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후배랑 술 한잔. 그는 고맙게도 우리 집까지 맥주를 사 들고 와서 감사를 표했다. 그가 쓴 각본이 곧 연극이라는 모양새를 갖춰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다. 나는 그가 쓴 각본을 보고 글을 써 주었다. 그게 고마웠다고 말한다. 나는 그리 고마워할 것이 아니라고 겸손을 떨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모를 것이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아마도 누가 나를 위해 그러한 글을 그리 적고 해석해준 일이 없었을 것이겠기에 말이다. 그래서 그 고마움이라는게 뭔지 모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말에 잔잔한 물결이 내 마음에 일었다. 그 누구도 나를 알고자 한 적이 없었다거나,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해주며 또한 해석해주고자 하는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간절히 바라던 그 한 사람이 나를 알아주던 순간의 기쁨과 감동 같은 것들을 감히 모른다고 말하며 지난 과거를 배반할 마음 같은 것은 없다. 다만, 강박적으로 내 주변을 에워싼 수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분석하며, 강박적으로 적어내고자 하는 태도 이면에 존재하는 것들을 깨닫는다.
종종, 이해받을 기회와 자격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를 이해받고 싶지 않다. 내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 먼저 나를 이해하는 것이 싫다. 그것은 사적인 공간을 침해하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 아니라, 내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일 것이다. 그 안에는 어떤 근원적인 겁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겁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 겁은 태어난 순간부터 나와 늘 함께 했으며, 내가 그 겁을 경유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강해져야만 하는지에 관한 지침과 이정표가 되었던 것이기도 하며,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중요한 방식 중에 하나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겁을 고백하고 싶지 않았던 첫번째 이유는, 그것이 나의 약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나는 이미 공포에 휩싸여 있고, 이제 얼른 그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안락한 가정이라는 공간과 어머니의 품속 안으로의 도피이면 족했다가, 어느 순간 부터는 스스로 강해짐으로써만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첫번째 이유와 그에 관한 처방으로부터 겁을 고백하기 어려운 두번째 이유가 있다. 나는 성장하고 강해져야만 한다고 믿었다. 주변에서 찾아오는 요구들에 부응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러는 새 성장해버렸고, 과거의 겁은 사라진다. 그때에는 그러한 겁을 고백할 필요가 더는 없어진다. 이제 와 그것은 기껏해야 별 것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과거의 겁을 지금의 새로운 겁이 대체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새로운 약점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숨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겁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겁 고백의 어려움에 관한 세번째 이유는, 이러한 이중성에 의해서 발생한다. 겁으로부터의 도피와 극복과 같은 것들에 의해서, 나는 나의 겁이 고백할만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판가름할 수가 없다.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나는 이제 와 그것을 넘어선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할 뿐이다. 그래서 마치 그 과거의 겁을 대단한 것처럼 부풀려 이야기할 수록, 나의 모험담은 마치 극적인 것처럼 포장되어 버릴 것이다. 그때에 내가 하는 것은 겁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내 무용담을 부풀려 이야기하는 허풍선이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때에 하는 겁 고백은 하나도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번째 어려움으로부터 겁 고백이 어려운 네번째 이유도 드러난다. 나는 그렇게 부풀려질 수 없는 겁을 타인의 겁과 비교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도 힘겨운 불안으로 남아 있던 유년시절의 겁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없었고, 그렇기에 그것을 잘난 듯이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더불어 현재 내 곁에 있는 사람의 겁과 두려움을 본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서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나의 겁을 그의 겁과 동일한 것이라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그저 이타적인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안에는 타인의 겁을 바라보며 나도 함께 겁을 집어 먹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나의 겁과 상대의 겁을 비교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한들, 자연스레 타인의 겁이 슬금슬금 그의 심연에서 기어올라와 나를 함께 잡아 먹어 버릴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 다시 또 나의 겁은, 동시에 나의 약점이 되고, 나는 내 약점을 숨기며 그저 타인의 겁을 위로하고 이해하려 애를 쓰는 것이다.
그 안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내게 있어 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언제나 오랜 친구와 같았다. 사람들에게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던, 그러나 언제나 내 곁에 있던 그런 비밀 친구와 같았다. 나는 그를 보면서 언제나 그를 넘어서고 싶었고, 그가 있었기에 타인의 겁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때에 나는 마치 오래 산 애늙은이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으나,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곁에 그 겁이 있었듯이, 그 이야기를 듣는 내 곁에도 그 겁이 늘 나를 겁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내가 내 스스로를 지독한 겁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평가 절하한다거나 겸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내가 겁쟁이도 무엇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저 운이 좋아 좋은 친구들과 여건들 속에서 그 겁에 잠식되지 않고 여차저차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남았다면 나는 약한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더 힘들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는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 안에 여전히 겁이 있고 그 겁이 있기에 겁에 질린 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 내게 겁이 없었다면, 유년시절부터 지독하게 나를 괴롭히는 겁이 없었다면, 나는 겁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겁에 지나치게 솔직해서, 강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겁에 지나치게 솔직한 사람들은, 그 겁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순수하게 강해질 수 있다. 그들은 겁을 토로하고, 그 겁을 공유하며, 겁에 위로받는다. 그리하여 그 겁을 현실적으로 대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겁에 지나치게 솔직한 사람들은 마침내 겁 없이도 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겁에 솔직할 수도 없었고, 겁을 고백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겁 없이 강해질 수는 없었다. 겁이 늘 있었기에 다시 또 무언가로 만들어져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러는 새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던 그 겁은, 계속해서 살아남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것이 징그럽고, 그래서 나는 그 겁을 더더욱 묘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겁에 대해서 대신해 서술해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나의 글은 다만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뻗어나, 또 다시 그 겁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 멋대로 서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