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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Dec 10. 2020

어둠의 저편

 바람이 불어 창문을 닫았다. 소란스럽게 들려오던 자동차 경적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드라마 속 남녀가 다정하게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자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모처럼 나 혼자 먹는 저녁. 라면이나 끓여먹을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간단한 볶음요리를 했다. 당근, 양파, 대파를 다듬고 버섯을 물에 불려두었다가 적당한 길이로 썰고 오징어는 살짝 데쳤다. 여러 재료를 섞어 양념장을 만드는 동안, 드라마 속 등장인물은 주인공 여자와 노부인으로 바뀌었다. 긴장감이 맴도는 걸로 보아 갈등상황이 시작된 것 같았다. 프라이팬에 재료를 넣고 기름에 볶는 동안 갈등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야채 볶는 소리 때문에 대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과장되게 일그러지는 인물들의 표정에서 짐작해볼 수 있었다. 부엌은 볶은 야채 냄새와 간장 냄새로 기분 좋게 채워졌다.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 드라마를 뒤로 하고 볶음요리를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는 순간 갑자기 깜깜해졌다. 어둠이 찾아왔다는 말로는 부족한 깊고 아득한 어둠. 환풍기도 가스불도 드라마도 동시에 ‘훅’ 꺼졌다.      


 빛도 소리도 사라지자 나는 길을 잃은 것처럼 집안에서 헤맸다. 초라도 켜야 하나 싶어 서랍이란 서랍은 모두 열었지만 어디에 뒀는지 양초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더듬더듬 휴대전화를 찾아 불을 밝혔다. 바깥을 향한 유리창에는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문지르자 딱 그만큼의 바깥세상이 보였다. 칠흑같이 어둡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집안의 불이 모두 환하게 켜져 있었기에 더 극적으로 어둡게 느껴지는 것일까. 갑작스레 찾아온 어둠의 깊이와 높이가 실감나지 않아 창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팔을 뻗었다. 어둠의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유독 차가웠다. 그때 딩동댕 소리와 함께 안내방송이 나왔다.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주민여러분께 많은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정상 복구할 예정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해 저녁을 먹으려다가 젓가락을 그대로 내려두었다. 어둠 속에서 혼자 저녁을 먹으려니 어쩐지 괴기스럽기도 하고 처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 꺼진 냉장고를 뒤져 캔맥주 하나를 찾아내 창가에 섰다. 아득하게 펼쳐진 어둠을 보니 막막함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어린 시절에도 이런 막막함으로 보낸 시간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한 달에 한번 등화관제훈련이 있었다. 사이렌이 울리면 동네 모든 집들은 집안의 불을 끄고 다시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 어둠 속에서 그대로 머물러야 했다. 내 기억 속에서 등화관제훈련은 대부분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할 때 시작되었다. 우리집을 비롯해 동네의 많은 집들은 두꺼운 커튼을 치거나 담요로 창을 가려 불빛을 막고 텔레비전을 켰다. 하지만 동네를 샅샅이 살피는 아저씨들은 새어나오는 불빛을 감쪽같이 알아차렸고 대문을 쾅쾅 치며 소리쳤다. “불 끄라니까요! 지금 당장!” 깜깜한 골목은 불빛을 단속하는 아저씨들의 고함소리와 호각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적기의 야간공습에 대비하기 위해서 하는 훈련이라고 누군가 말해줬지만 당시 나는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어둠 속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에 대한 정체모를 두려움과 놓쳐버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아쉬움, 사이렌이 다시 울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지루함이 뒤섞여 막막해질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등화관제훈련은 어느 순간부터 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의해 불을 끄는 상황은 더 이상 없었다.      


  캔맥주가 거의 비어갈 즈음, 사라졌던 빛과 소리가 되살아났다. 어둠이 시작될 때처럼 갑작스럽게, 하지만 반갑게. 그 사이 텔레비전 드라마는 ‘다음 이 시간에 계속’을 기약하며 끝나있었고 식탁 위 볶음요리는 식어 있었다. 어린 시절, 강제된 어둠 속에서 세상은 달라보였다.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 보였고 내 팔다리도 내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어둠의 시간이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갑작스러운 어둠은 변함없이 낯설고 두렵다. 다시 불빛으로 환해진 바깥을 보면서 잠시 눈을 감고 조금 전까지 아득하게 펼쳐졌던 어둠을 떠올려본다. 어둠의 저편에서 불어오던 바람의 무게를 가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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