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이지 Aug 14. 2021

영혼의 빛이여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 <인어공주>

 한 달 만에 왕자를 다시 만났을 때 알 수 있었어. 나를 바라보는 왕자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가엾은 이국 소녀에 대한 동정과 호기심만 담겨있다는 걸.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바다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나를 바로 앞에 두고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나누었던 맹세를 벌써 잊어버렸단 말인가.      

 왕자가 거센 파도에 휩쓸렸던 밤, 나는 커다란 꼬리를 흔들며 숨도 쉬지 않고 헤엄쳤어. 부옇게 솟아나는 포말과 검푸른 달빛을 헤치고 왕자를 찾아내어 넓은 바위에 눕혔지. 그리고 영혼이 왕자의 몸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서둘러 입맞춤을 했어. 

 인어의 입맞춤은 예로부터 물에 빠진 인간을 살리는데 주로 쓰였지. 인어의 입맞춤은 인간과 인어의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힘도 가지고 있어.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기를 일곱 번 반복하면 사라질 정도로 짧은 시간이지만.     

 왕자의 영혼이 흰 빛을 반짝이며 다시 왕자의 몸으로 스며들 때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어.


 어렸을 적, 할머니 품에 안겨 인간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인간의 영혼을 빼고 다른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어. 인간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시기하다가 편을 갈라 싸움을 벌이고 죽이는 역사를 반복하고 있었거든. 그들이 바다에 해를 끼치고 있는 것도 두려웠어. 인간이 바다에 커다란 배를 띄우기 시작하면서 푸른 바다 곳곳에서 떼죽음을 당하는 물고기들이 늘어났거든. 인간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자연이 파괴되면서 평화가 깨졌지. 그런 이유로 나는 인간과 인간 세상 대부분을 부러워하지 않아. 하지만 하늘의 별로 올라가 영원히 빛난다는 인간의 영혼만은 부러웠어. 영혼 없이 물거품의 형태로 생이 끝나는 우리 인어와 달리 죽지 않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이 될 수만 있다면.     


 순수한 사람일수록 영혼이 밝게 빛난다는데, 왕자의 영혼은 얼어붙은 석호에 차곡차곡 쌓인 겨울 새벽의 눈처럼 눈부셨어. 그 순간 영혼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슬픔이 몰려왔어. 영혼이 없으면서 인어는 왜 인간의 영혼을 볼 수 있는 걸까. 영혼을 되찾은 왕자는 눈을 떴어. 내 입맞춤으로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고,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때 나누었던 짧은 대화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 

 왕자는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평생 기억하겠다고 맹세한 다음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어.

“이토록 아름다운 눈은 본 적이 없소. 해가 떠오르는 바다도 해가 지는 바다도 그대의 눈동자처럼 푸른빛으로 출렁이지는 않았소.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바다도 순백의 옷을 껴입은 바다도 당신의 눈에 비할 바가 아니오. 그대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분명하오. 천사여, 나와 함께 궁으로 갑시다.”

 나는 천사가 아니라 인어였지만 설명할 시간이 없었어. 왕자의 호위병들이 달려오고 있었거든. 왕자는 다시 한 번 자신과 함께 궁으로 가자고 청했어. 하지만 나는 인간의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다음 보름달이 뜨는 밤, 다시 이곳에서 만나요.”

 그때 왕자를 찾는 호위병들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서 울렸어.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내가 몸을 돌리는 순간 왕자가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어. 나는 바다의 방식대로 내 이름을 노래에 섞어 알려주었어. 왕자는 그때 내 이름을 들었을까. 듣고 제대로 이해했을까.

 나는 인간의 영혼에 매혹되어 인간이 되고 싶었어. 마녀는 백일 안에 왕자의 사랑을 얻어야만 완전한 인간의 영혼을 가지게 될 거라고 했어. 그렇지 않으면 물거품으로 사라질 거라고. 나는 마녀와의 거래에서 다리를 얻고 목소리를 잃었지. 할머니가 인간의 영혼보다 아름답다고 했던 나의 목소리는 다리를 얻은 순간부터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어.      


 다시 보름달이 뜨던 밤, 왕자는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궁으로 찾아갔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얼음으로 만든 수백 개의 바늘이 다리를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어.

 궁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왕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춤을 추다가 나를 발견했지. 젖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왕자는 시중을 시켜 내게 드레스를 입게 했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갈매기의 깃털과 루비를 깎아 만든 뾰족한 장식을 머리에 꽂도록 했어.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어. 내 눈을 바라보면서도 ‘이곳 사람들과 다른 색이구나.’라고 말할 뿐이었지. 내가 파도에 휩쓸렸던 당신을 구해주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거친 들판을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만 들려왔어. 

 왕자는 나를 시녀로 삼고 침실을 청소하는 일을 시켰어.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쉽게 기분이 변하고 술에 자주 취하고 외모에 무척 신경을 쓰고 시녀들에게 함부로 대했어. 그럴 때마다 나는 왕자의 영혼에서 흰 빛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어. 더 이상 눈부시지 않은 영혼을 지켜보는 건 슬픈 일이야. 바다로 돌아가고 싶은 날이 이어졌지만 언젠가는 하늘의 별로 빛날지도 모르는 영혼을 포기하지 못한 채 나는 계속 왕자의 곁에 머물렀지.      


 오늘은 내가 궁에 들어온 지 백 일째이자 왕자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야. 

 내 목소리를 빼앗아간 마녀는 사실 내가 인간이 되는 걸 반대했어. 인간이 되려다가 물거품으로 사라진 인어들의 마지막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면서. 그래도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인어의 한숨을 섞어 만든 검은 알약을 주며 다시 인어가 싶을 때 왕자에게 먹이라고 속삭였어. 

 “포도주에 넣는 순간 검은 알약은 흔적도 없이 녹을 거야. 왕자가 포도주를 마시면 몸이 차갑게 식어가면서 영혼이 빠져나올 거야. 그때 영혼을 삼키고 바다로 뛰어들면 너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어.”

 지금 내 손바닥에는 검은 알약이 놓여있어. 결혼식 파티를 위해 준비한 포도주에 약을 넣어서 건네면 왕자는 단숨에 마실 거야, 나는 왕자의 영혼이 빠져나오는 순간 재빨리 삼키기만 하면 돼. 그러면 예전처럼 푸른 바다를 헤엄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어. 

 영혼이 없는 인어는 왜 인간의 영혼을 볼 수 있는 걸까. 검은 알약이 손바닥에서 녹고 있는데, 나는 왕자의 영혼에 아직도 흰 빛이 남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망설이고 있어. 한때 내가 사랑했던 영혼의 빛이여. 포도주에 검은 알약을 넣고, 다음은 그 다음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인어의 노래가 혹등고래의 지느러미를 타고 바다 멀리 울려 퍼지는 밤, 왕자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쏘아올린 불꽃이 세상을 밝힐 거야. 영혼의 빛보다 더 눈부시게.     

작가의 이전글 감자 한 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