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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Apr 08. 2020

밤 산책과 하얀 셔츠

일상다소설

 밤에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너무 춥거나 너무 덥지 않을 때 나는 빛나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걷는다. 엇비슷한 모양의 아파트 건물과 놀이터를 지나 물기 없는 연못을 건너 아치형 울타리를 벗어나면 편의점이 나타난다. 24시간 문을 여는 곳은 아니고 밤11시가 되면 닫았다가 아침 7시에 다시 여는 편의점이다. 가끔 나는 이곳에 들러 따뜻한 음료를 사들고 다시 걷는다.

4월이 되면서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달라졌다. 지난 달보다 더 부드럽고 가벼워진 느낌이다.

전염병으로 혼란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봄은 활짝 피어났다. 이제는 내 차례라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하얀 꽃과 나뭇잎이 흔들렸다. 봄을 맘껏 마시고 싶어 마스크를 벗을까 하다가 그냥 쓴 채로 걸었다.


낮과 같은 풍경 속을 걷고 있는데도, 낮과는 다르다.

시선을 분산시켰던 낮의 형체와 색채는 어둠을 뒤집어쓰고 엎드렸다.  낮에 보았던 것들은 어디에 숨어있을까. 내 눈은 익숙한 낮의 풍경을 찾기 위해 사방을 헤집고 다닌다. 하지만 금세 깨닫는다. 어둠에 눌러 납작해진 낮의 풍경은 더이상 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걸. 그순간부터 나는 낮을 그리워하며 밤을 걷는다.


 이곳에 속해있을 때 저곳을 그리워하는 것은 오래된 나의 습관이다.

집안에 있을 때는 집밖을 간절히 원하고, 집밖으로 나오면 '집안'이라는 공간을 그리워한다. 날마다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는 그곳의 익숙한 사소함들이 갑작스레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런 감정은 밤에만 솟아난다. 아마도 집안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더 따뜻한 색으로 빛나기 때문에 그럴 거라고 짐작한다. 그럴 때 나는 습관적인 그리움에 휩싸여 아무곳에서나 멈춰선다. 발걸음을 멈춘 자리에서 올려다본다. 내가 사는 곳과 비슷한 아파트의 작은 불빛들은 따뜻하게 빛났고 얇은 커튼에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며칠 전에도 아무곳에나 멈춰서서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따뜻한 불빛을 기대했는데, 중간층 정도의 베란다에 누군가 서있었다. 어쩐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지만 하얀 셔츠를 입은 그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고 계속 베란다에 서있었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 고개를 돌리고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밤 산책을 했다.

우연히도 걸음이 멈춘 곳은 늘 그 자리였다.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이 서서 나를 내려다보던 곳. 눈짐작으로 층을 세어보니 6층쯤이었다. 멈춰서서 올려다볼 때마다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이 서있었다. 꼼짝하지 않고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계속 한자리에 서있는걸까. 저 사람도 마찬가지로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룻밤이 지난 다음날, 나는 한낮에 그곳을 지나가다가 생각이 나서 그곳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6층 베란다에는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이 아니라....하얀 셔츠 한 장만이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셔츠는 봄바람이 불 때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눈부신 흰빛이었다.

옷걸이에 걸린 하얀 셔츠.  

실체를 알게 되었던 밤, 나는 산책을 나갔을 때 다시 그곳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이 서있다고 착각했던 베란다에는 커다란 이불이 걸려있었다.


 눈은 때때로 실제와 전혀 다른 상을 보여준다. 밤을 걷는 걸 좋아하지만 밤눈이 어두운 나는 늘 그런 것들에 자주 속았다. 벽을 타고 오른 담쟁이덩굴, 버려진 유모차, 바람이 날리는 비닐봉지들은 내 눈에서 벽에 기대선 거인, 느리게 가는 휠체어, 날개가 꺽인 까마귀로 바뀌곤 했다.

마음 속에 오래 쌓아둔 두려움이나 불안이 반영되었을 때 그 상은 더욱 왜곡되어 나타난다. 혼자 걷는 밤, 내 마음 속의 무엇이 하얀 셔츠를 사람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던 걸까.

 봄이 되었지만 여전히 밤은 어둡고 무거워 낮의 풍경을 납작하게 누른다. 밤을 걷고 있는 내 눈은 낮을 찾고 내 몸은 집안을 그리워한다. 늘 없는 이곳에 없는 것만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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