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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Jan 06. 2021

코로나 시대, 우리 비대면의 근원적 의미

우리는 각종 매체를 사용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원거리에서도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연인들은 이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상통화를 함으로써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가능성은 그저 편리한 대안인 것처럼 보였다가, 코로나 시대에 이르러 이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되었다. 그 방식이 아니고서는 도통 소통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에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곳, 누군가의 내면에서는 어떠한 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마치 우리는 이제 살결을 맞대지 않아도, 평생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사실이 낯설고, 평생 이렇게 살게 될 것이 두렵다. 그 두려움은 단지 이 상황에만 맞물려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기가 지나고 나서도, 우리의 대안들에 너무나 많이 익숙해져서는, 언제까지나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마주하지 않는 소통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 인류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활자의 발명을 통해서, 우리는 이천오백년 전의 철학자가 서술한 것들을 그와 마주하지 않고도 전해 읽는다. 활자의 발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서신으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우리가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반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대면하여야만 한다는 뿌리 깊은 욕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죽어가는 이들은 어째서 유서를 남겼는가? 그것은 자신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 사실은 그가 더는 남은 자들을 마주할 수 없다는 물리적 거리를 전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물리적 거리를 그가 초월하여 여전히 그들과 대면하고 싶다는 욕구를 더 강렬하게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를 만나고 싶다. 그러나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신을 통해서 왕래하고,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편지를 남은 자들을 향해 전한다. 글이라는 것은 만날 수 없는 것들에 관여하지만, 동시에 만나고 싶은 것들에 관여한다.


우리는 활자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었는데, 어째서 전화를 걸고, 또 영상을 통해서 만나고자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만나지 않아도 되는 상황들을 가속화하지만, 동시에 만나고자 했기 때문에야 가속화되는 것이다. 너의 글만으로는 부족하다. 너의 목소리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마침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들과도 우리는 영상을 통해서 왕래한다. 그 사실은 우리가 만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연장하지만, 그렇게까지 연장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우리가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만날 수 없다. 그러나 만나야만 한다.'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대안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어떤 것을 갈구하려는 욕망 위에서 기초한다. 우리의 이 단칸방 안에서 누군가를 그리는 이유, 가끔은 떠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생각하며 밤 길을 걷는 이유. 그 모든 것들은 단절을 전제하지만, 그 단절을 초월하고자 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요구 위에서만 이해 가능한 단절인 것이다.


글을 따라 추적하는 사람의 숨결 안에서, 우리는 왜 그 글을 넘어선 어떤 한 사람을 그려내기를 원하였는가. 그 이유는 종종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다시 만나 툭 하고 건드려보고 싶기 때문에.


비대면의 근원적인 의미는 대면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원하고, 또 늘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떨어져서도 한차례 세월을 보내고, 그 거리를 달래기 위해서 기술이 발전한다. 그런 뒤에도 분명히 상실되는 것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남의 요구라는 그 근원적인 의미를 상실하는 일은 없을 게다.


단지,


우리 다시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 날이 있다면, 그것은 기술의 발달 때문이 아니라, 어느날 문득 마음이 조용히 사라져 버린 것 뿐이다. 그때에는 그 어떤 만남의 대안들이 존재한다 하여도, 그 어떤 대단한 기술들이 존재한다 하여도, 그들은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음도 있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근원적인 불안은, 우리가 영원히 대안을 통해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 나를 더는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그런 불안. 그때에는 대면도 비대면도, 그 어떤 대안도 필요하지 않으리라는 쓸쓸함. 그것이 이 비대면 시대의 불안 보다 근원적인 불안인지도 모른다.


그 전까지는, 언젠가 다시 만나자. 그리 말한다.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에 그리 만나자. 날 좋은 날에 함게 길을 거닐자. 그리 내 입으로 벙긋거려보는 것이다.


https://youtu.be/tnRHjTPQgX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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