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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Nov 09. 2020

어쩐지의 이유

“너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인다?”

“그러게 어쩐지 오늘따라 기분이 좋네.”

“흠... 이상한데? 너 지금 누구랑 카톡하고있어!”

“있어. 너 모르는 사람.”

“그 사람 때문이구만?”

“아냐 그런거.”

“맞네 뭘. 어쩐지.”

“야 그런데, 어쩐지라는 말 어쩐지 이상한거 같지 않아?”

“뭐가 이상해. 어쩐지가 어쩐지지.’

“아니, 이유를 알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어쩐지라고 말하잖아. 가령, 어쩐지 기분이 좋다- 라는 식으로 말야.”

“그치?”

“근데, 네가 나 핸드폰 만지면서 웃는거 보고, ‘어쩐지’ 라고 또 다 알겠다는 듯이 말했잖아.”

“맞아? 그거 때문에 기분 좋은거 말야.”

“아니라고. 아무튼, 그제야 이유를 알겠다고 말할 때에도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말하는거 보면, 이유를 알아도 어쩐지라 말하고, 이유를 몰라도 어쩐지라 말하는 거 같다는 말이지.”

“그럴 때에는 국어사전을 찾아보는거야.”

“그래 찾아봐바 나도 궁금하다 야.”

“음... 꽤 싱거운데? ‘어찌된 까닭인지’의 준말이라는 거 같어.”

“아 그렇겠구나. 어찌된 까닭인지 모르지만 기분이 좋다는 거. 그리고 어찌된 까닭인지 이제는 알겠다는 거. 다 어쩐지라는 말로 그래서 사용할 수 있는거네. 어쩐지.”

“그런데, 그러면 모든 기분은 다 까닭이 있는걸까?”

“글쎄. 아마도 기분에 이유를 생각하고 싶지 않을때, 영문을 모를 때에 어쩐지라는 말을 쓰는거 아닐까?”

“그래도 그 이유는 있을 수 있잖아.”

“모든 것에 꼭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닐 수 있지. 그런 생각이 오해를 낳는거야. 그냥 내가 핸드폰좀 보고 실실 쪼개고 있었다는 걸로, 니가 억지로 이유를 찾아내려 애쓰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도 그냥 무턱대고 실실쪼개는게 미치지 않고서는 가능하긴 해?”

“글쎄. 어쩌면 설명할만한 이유가 전혀 아닐 수도 있잖아. 그냥 호르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컨디션의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너도 모르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인지하지 못했지만 영향을 미치는 것들 말야.”

“날씨 같은거?”

“그래. 날씨나 계절이나, 공기나 뭐 그런거 같은거 말야.”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저 하늘좀 봐 너무 맑잖아.”

“그럼 너 기분 좋은거 날씨 때문인거야?”

“모르지. 나는 모르는 이유도 있을 수 있다며. 그러면 네가 맞춰야지.”

“어쩐지, 내가 놀아나는 기분 같은데.”

“먼저 물어본 건 너거든?”

“그래 뭐 까닭이야 어쨌든 기분 좋으면 잘 됐지 뭐.”

“기분이라는 건 원래 까닭이 있더라도 까닭 없이 주어지는거야.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지기 싫다고 해서 털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내생각엔 말야, 어쩐지라는 말은, 이미 그 기분안에 있을 때, 그러나 우선 그 까닭들에 별로 주목하고 싶지 않을 때 하는 말인 걸거야. 이유를 찾는 이유는 아마도 그 기분이 더러울 때, 그걸 어떻게라도 해결하고 싶어서 찾아다니는 거고. 근데, 기분 좋은 날에는 그냥 ‘어쩐지 기분이 좋다’라면서 넘겨 버리는 거지. 그 날은 그냥 땡잡은 날이니까. 하늘을 보면서 걷다가, 내 기분을 즐기면 되는거야. 이유야 아무래도 좋은거 아니겠어?”

“근데, 그래도 그 이유를 알아야, 그 이유가 사라질 때를 대비하거나, 아니면 방심하다 놓치지 않을 수도 있는거잖아. 잃어도 되찾을 수 있고.”

“글쎄. 만약에 내 기분이, 내 오늘 행복한 기분이 말야, 그저 날씨 때문에 그런 거라면, 날씨 같은거야 어차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걸. 오히려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이미 좋은 때는 다 가버린 걸거야.”

“그래? 아무튼 너는 어쩐지 기분은 좋다 이거지?”

“그럼.”

“좋아. 그러면 이제 기분 좋게 맛있는거나 먹으러가자.”

“좋네.”

“뭐가?”

“어쩐지 말야. 어쩐지. 그냥 좋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어물쩡 나는 내 기분의 이유를 넘겨버리고, 그러나 어쩐지 내 기분의 이유를 알것만 같다. 어쩐지 웃게 되는 내 기분이라는 것은 날씨 때문일 수도 있고, 호르몬 때문일 수도 있고, 나와 연락을 주고 받는 사람과의 연락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라는 말로 모든 것들을 그저 어물쩡 넘겨 버릴 수도 있었지만. 나는 천천히 내 기분의 이유를 알아채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이 기분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지도 알아채고 있다. 그러나 어쩐지 오늘은 그저 그 이유는 상관 없이, 오늘 우리의 일과를 그리 즐기고 싶어서. 나는 어쩐지 입을 다물고, 그러나 계속해서 어쩐지의 이유를 알아채고 있다.

함께 걷는 길. 내 마음의 이유. 그리고 또 그저 좋다며 어물쩡 넘겨 버리는 이유. 어쩐지의 이유.

그러나 어쩐지 좋은 내 기분이 그냥 오늘은 땡잡은거 같아서. 그리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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