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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an 26. 2021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템즈강 다리에 섰을까?

Talk to us, we'll listen


런던 템즈강 Lambeth Bridge에 부착된 자살예방 전화번호와 다리에서 바라본 템즈강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템즈강 다리의 난간에 서봤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문구를 읽고 전화를 걸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마음을 돌릴 수 있었을까. 전화 상담원들은 열정을 쏟아부으며 꺼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불꽃들을 지켜냈을 것이다. 사력을 다해서 말이다. "당신이 지금 이 순간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백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들과 당신은 결코 혼자일 필요가 없다는 이유들을 설명하며 다독이느라 열변을 토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 지나면 좋은 날들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오늘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내일 새로운 하루가 당신을 맞이 할 것이다." 

 나는 BTS의 노래 중 Life goes on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노래 가사 중 내 마음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끝이 보이지 않아 / 출구가 있긴 할까 / 발이 떼이질 않아 / 잠시 두 눈을 감아 / 여기 내 손을 잡아 / 저 미래로 달아나자 (..) 하루가 돌아오겠지 / 아무 일도 없단 듯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상담원들의 사소한 위로의 말들이 귀에 들어올 리 없겠지만 그 사소함의 위력을 나는 믿는다. 내 경험상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했을 때는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치명적인 고립감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넓고 광활한 우주에 나를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고립감만큼 무서운 감정도 또 없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주변에 많은 지인들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속내를 털어놓으며 술 한잔 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과연 몇이나 될까. 이는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연예인 등 유명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악성 댓글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또는 직장에서 지인이 내뱉은 무심한 한 마디에 세상이 무너질 때가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바로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자존감이라는 것이 수많은 책들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그리 쉽게 곁을 내주진 않는다. 자존감도 나름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자존감이 무너져 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내게 자존감이 있었는지도 의문이긴 하다. 자존심이 센 것과 자존감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심한 정도가 아닌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울증 약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기나긴 터널의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매일 이어졌다. 죽기 위해 온갖 머리를 짜내던 시절이었다. 모든 문제들은 나 하나 사라지면 해결될 것처럼 나를 유혹했다.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저녁에 눈감기 전까지였으면 그래도 살만했다. 불면의 밤들은 이어졌고 잠깐 눈을 부칠라치면 어김없이 악몽을 꾸곤 했다.



 4년 전 봄이었다. 런던에는 어김없이 봄의 전령 Depodol(수선화)을 시작으로 여러 빛깔의 목련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봄이 내 생의 마지막 봄이 되리라는 예감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우울증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화려한 런던의 봄만큼이나 겉으로의 나는 멀쩡함을 항상 유지해야만 했다. 직원들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우울증을 앓는 것 못지않게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을 숨기는 일이 더욱 어려웠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삶에 희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매일 달콤한 꿈에 젖어있었다. 살아야 한다는 절망보다는 죽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매일 그려보는 죽음의 방법들은 섬찟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당시 몇 가지 방법을 놓고 장고에 들어갔다. 희한한 일은 죽음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면서 우울증이 다소 진정되는 기미를 보였다는 점이다. 그것도 희망이랍시고 말이다. 희망이 전혀 없는 것과 일말이라도 있는 것의 차이는 극명했다. 단 죽음을 부정이 아닌, 그렇다고 긍정도 아닌 받아들이는 인정의 차원에서 바라봤을 때의 차이긴 했지만.


 그중에서 내가 가장 선호했던 방법은 고속도로에서의 사고를 가장한 죽음과 템즈강에서 실족을 위장한 투신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일요일 새벽에 런던 브라이튼 간 M23 고속도로를 질주하기도 했고, 독일 아우토반을 질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핸들을 꺾진 못했다. 죽을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때마다 하나밖에 없는 어린 나의 아이가 아른거려서였다. 템즈강의 다리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버지니아 울프가 우즈 강에 투신하기 전에 했던 행동 즉,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신발을 벗고 다리 난간에 서서 속절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곤 했었다. 하지만 그때도 나의 하나밖에 없는 아이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야만 했다. 결코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죽을 용기보다 더 큰 용기는 살아갈 용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며칠 전, 런던 시내의 웨스트민스터 의사당 끝자락에 위치한 Lambeth Bridge를 가본 적이 있다. 몇 년 전 하마터면 내가 뛰어내릴 뻔했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때 저 문구를 읽고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던가. 결국 전화는 못했지만 극단의 선택 또한 하지 못했다. 이유는 생각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극단의 선택은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충동에 이끌려서인 경우가 많다. 우리의 감정들은 강물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대신 바다처럼 종잡을 수 없다.


