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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Jan 28. 2021

겨울을 걷는 동안

최진영의 소설- [겨울방학]

 겨울을 오래 걷다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가로등과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달이 노랗게 부풀었다. 따뜻하겠지. 추위에 곱은 손을 길게 뻗자 달은 멀어졌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시 겨울을 향해 걸었다. 따뜻한 것을 품고 싶어서 스스로 따뜻해질 때까지 계속 걸었다. 달이 멀어져도 괜찮을 때까지 그렇게.



 최진영의 소설집 『겨울방학』 에는 겨울을 걷는 사람들이 여럿 나온다. 그들은 대체로 가진 것이 적다. 그만큼 지켜야 할 것이 적지만 지켜야만 하는 것은 꼭 지키고 싶다. 자신의 삶에서 지켜야할 것을 지키지 못하면 삶이 어떤 결과로 남을지 알고 있는 사람들. 자기 혼자만의 삶을 지켜내는 것도 버겁지만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삶을 이루는 조각 중 가장 소중한 온기를 떼어내어 타인을 불행에 빠뜨리는 구멍을 막으려고 한다. 얼어붙은 현실에서 온기를 찾을 수 없어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제 몸에서 온기를 만들어낸다. 빛이 비추지 않는 곳에서 자라난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사람. 이 소설들을 쓴 작가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림자가 더 자라나서 타인의 삶에 미치는 것을 막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예전에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을 읽었을 때 끝없이 깊어지기만 하는 절망의 힘에 짓눌렀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겨울방학』은 절망에 다다랐을 때 방향을 틀어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을 길로 올라가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천진난만한 제목과 표지그림에 담긴 내용은 여전히 서글프고 초라하고 막막하지만 그 속에서 방향을 틀어서 절망이 아닌 쪽으로 걷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어서 반가웠다.     

 

 <돌담>에서 ‘나’는 가장 선명한 방법으로 겨울을 걷는 사람이다. 장난감 회사에 다니는 ‘나’는 회사에서 장난감을 만들 때 사용이 금지된 화학첨가물을 넣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프탈레이드 가소제’라고 불리는 첨가물은 장난감을 부드럽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암을 유발시키는 원인도 된다. 회사에서 주는 월급으로 먹고 살아가는 ‘나는 처음에 침묵하고 정당화시키다가 ’그런 돈으로 내가 살아가게 하지 말라고‘라는 말을 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회사를 그만두고 고발한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와 산책하다가 어릴 적 함께 놀던 친구 장미를 떠올렸고, 자신의 비겁함과 대비되었던 장미의 품격을 새삼 떠올린다. 소설에서 사고로 동생을 잃고 난 뒤 장미 부모님은 돌담을 쌓는다. 마을 누군가의 잘못으로 죽은 딸은 돌아오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그만 하라는 말로 부모님의 슬픔을 막으려 했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 될 게 없는거야‘ 라고 했던 회사 사람들처럼 마을사람들도 비슷하게 더 이상 문제를 만들지 말라는 표현을 했다. 슬픔을 표현할 수 없게 된 장미 부모님은 돌담을 쌓기 시작했다. ’나‘는 형편없는 인간에서 벗어나 ’더 나빠지고 싶지 않아‘ 회사에서 받을 수 있는 월급을 포기하고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불행을 막을 수 있는 돌 하나를 쌓았다.     



 내가 무엇을 피하려고 하는지 안다. 어떨 때 거짓말하는 인간인지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무엇에서 도망치는 인간인지 생각하기 싫었다. 그런 나를 내게서 빼고 싶었다. 그래서 잊고 살았다. 비슷한 일이 반복될수록 더 잊으려고 했다. 결국 나는 나쁜 것을 나누며 먹고사는 어른이 되었다. 괜찮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괜찮겠지, 괜찮겠지, 아직은 괜찮겠지, 기만하는 수법에 익숙해져 버린 형편없는 인간.

                                   -최진영 <돌담> 중-


      

 겨울 속을 걷는 사람은 더 있다. <의자> <막차> <오늘의 커피> 속 그들도 겨울을 걷는다. 혼자 걷는 길은 춥고 두렵다. 내일이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도 없고 곁을 지켜줄 사람도 없다. 차가워진 몸을 데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온기뿐이다. 한 조각으로 시작되는 온기는 보잘 것 없지만 절망이 아님을 보여주는 지표와 같다. 작지만 소중한 그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그들은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다시 일어서고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표제작 <겨울방학>에 펼쳐진 겨울은 다른 작품과 사뭇 다르다. 아름답고 재미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생활에 꼭 필요한 것만 갖추고 사는 고모의 집을 바라보는 아홉 살 조카의 눈에 비친 가난의 풍경을 보여준다. 냉혹하지는 않지만 추위가 느껴지는 초라한 살림이 몹시도 싫은 조카의 솔직한 말들이 아프다.

 엄마가 동생을 낳아 산후조리를 해야 하는 동안 이나는 어쩔 수 없이 겨울방학을 고모 집에서 보내기로 한다. 고모의 집은 이나의 집과 달랐다. 현관에서 보면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벽을 따라 싱크대와 냉장고와 책상과 책장과 일인용 의자가 죽 늘어서 있었다. 바닥에는 네모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카펫 위에 전기장판이, 전기장판 위에 도톰한 담요가 펼쳐져 있었다.

