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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Nov 25. 2020

기회와 경고

길을 걷다 누군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고 했다. -저기요 이거요- 그러며 낯선 이가 건넨 것은 그의 가방에 매달려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의 케이스였다. 그는 문득 섬뜩하다고 생각했다. 제 가방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 맥 없이 떨어졌다는 사실이, 그리고 낯선 이가 그것을 곧바로 제 뒤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낯선 이가 그것을 주워가지 않고 내게 전해주었다는 모든 사실들이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그는 이 일련의 우연들을 행운이라 생각하며 감사하는 대신에, 되레 섬뜩하다 느꼈던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정말로 낯선 이와 저 사이에 있었던 우연에 지나지 않았던 사건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것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가 떨어트린 것이 그가 자리를 뜬 뒤에 그 자리에 한참 있었더라면, 그래서 누군가 그것을 주워가거나, 누군가 그것을 밟아 망가트렸다면, 그는 그것을 영영 발견할 수 없게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행히도 낯선 이의 선한 의지와 함께, 그리고 모든 인접한 사건들의 맥락에 의해서 아주 우연 같은 행운을 그는 마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뜻 없는 우연이라는 사실이 그를 단지 섬뜩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우연을 그저 우연으로 여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뜻 없는 우연은 정말로 하릴없는 우연이라서, 그것은 그저 받아들여야 할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계의 낯선 현상에 조우하는 인간은 그 누구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설령 그 의미가 아직 해석되지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하나의 기분과 감정으로 드러나고, 그러한 감정과 기분은 분명히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다.


낯선 세계가 아무런 뜻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까지도 그렇다. 그 낯선 세계가 아무런 뜻도 맥락도 없고, 또 이 세계는 지나치게 넓고 자신은 지나치게 초라한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이 그를 불안하고 섬뜩하게 만들어 버렸지 않은가? 그때 그의 기분은 도대체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신은 현전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느냐 하는 절규와도 같은 맥락이다. 왜 이 세계는 무의미한가? 그 절망은 신의 존재의 유무에 따른 상이한 믿음 체계를 가진 인간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기분으로 드러난다. 누군가는 존재하는 신이 어째서 도래하지 않는지에 절망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도대체 왜 신이 존재조차 하지 않고 무의미한 것인지에 대해서 원망한다. 그 원망의 대상이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도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 장황한 논설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저 한 번 떨어트려버린 그 이어폰 케이스에 대한 그의 의미 해석에 대한 것이다. 그는 그것이 기회이거나 동시에 경고라고 받아들였다. 그래, 이러한 일련의 우연은 하나의 기분 좋은 행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것은 세상이 내게 준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섬뜩함을 느낀 이유는, 그러한 우연이 기회일지라도, 그러한 기회가 자신에게 한번 더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때 세상은 이중의 의미를 제 안에 감추고 있다. 하나는 세계가 아무런 뜻도 없이 존재한다는 것. 그때 세상은 냉랭한 것으로 남아 있어 그를 외롭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그 냉랭한 세계가, 그의 무지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 기회는 분명히 무언가를 베풀어준 의지적인 세계로서 드러난다. 세계의 무의지와 동시에 기회를 내어준 의지라는 그것들이 문득 두렵다. 그다음의 기회가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기회라는 것이다. 기회가 늘 있는 것이었더라면 그것은 기회도 무엇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회는 그런 점에서 동시에 냉정하다. 그것이 기회인 이상 그것은 언제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번 기회를 놓치거나 이번 기회에 실패하게 된다면 다시는 그 기회를 만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 세계는 상이한 두 가지 의미로서 다시 드러난다. 기회는 세계가 내게 베푼 자선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상실하면 되찾을 수 없는 냉정함이다. 그때 그 냉정함은 '경고'로서 드러난다.


기회로서 드러난 세계는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앞으로는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보낸다. 그것이 사랑으로서의 세계와 동시에 보복으로서의 세계이다. 그것이 신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는 두 가지 얼굴인지도 모른다. 냉랭한 세계는 그러나 동시에 기회를 주는 사랑으로서의 세계이고, 그러나 그 기회를 상실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모른다는 다시 또 냉랭한 경고로서의 세계인 것이다.


그는 기회를 마주함과 동시에 경고를 받았다고 느낀다. 감사와 경외가 동시에 존재하고, 감사는 받은 것에 대한 것이며, 경외는 통제할 수 없는 두려움에 대한 것이다.


존재하는 신은 어째서 우리에게 현전하지 않는가. 존재하지 않는 신은 어찌도 지독하게 부재한다는 말인가. 세계에서는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탄식이 동시에 퍼져나고, 그러나 이미 세계는 기회와 경고로서 드러난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감사하고 또 불안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희망하고, 또 주어진 기회를 거머쥐기를 바란다.


그리 말하며, 그의 가방에 다시 한 번 더 그가 잃을뻔한 것을 붙들어 맨다. 기회가 있었고 또 경고가 있었다. 기적같이 주어지던 순간들. 그리고 다시 또 그것을 잃어버린 순간들. 그 안에 마치 세상은 형벌처럼 으스스하게 다가왔고, 그의 삶은 책임이 되어 그를 옭아맨다. 감사한 세계, 두려운 세계. 그는 문득 그 사소한 순간에서 그를 느꼈고, 그러나 다시 또 살아가기 위해서 이어폰을 그의 귀에 꽂았다. 기회를 받아들이고 경고에 마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이렇기 때문에, 아직 세상은 살아볼 만한 것이라 느낀다.


감사하고 또 두려움에 떨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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