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내려 차들이 도로에서 꼼짝 못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받고 커튼을 젖혀 창밖을 봤더니 온 세상이 새하얗다. 버스정류장으로 올라가는 비탈로 썰매를 끌고 올라간 아이들은 창백하게 얼어붙은 달빛 아래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눈이 내리면 제일 먼저 달려 나가 눈사람을 만들었던 시절
해가 비추면 눈사람이 녹아 사라질까 봐 담벼락 아래 그늘에 세워두었는데
기온이 오르는 한낮이 되면 그늘에서도 눈사람은 녹아내려
눈이었던 까만 바둑돌이 코였던 나뭇가지가 입이었던 나뭇잎이 툭툭 스르륵 떨어지고
몸체의 가장자리부터 버석거리다 부서지면
내가 만든 겨울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 손을 갖다 대지도 못하고 곁을 지키다가
문득 겨울철에는 물이 얼어붙는다는 사실이 떠올라
바가지로 퍼온 물을 성수처럼 눈사람에 천천히 부었다.
겨울에도 따뜻한 해가 떠오르면 물이 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미처 몰랐던 탓에
물을 뒤집어쓴 눈사람은 더 빨리 녹으며
흰 빛을 잃어버리고
물과 얼음과 눈 사이의 어딘가에 놓아야 할지 모르는 어정쩡한 존재가 되었다.
붙잡으려고 했던 행동은 눈사람의 흰빛을 빼앗아갔던
내가 기억하는 겨울의 형상을 훼손시켰던 그 겨울
아는 것이 적어 늘 불안하다고 생각했지만
불안은 아는 것이 조금 더 많아진 뒤에도 오히려 더 늘어났는데
그때에는 그런 것들을 몰랐으므로
겨울이 되면
나는 단지 아무도 밟지 않은 눈으로 하얗고 단단한 겨울을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잠이 일찍 깨어버린 새벽에 일어나 아무도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고 눈 쌓인 마당으로 나가면 밤새 고요히 쌓인 흰빛이 눈부셨다. 아무것도 닿지 않아 보드랍고 깨끗한 눈을 한입 삼키고 눈 세수를 하고 눈사람을 만드면서 흰빛 사이를 걸어다니자 사각사각 보드득 소리가 났다.
햇빛을 받아들이기 전의 눈은 너무 보드라워 손에서 자주 부서졌기에 형태를 만들기 어려웠고
겨울이 오면 어떤 식으로든 형태를 남겨서 붙잡으려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겨울이 와도 형태를 남기지 않는 지금의 나는
보드라운 눈을 만지지 않아 흰빛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내다본 창밖에서 오랜만에 눈의 흰빛에 현기증이 났다.
아무도 밟지 않은 보드라운 눈을 만져 작은 겨울의 형태라도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오랜만이라서
오랜만에 장갑을 끼고 눈을 향해 뛰어나가 포슬포슬한 눈을 동그랗게 빚어 꾹꾹 누르고 공처럼 굴려 점점 더 크게 만들었다.
아직 내가 만들고 싶은 겨울의 형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함박눈이 내린 오늘, 나는 작고 마른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 가로등 아래 세워두었다.
밤새 얼어붙은 추위 속에서 눈사람은 힘을 얻고 더 단단해질 것이다. 내일이 되면 장난꾸러기들의 발차기에 부서지거나 한낮의 햇빛이 녹아내릴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