              -최진영 <겨울방학>-     


 침대도 없고 두 칸짜리 작은 옷장, 가로로 긴 여덟 칸짜리 책장, 책상밖에 없는 집에서 이나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신발장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집에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신발의 존재가 계속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집에 있으면 신발이 보이고 신발 냄새가 나는 것이 짜증났다. 이나를 위해 고모는 선발을 조립해서 신발을 올려두었고 가림막 커튼으로 현관을 가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나는 신발이 그곳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더욱 이 집이 싫었다.  고모는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많은 집에서 조카는 고모에게 없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할 정도였다.           


 커다란 형광등을 켜 두어서 밤에도 환하던 자기 집과 달리 고모 집에는 스태드 두 개만 켜져 있었다. 책장 옆 스탠드는 이나의 키보다 컸다. 책상 위 스탠드는 작았다. 두 개 모두 노란빛을 뿜고 있었다. 형광등 아래서 살 때는 몰랐던 빛의 그림자 같은 게 느껴졌다. 이나는 노란빛이 떨어져서 조금 눈이 부신 바닥을 가만히 쳐다봤다.

 텔레비전. 소파. 탁자. 식탁, 정수기. 오븐. 스피커. 공기청정기. 김치냉장고. 드럼 세탁기. 세탁실. 화분. 쿠션. 로봇 청소기. 다른 방. 하늘이 보이는 베란다.

                        -최진영 <겨울방학>-     

 

 출퇴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인 고모는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아침에는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려 마셨고, 점심을 먹고 커피를 내려 일을 시작해서 저녁까지 일을 했다. 그리고 이나와 산책을 하고 저녁을 챙겨주었다. 이나는 겨울방학이 초라한 집에서 재미없게 흘러가는 것에 화가 났다. 이나는 고모 집에서 자꾸 무언가를 찾는다.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찾아서 없는 것을 찾아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없는 것이 많은 고모에게 화가 난다. 이나는 아이다운 솔직한 마음을 담아 고모를 향해 묻는다.     


그럼 고모 진짜 집은 어디 있는데?

고모는 집이 없어.

……그럼 고모는 가난해?

글쎄.

근데 고모는 왜 결혼 안 해?

고모는 지금이 좋으니까.     

근데 고모는 왜 신발이 두 개뿐이야?

응?

고모는 신발이 두 개뿐이잖아.

두 개면 충분하니까.

   -최진영 <겨울방학>-          


조카를 위해 현관에 가림막 커튼을 설치한 뒤 고모는 조카가 싫어하는 것이 신발장 없는 현관이 아니라 가난한 이 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 좀 괜찮지?

작업을 마치고 주변을 정리한 고모가 이나에게 물었다.

뭐가 괜찮아?

신발 말이야. 좀 덜 보이잖아.

이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고모 말대로 덜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신발은 거기 있었다.

그냥 신발장을 사면 안 돼?

이나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신발장을 둘 데가 없어. 신발도 많지 않고.

고모는 뭐가에 실패한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대꾸했다.

그럼 그냥 아파트를 사면 되잖아. 우리 아파트는 신발 벗는 데도 넓고 신발장도 있고 거실이랑 현관 사이에 문도 있단 말이야. 그럼 신발이 아무리 많아도 문제가 없단 말이야.

...(중략)...

고모는 가난하니까 이런 데서 사는 거잖아. 근데 난 푸르지오에 산단 말이야. 푸르지오에는 이런 거 필요 없단 말이야.

이나는 현관의 커튼을 가리키며 항의하듯 말했다.

이나는 고모 집이 싫은 거구나.

고모는 비로소 깨달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고모는 고모 집이 좋은데.

거짓말. 고모도 싫으면서.

거짓말 아니야. 난 정말 여기가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대꾸하면서 고모는 조금 웃었다.

        -최진영 <겨울방학>-     


 그런 대화가 오간 오후, 고모는 일을 쉬고 이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롤러스케이트장에 가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코인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피아노학원에 등록하기로 약속을 했다. 그날밤 이나가 잠들기 직전 고모는 “네가 내게 배운 것이 가난만이 아니라면 좋을 텐데.” 라는 혼잣말을 한다. 다음날부터 고모는 일을 포기하고 이나와 함께 논다. 피아노학원에 등록하고 서점 구경을 가고 보드게임 카페에서 게임을 하고 만화방과 목욕탕도 가고 직업 체험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다녀왔다. 김밥을 말아먹고 만두를 빚어먹고 기차를 타고 바다에 다녀왔다. 감기가 걸려 나가지 못한 나흘 동안은 모형 비행기 만들고 직소 퍼즐을 맞추며 놀았다.      


 고모가 자기와 놀기를 선택한 순간부터 이나는 고모의 가난을 생각하지 않았다. 신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최진영 <겨울방학>-     


 고모와 함께 노는 동안 이나는 고모의 가난을 생각하지 않고 재미있게 놀았다. 프리랜서가 한 달 동안 일하지 않는다는 건 곧장 생계와 연결된다. 여파가 크다. 한 달 수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불안정한 직업의 특성상 불이익과 위험이 따라온다. 그럼에도 고모는 일을 포기하고 이나와 놀았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고모는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이나에게 선물했다. 이나는 고모에게 가난이 아니라 잊지 못할 겨울방학을 받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것을 뚝 떼어준 고모의 얼굴을 이나는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그런 겨울을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배우고 싶다. 겨울 속에서도 스스로 온기를 내어 나눠줄 수 있는 마음을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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