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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Feb 25. 2021

감자 한 알

이제 여기, 내 것

 감자 한 알이 사라졌다. 종이봉지에 담겨있던 감자를 꺼낼 때 선반 아래 구석으로 떨어졌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몰랐다. 하루에도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망각과 상실, 소멸과 마주하는 요즘 세상에서 감자 한 알의 실종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감자 한 알이 사라졌어도 시간은 이전과 같은 속도로 흘러갔고 일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겨울이 지나는 동안 사라진 감자에 대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다만 손이 닿지 않는 선반의 뒤편, 어두운 구석에 무언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만은 계속 들었다. 그럼에도 지금 확인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으로 계속 피해왔다. 불확실하며 사소한 불안을 오래 품고 있기에 세상은 너무 번잡스러웠다.

 시간이 서랍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내게 주어진 서랍은 불필요한 물건들로 넘쳐났다.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고 찾고 싶은 것은 찾을 수 없는 서랍이었다. 당연히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억지로 닫으려고 해도 서랍은 닫히지 않았다. 단정하게 닫히고 부드럽게 열리는 서랍들이 부러웠다. 헤매지 않고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꺼낼 수 있는 정돈된 질서에 닿고 싶었다.   

   

 커다란 유리병을 꺼내기 위해 선반을 찾았다. 선반의 깊숙한 안쪽에 놓인 유리병을 꺼내다가 옆에 놓여있던 사과를 건드렸다. 사과는 굴러가다가 낙하했다. 떨어진 구석을 살펴보았지만 뿌옇게 가라앉은 어둠만 보일 뿐이었다. 선반을 치우지 않으면 꺼낼 수 없는 깊이였다. 그냥 다음에 꺼낼까 하다가 사소한 불안을 더 쌓아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선반을 옮기고 구석을 살피기로 했다.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선반을 밀고 당겼다. 어두운 구석에 빛이 조금씩 들어가자 방금 떨어진 사과가 보였다. 그리고 조금 더 구석에 사라졌던 감자 한 알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어떻게 빛을 흡수했던 걸까. 감자에는 싹이 돋아있었다. 작고 여린 싹이 아닌 크고 굵은 싹. 썩지 않고 싹까지 틔운 감자를 책상에 올려두고 보았다. 며칠 사이 싹은 더욱 무성해졌고 위아래 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싹이 자라날수록 감자는 점점 쪼그라들었다. 단단하게 보이던 몸체는 자세히 보니 수분이 빠져나가 쭈글쭈글했다. 싹이 무성하게 자라나면서 몸체는 소멸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싹이 난 감자를 심으면 감자를 수확할 수 있다는데, 저렇게 쪼그라든 감자도 가능할까. 사라진 줄도 몰랐던 감자 한 알은 긴 겨울 동안 어둠 속에서 새로운 싹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스스로 다른 생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거다.      


 글이 사라졌다. 하얀 종이에 내가 생각하는 만큼 글자가 까맣게 차오르는 기쁨을 꺼내먹었던 짧은 순간이 지나가자 끝이 보이지 않는 침묵이 찾아왔다. 글자만으로 글을 채우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평범한 오후였다. 그러니까 찾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눈에 보이는 서랍마다 모두 헤집어놓았던 그때, 나는 움켜쥐고 싶었던 글들이 까만 재처럼 흩어지는 순간들을 몇 번이나 목격했음에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읽고 쓰는 시간이 사라지자 얼굴에 살이 올랐다. 글이 사라진 자리는 금세 다른 것들로 채워졌다. 혀를 만족시키는 달콤한 음식과 화면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드라마, 허기를 채우기 위해 행했던 모든 결과물인 불어난 살들로. 무언가를 잃을 때마다 다른 것으로 대신 채우려는 초라한 마음이 고개를 드는 날들이었다.


 사라졌던 감자 한 알은 여러 방향으로 싹을 틔웠는데 사라졌던 글은 나의 한계 그대로 제자리걸음이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장 하나는 찾아내고 싶었는데, 여전히 빈약한 가지에 조악한 장식을 붙이는 식이다. 잃어버린 걸 알면서도 외면한 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럼에도 감자 한 알을 어두운 구석에서 발견했던 날, 어쩐지 조금 가벼워졌다. 호기심과 선망, 무력감과 초조 때문에 성급하게 채워서 뒤죽박죽 넘쳐나던 것들을 덜어낼 때가 된 것 같다. 억지로 채우려 하지 말고 늘 하던 대로 가볍게, 대신 성실하게 걷자. 하루치의 일을 하고 하루치의 음식을 먹고 하루치의 글을 읽고. 딱 그만큼은 쓸 수 있도록.  

    

 푸릇하게 싹이 솟은 감자를 한참 들여다본다. 작은 행성을 차지해버린 바오밥나무처럼 감자의 본래 몸체보다 훨씬 강하게 자란 거대한 싹 때문에 감자라기보다는 새롭게 탄생한 기묘한 생명체처럼 보인다. 쭈글쭈글한 감자에는 싹이 돋기까지의 시간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이제는 흙에 심어도 새로운 감자를 낳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며 손가락으로 꾹 누르자 가쁜 숨을 몰아쉬는 듯한 소리를 내며 폴짝 뛰어오른다. 다시 어두운 구석으로 사라지기 전에 이번에는 재빨리 손을 뻗어 감자 한 알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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