후 살게 된 동네가 한강과 가까웠고, 틈만 나면 한강공원으로 나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를 했다. 한강을 배경으로 두고 자전거를 찍은 사진이나 러닝 후 인증 사진은 많았지만, 막상 걸으며 찍은 사진은 없는 듯했다. 그때까진 '야외활동=운동이 되어야 함=걷기는 운동이 안됨=두 다리 움직이는 걸 하려면 적어도 뛰어야 함=라이딩 or 러닝 해야 함'이라고 생각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런데 러닝은 아무리 해도 재미도 없고, 아니 쉽게 말해 정이 안 갔고, (운동 다 하기 귀찮은 거 아니냐 하지만, 등산 같은 경우는 너무너무 가고 싶을 때가 많고, 심지어 헬스장도 이 정도 가기 싫지는 않다. *헬스장 러닝머신에서도 뛰지는 않는다.) 라이딩은 당시에는 진심으로 즐겨했지만, 이후의 나의 삶의 속도에는 너무 빠르게 느껴졌던 것 같다.(현재 돌이켜보니 그렇다)
서른 즈음 이직을 하며 {연남동}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연남동은 핫플레이스라 불릴만한 장소들만 있는 듯하지만, 새벽~아침 시간에는 매우 고요하고 차분한 동네다.(특히 주말 아침을 좋아했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매번 봐도 헷갈리는 골목들, 아파트, 빌라, 디자인이 눈에 띄는 신축 건물들, 홍대 대로변 거대한 빌딩들까지 분위기를 다이내믹하게 해주는 건물들, 간판, 조형물.... 차분함과 화려함이 오묘하게 섞인 이곳에서 자연히 산책을 즐겨하게 됐다. 걷다 보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걷다 보니 내 하체 근육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되었다. 걷다 보니 생각에 잠기게 되었고, 걷다 보니 나를 제삼자로서, 소중한 아이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아마 퇴사를 생각만 하고 있다가 결심하게 된 것도 이 당시의 걸음들이 방아쇠를 당긴 게 아닐까 싶다.
연남동 일대 골목과 연트럴파크에서 연희동, 안산, 연세대, 이대 등지로 걷는 범위가 점차 확장되었다. 목적지 없이 걷다가 더 멀리 걸은 날도 있었고, 조금 더 걸으면 뭐가 나올까 궁금해하며 걸은 날도 있었다. 걸은 만큼이 전부 나의 동네가 되었고, 그날의 즐거움이 되었다. 일상에서의 걸음들을 넘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한강나이트워크 22km,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걸어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걸은 만큼이 나의 세상이 되었다.
이때까지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산책을 자주 하게 됐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걸음들이 쌓이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걷는다'는 것이 나의 휴식이 되었고, 취미가 되었고, 생각 엔진이 되었고, 안식처/도피처가 되었고,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내가 되었다. 연남동으로 이사한 후 주변을 걷기 시작한 것, 그 주변을 확장한 것, 내 인생의 단계들이 맞물려 '걷기'에 애정과 의미를 갖게 되어왔으며, 최근 이를 인식한 것이다.
나에게 대단한 철학적 사유나 인문학적 지식은 없다. 다만 걸으며 지낸 지난 몇 년의 시간 동안 나는 내 마음을 의식적으로 마주하면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을 유연하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날의 재미와 행복을 찾을 수 있었고, 사유를 확장해 가는 힘을 스스로 발전(發電) 해 왔다. 내가 걸은 길들,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물, 사람, 재미, 우연, 상상, 다정함, 이야기, 생각, 감정, 변화} 들을 그냥 흘려보내기엔 걷는 것을 많이 좋아하게 되어버렸기에, 기록하기로 했다. 나의 세계를 산책하듯 걷는 매일의 이야기. 빠르고 합리적인 것이 미덕인 이 세상에서 자신의 속도대로 살아가려 애쓰는 모두에게 가닿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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