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어떤 계기로 몇십 년이 지난 어린 시절과 청춘시절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를 방문하거나, 연애시절 돌아다녔던 거리를 지나거나, 오래된 좋아하던 음악을 듣거나, 어릴 때 친구들을 만나게 되거나 할 때면 자연스럽게 그 시절 기억이 소환되지요.
그중에서 오래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과거를 추억하는 아주 강렬한 요인입니다.
1989년에 개봉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을 다시 봤습니다.
1940년대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 잔카르도에서 극장 영사기사로 일하는 알프레도와 영화를 너무나 사랑하는 소년 토토의 이야기가 시골 극장 cinema paradiso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워낙 오래전 영화이다보니 지금은 엔리오 모리코네의 영화 음악만 들어본 사람들이 많을 텐데, 영화 자체가 참 아름답고 알프레도, 꼬마 토토에서부터 신부, 동네 사람들 등 모든 출연자의 연가가 잘 어우러지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감동뿐만 아니고 유머 코드와 그 시절의 흑백 영화를 조금씩이라도 맛볼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은 선사하는 완벽한 작품이죠.
줄거리는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지만
처음 이 영화를 봤던 20대에는 토토의 성장통만 보였다면 세월이 한참지나 다시보니 어릴때는 안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인 영화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거울을 이용해 광장의 벽에 영화를 비춰주는 장면에서 알프레도가 짓던 표정이 즐거움보다는 슬픔으로 느껴졌습니다.
영화를 광장에서 비출 수 있다는 것에 신이 난 토토는 밖으로 뛰어나가 사람들과 섞여 영화를 보지만, 평생을 영사실에 갇혀 일을 하던 알프레드는 여전히 그 좁은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창밖으로 바깥의 사람들을 쓸쓸한 표정으로 쳐다봅니다. 배우지도 못하고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삶에 지쳐버렸지만, 자신이 틀어준 영화를 밖에서 사람들이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지켜보는 중년 남성의 표정에서 근대화의 시절을 힘들게 지나오면서 가족을 먹여 살린 아버지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아마도 이미 이때 자신과는 달리 세상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는 어린 토토를 보면서 나중에 이곳을 떠나 로마로 가서 성공하라고 강권하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장면, 전쟁터에 떠나보낸 사랑하는 남편이 사망 처리되어 연금을 신청하고 돌아오다가 서럽게 우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50년대를 보낸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와중에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 포스터에 정신이 팔린 토토의 모습이 마치 우리를 보는 것 같은데 이 영화의 감독판에서는 중년의 토토가 알프레도의 장례식 때문에 다시 돌아왔을 때 어머니의 힘들었던 삶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극장판에는 토토가 30년만에 고향을 찾은 후 계속 찾아 헤멨던 어린 시절의 연인 엘레나를 만나는 장면이 빠져있습니다. 극장판에서는 이 장면이 없어지면서 중년의 엘레나를 연기했던 배우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데 마지막 엔딩크레디트에 잠깐 얼굴을 보여 저 장면은 뭘까 하는 궁금증이 들게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장면이 빠진 극장판에서는 토토가 계속 과거의 연인을 못 만난 상태에서 회상을 하기 때문에 관객들이 더 주인공의 아픔에 동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은 알프레드가 토토에게 준 선물인 필름을 틀어보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어린 시절 검열로 잘려 나갔던 키스 장면 필름을 모아 놓은 것이었는데 이제 중년의 유명 영화감독이 된 토토는 그 영상들을 보면서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떠 올리며 눈물과 함께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저에게도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를 다시 보는 행위는 마치 토토가 어린 시절의 필름을 다시 보던 그 순간처럼 이 영화를 처음 봤던 막 청춘에 접어들었던 그 시절로 나를 다시 데려가 주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산다는 건 영화와 달라. 인생은 훨씬 더 힘들지
시네마 천국에서는 1950년대의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말합니다. "산다는 건 영화와 달라. 인생은 훨씬 더 힘들지" 너는 아직 젊기 때문에 여기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로마로 가서 성공하라고 하면서, 다시는 잔카르도에 돌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2018년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는 사이버 세계를 창조한 홀리데이가 주인공 퍼시발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자신이 사이버 세계를 만든 이유는 소통하는 법을 모르고 현실에 적응하기 어려워서였지만, 나중에 "현실은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인 동시에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임을 깨달았다" 라고.
영화 혹은 사이버 세계, 그리고 인생 혹은 현실이라는 두 대조적인 세계가 시대와 화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더군요. 전쟁 직후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온 사람과 물질적으로는 풍부하지만 오히려 인간적인 면이 사라진 현대인이 느끼는 감정과 어려움이 전혀 다르다고나 할까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네 줄 수 있을까요?
그 유명한 엔리오 모르코네의 영화음악
시네마 천국 하면 엔리오 모리코네의 그 유명한 주제곡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영화 내내 간간이 들리는 이 멜로디는 영화의 처음에는 투박한 바이올린 연주로 들리다가 후반부에서는 관악기와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사운드로 연주됩니다.
시네마 천국의 영화음악은 많은 연주자들이 연주를 했지만 그중에서도 Pat Metheny와 Charlie Haden이 <Beyond The Missouri Sky (1996)>라는 앨범에서 협연한 것이 가장 유명할 겁니다.
찰리 헤이든과 팻 매스니는 서정성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석양이 지는 미주리 지평선과 너무 잘 어울리는 연주들 들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