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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Dec 10. 2020

여자의 계절

 지하철역 출구까지 이르는 계단을 끝까지 올라섰을 때 뜨겁게 달궈진 도로에서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유독 더위가 일찍 시작된 초여름의 오후 두 시였다. 몸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성급하게 찾아온 더위에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고 마스크를 쓴 얼굴에서는 열기가 올랐다. 계단에서 횡단보도로 내려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주위를 둘러보니 땅바닥에 퍼더앉은 여자가 손짓을 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고무줄로 묶은 반백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흘러내렸고 두툼한 솜을 넣은 누비점퍼와 몇 겹으로 치마를 걸친 맨발의 여자였다. 


 사실 여자가 정확히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아니었다. 내 쪽을 향해서 말을 하는 것 같았으며 오라는 듯 손짓해서 착각한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여자가 도움을 청하는 줄 알고 서너 발자국 다가갔다가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여자의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고 여자의 입은 내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초점이 흐린 눈과 특정 대상이 없는 말은 우연히 내가 우연히 서있었던 허공을 향해있었다. 주어와 조사와 마침표가 생략된 말들이 욕설의 형태로 허공에서 부서질 때 나는 다시 서너 발자국을 되돌아왔다.      

 신호등이 바뀌자 여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밀치고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걸음이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확고하게 한 방향으로만 걸었다. 사람들에 가려 더 이상 여자가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길에서 마주친 낯설고 불편한 이 만남을 언젠가 사람들과의 대화 테이블에 올릴 소재로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다시 여자와 만났다. 여자는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여자는 기어 다니며 길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줍고 있었다. 도로변에 있는 쓰레기통, 시들어가는 화분 속, 깨진 보도블록 사이에서 찾아낸 담배꽁초가 두 손 가득이었다. 길을 건너 빨리 걸었던 목적이 마치 담배꽁초를 찾기 위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의 표정에는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여자는 허공에 대고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이렇게, 이렇게 많아. 이렇게, 이렇게 많아.”

 나는 여자가 담배꽁초로 무엇을 할지 불안하면서도 궁금했다. 이미 누군가 버린 꽁초를 피우려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청소하려는 것일까. 여자는 몇 차례나 허공에 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더니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엎드렸다. 그리고 손을 기울여 하수구에 꽁초를 쏟아 부었다. 손바닥이 텅 빌 때까지 천천히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낮은 곳으로 흘려보낸 뒤 하수구에 오래도록 눈을 갖다 대고 있었다. 엎드린 여자의 발바닥은 상처투성이였고 색색으로 겹겹이 걸친 치마는 무거워보였다. 길을 건너기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여자 옆에는 커다란 종이가방 두 개가 놓여있었다. 너무 가득 채워져서 찢어지기 직전인 종이가방 위로 이불과 옷가지가 보였다. 그것들은 여자가 가지고 있는 전부처럼 보였다.      

 햇빛은 생명의 유무에 따라 다른 빛을 부여한다. 생명이 깃든 것들에 햇빛이 쏟아지면 푸르게 성장하거나 홍조를 띠며 잘 익거나 잘 구운 쿠키처럼 그을린다. 생명이 깃들지 않은 것들에 햇빛이 쏟아지면 생성의 변화 없이 본래 지닌 색이 바랄 뿐이다. 여름 오후의 햇빛이 굴러다니는 보도블록에 앉은 여자는 하염없이 바래지고 있었다. 한때는 빛을 발하며 발그레 볼이 익어가고 계절의 순환에서 기쁨을 맛보았을 여자는 빛바랜 모습으로 서있었다. 여름 햇빛이 주는 더위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이 지나치지 못한 시간 속에 갇힌 채 허공을 향한 대화에 집중할 뿐이었다.      

 회색으로 변한 구름이 몰려들며 하늘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해석할 길 없는 여자의 말들이 허공을 채워갔다. 끝내 해석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에 멍해진 순간, 한마디 말이 허공을 갈랐다.

 “됐어. 자자. 자자.”

 여자는 물크러진 자두와 커피와 콜라가 말라붙은 땅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을 잤다. 여기에서 자면 안 된다고 누군가 소리쳐도 깨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이었다.      

 햇빛에 고스란히 노출된 잠 속에서 여자가 길에서 보낸 계절이 보였다. 기온이 31도까지 올라간 여름 오후, 여자를 감싸고 있는 계절은 동백꽃이 피기 직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여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계절을, 흘러가는 시간을 멈춰버린 걸까. 무엇이 여자의 시간을 붙잡고 흘러가지 못하게 하는 걸까. 

 여자의 계절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날이 언제일지 가늠해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집으로 걷는 동안 비닐봉지에 들어있던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렀다. 나는 더 이상 아이스크림이 아닌 찐득한 액체를 닦으며 오늘의 만남을 대화테이블에 가볍게 올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계절이 부디 돌아오기를 바라는 최소한의 개인적 도리였다.      




여름철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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