 물론 버다에도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그 해류라는 것은 지구 전체의 거시적인 시각으로 보아야만 감지되는 것이다. 사실 그 해류 때문에 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이 한반도로 달려들고 대서양의 습한 공기들이 영국으로 몰려와 매일 비가 내리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해류처럼 우리 삶도 좀 더 큰 안목으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울한 감정도 죽고 싶은 생각도 지극히 당연한 삶의 일부일 뿐이 아니던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BTS 멤버들이 지난해 미국의 그래미 시상식에서 했던 고백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들 또한 팬데믹으로 공연히 취소되면서 심한 우울감 속에서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죽고 싶다는 말도 있었던 것 같다.


 며칠 전 그 회환의 Lambeth Bridge 위에서 오랜 시간 서 있었다. 숨죽이며 흐르는 템즈의 강물을 바라보면서. 맞은 편의 텅 빈 Westminster Bridge와 멈춰버린 런던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한 때는 엄청난 관광객의 인파로 몸살을 앓던 곳들이었는데 지금은 정적만이 감돈다. 이 정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런던 시내 레스토랑과 Shop들이 문을 닫고 있는지 모른다. 벌써 1년 가까이 그러고 있는 그 많은 가게들의 오너들은 얼마나 힘이 들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오너들이 과연 있을까 싶은 정도로 심각하다. 하지만 그들도 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도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희망을 부여잡고 삶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Lambeth Bridge! 생의 마지막이 될 전화상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다리 아래로 뛰어내렸을. 위로가 위로가 되지 못하는 말들은 허공에서 흩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뛰어내리는 육신의 육중함과 달리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찰나의 외로움과 영원의 회환을 안고 템즈강락으로 추락하고 말았을까. 죽은 자에게는 밤이 찾아오지 못하지만 살아있는 자에겐  밤이 찾아오고 다음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렇게 죽음은 삶의 단조로운 일상에 묻혀 침잠되거나 휘발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일 뿐이라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의 유서처럼.


 삶과 죽음이 하나라면 누군가는 왜 굳이 죽으려 하고 누군가는 살려고 하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한 번뿐인 인생은 결코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부의 심각한 불평등은 기본적인 삶의 질은 물론 온갖 질병으로부터 치료받을 기회마저도 심각하게 차별하고 있다. 그렇다고 부자들이 훨씬 더 행복하다거나 암 등 치명적인 질병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도 코너에 몰리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를 종종 뉴스를 통해 접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재벌가의 자녀들도 극단적인 선택에서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죽음에도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을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을 진정한 용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지 충동적인 선택인 것일까. 그 선택이 무모한 광기에 불과한 것일까. 또한 매일 삶을 이어가야 하는 속절없는 일에는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삶과 죽음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는 없을까. 물론 없다. 죽고 싶을 때 잠시 죽었다가 좀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삶을 이어갈 순 없는 일이다. 무슨 예수님도 아니구. 하지만 지구 상은 물론이고 바로 우리 주변에도 경제문제나 질병 문제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내가 한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생각이 많아진다.

 세계가 직면한 빈곤 문제는 차처 하고라도 우리의 삶은 문제 투성이들로 가득하다. 특히, 육신이 아파서 생을 예정보다 조금 더 조기에 마감해야만 하는 사람들(안락사를 택하거나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들)이 있듯이, 마음이 죽을 듯이 아파서도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흔하디 흔한 일이 되었다. 그 흔하디 흔한 일이 예외가 없다는 듯이 내게도 찾아왔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독한 고통이었지만 이제는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자체가 엄청난 행복이자 최고의 축복이 되어가고 있다. 요즘은 딱히 나아진 것도 없는데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즐겁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글을 쓰는 것이리라. 죽지 않길 정말 잘했다.



 인간은 물론이고 우주의 생명체란 생명체들은 반드시 죽거나 소멸한다. 아니 소멸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라는 행성 자체도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다. 사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우리 신체가 100년을 넘기기에는 역부족이다. 설사 100년을 넘긴다 한들 그 삶이 과연 축복일까. 겨우 100년의 절반을 살고 깨달은 사실은 100년 된 노후 장기와 신체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를 결코 축복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차피 언젠가는 한 번 죽는다는 것뿐이다. 죽음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닌 이유다.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중요한 점은 살아있는 동안 비록 행복하진 못해도 덜 상처 받고 덜 아파하는 것만이, 그래서 언젠가는 기필코 다가올 죽음과 조우했을 때, 나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만이 나라는 인격체와 유기체의 소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한 문제다. 아차피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일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력의 유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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