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든 적용되는 단 하나의 원리
빈티지 쇼핑은 베를린 여행의 큰 테마 중 하나로 꼽힌다.
이번 여행에서도 아예 날을 잡고 특정 지역의 빈티지 옷가게들만 돌았지만, 다 못 볼정도였다.
빈티지를 취급하는 소수의 가게들이 있다기보다, 이미 유통의 한 형태로 자리잡혀 쇼핑의 한 옵션이 되었으며
사람들이 매우 보편적이고 광범위하게 빈티지 제품을 판매하고 구매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빈티지 옷을 쇼핑하는 내내 평소 쇼핑할 때와는 다른 긴장과 들뜸이 느껴졌다.
빈티지 쇼핑에는 저렴한 가격, 흔치않은 디자인, 환경보호에 일조하는 느낌,,, 여러 재미난 요소들이 많지만
가장 큰 매력은 아무래도 '도파민 충전'인 것 같다.
언제 어디서 어떤 제품을 발견하고 건져올리게 될 지 알 수 없는,
끊임없이 유튜브나 인스타 피드를 스크롤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 7배쯤 되는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 이 즐거움을 다른 말로 하면,
나에게 어울리는, 특정 옷을 찾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행하는 테마들로 채워져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기원한 디자인인지, 대체 누가 이 옷을 소화할 수 있었을지(ㅋㅋㅋ) 상상도 되지 않는 옷들이 가득하다.
난해한 색깔은 기본(독일은 우리나라보다 화려하고 쨍한 색감을 다양하게 입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평범한 줄 알고 집어들었어도 어느 한쪽이 시원하게 뚫려있거나 당황스러운 장식들이 얹혀있거나 하는 식이다.
색이나 소재 등을 기준으로 구역을 구분해두는 친절하고 정제된 가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가게거나 더 날 것의 플리마켓의 경우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옷들이 있었구나'싶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 다양한 옷가지들을 박물관의 유물들 관람하듯 흥미롭게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내가 진짜 입을만한 옷을 고르려고 한다면 방대한 후보들 앞에 무력해질 수 있다.
플리마켓에서 신나게 도파민충전하며 쇼핑을 하고 있던 때,
같이 간 친구가 '넌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쏙쏙 골라내느냐'고 묻길래 성격 급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급한 성격'이라는 표현 안에서 벌어진 내 사고흐름이 나 또한 궁금해져서 내 쇼핑행태를 돌아보았다.
0. 모든 옷을 다 둘러볼 수 없음을 인정한다. (시간과 에너지 사용에 비효율적이다)
1.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색깔은 과감히 패스, 어울리는 혹은 내가 원하는 색깔 위주로 구경한다.
걸려있는 옷들을 전체적으로 빠르게 필터링할 수 있는 기준은 '색'이다. 디자인은 하나씩 옷을 뒤적거리며 확인해야하지만, 색깔은 옷을 건드리지 않고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웜하면서 채도까지 높은 색은 거의 들춰보지 않았다. 설사 눈으로 보기에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입어보더라도 어울리지 않아 끝내 내려두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검정색 혹은 명도가 낮은 색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이유에서 너무 짧은 치마나 바지류, 어깨가 넓게 강조되는 디자인도 패스했다.
아예 잘 어울리는 색깔(흰색, 아이보리, 명도와 채도가 모두 높아 흐리흐리한 색)이 걸려있는 부분만 구경하기도 했다.
1-1. 핏
나에게 어울리는 핏일지 가볍게 체크해준다. 소재도 같이 고려한다.
나의 경우 아래와 같은 기준이 있다.
상의 : 핏되고 길이가 길지 않아야함, 어깨라인이 드러나면 좋음
하의 : 허리는 잡아주고 아래는 넓게 떨어져야함, 길이는 발목을 넘어 아예 긴 것이 좋음
2. 마음에 들었던 옷이라도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과감히 내려놓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몇가지 건져올렸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빈티지는 사이즈 선택권이 없을 확률이 99%다. 그 옷은 only 하나다. 아무리 마음에 든 옷이였어도 사이즈가 너무 크거나, 작으면 쿨하게 포기한다. 어차피 내것이 될 수 없다. (물론 수선까지 생각해볼만큼 마음에 들고 수선이 가능해보인다면 다른 얘기지만)
결과적으로 나에게 잘 맞는 색깔과 핏의 블라우스, 니트, 원피스, 치마, 외투를 하나씩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도합 35유로에.
정리하고 보니 이 또한 결국 '나를 잘 아는 것'이라는 한마디로 정리되어버렸다. 허허.
인생의 주제이자 화두,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되는 이 한 마디.
인생의 모든 순간들은 결국 나를 알 수 있는 힌트이자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그렇게 인지한 것들을 바탕으로 또 다음 순간들을 맞이하는 것의 연속.
산티아고 순례길이 떠오른다.
나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없는 것을 잘 구분해내어 짐을 꾸려야한다.
남들이 필요하다고 한 물건이라고 챙길 필요도 없고,
남들은 언급하지도 않은 물건이라도 나에게 필요하다면 챙겨야한다.
사람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있어야 하는 것과 없어도 되는 것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된 사실은,
나에 대해서 잘 알면 알수록 짐도, 짐을 꾸리는 과정도 간결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길을 하루하루 걸어나가며 정말 나에게 중요했던 것들을 갈음해낼 수 있게된다.
어울리지 않는 것, 원하지 않는 것은 쿨하게 소거하고
나에게 잘 어울리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해나가는 것.
빈티지 쇼핑을, 순례길의 짐을, 결국에는 내 삶을 명확하고 나답게 만드는 하나의 원리였다.
p.s : 지금 이 글을 카페에서 쓰고 있는데, 화장실에 갔더니 거울에 이런게 붙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