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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Oct 19. 2021

밤의 골목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어. 눈을 감으면 소리로 이루어진 세상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야. 미니냉장고 모터가 돌아가고 현관문 손잡이가 덜컥거리고 옆집 변기 물이 내려가고 복도를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윗집 텔레비전은 웃고 박수치고 잘못된 패턴으로 눌린 도어락은 삐익 경고음을 내고 아래층 노래하는 커플은 박자를 계속 놓치고 현관문 손잡이는 다시 덜컥거리고 같은 음만 반복하는 낮은 휘파람은 발자국 소리와 함께 이어지고 내 핸드폰 진동음은 내 심장 박동과 함께 계속 울리고. 

 부재중 통화 78건. 메시지 94건. 모두 같은 번호로 보내진 것들. 핸드폰 화면을 확인할 때까지 계속 되겠지. 내가 넘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잠을 자기 위해서 눈을 감은 세상은 춥고 어두워. 그곳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걸으면 아주 오래전 내가 두드리던 초록대문이 보여. 닫힌 대문으로 스며들던 밤의 골목까지도.      

     



 슈퍼마켓과 정육점을 지나면 비탈이 시작되는 곳에 골목이 있었어. 외진 곳에 위치한 골목은 아니었어. 골목에서 빠져나오면 일 년 내내 밖에 솥을 걸고 사골을 끓이는 곰탕집과 단골이 많은 세탁소가 바로 보였으니까. 슈퍼마켓과 정육점이 가까운 것은 물론이고 떡볶이와 튀김을 파는 포장마차도 있었고 더 큰길로 나가면 병원과 예식장도 있었어. 외지다기보단 오히려 소도시의 번화가에 인접한 골목이라고 볼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도 이상하게 외지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어.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그런 곳.

 환한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지. 수십 차례 지나다녀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아. 낮의 골목은 잠들어있거든. 해가 지고 어스름한 시간이 되면 바뀌어. 아니지. 눈에 익은 형태가 보일 정도의 빛이 남아있을 때까지는 괜찮아. 오히려 어스름한 빛을 받은 골목은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집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일종의 향수를 자아내게 할 정도로 감상적인 색채를 띠기도 하거든. 하지만 저녁식사가 끝나고 근처 가게들과 골목 안에 있는 집들의 불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하면 달라져. 어둠이 깔린 골목은 음험한 숨소리를 삼키며 입구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등을 타고 올라 바짝 달라붙어.      


넘어져라. 넘어져라. 넘어져서 피를 흘려라.    

  

 일종의 운이야. 넘어지거나 넘어지지 않는 건. 아무리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넘어질 사람은 넘어질 수밖에 없어. 술에 취해 비틀거려도 운이 좋으면 멀쩡하게 집으로 들어갈 수 있어. 나는 넘어지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발소리가 나게 또박또박 걸으면 돼. 그렇게 걸어서 스무 걸음, 오른쪽으로 꺾어서 열 걸음을 더 걸으면 다섯 개의 계단 위에 초록색 대문이 보였어. 골목 맨 끝에 있던 우리집. 

사실 밤의 골목에서는 초록이 보이지는 않았지. 어둠 속에서 짙은 그림자처럼 솟아있을 뿐이었어. 대문이 보이면 나는 냅다 달렸어. 골목이 어두울 때는 대문이 잠겨있지 않기를 바랐어. 오래된 초인종은 고장이 나서 잘 눌러지지 않았거든. 그러면 식구들이 문을 열어줄 때까지 대문을 두드리며 불러야했어. 대문은 열려있을 때도 닫혀있을 때도 있었어. 어느 날부터는 늘 닫혀있었지만. 그곳에서 거의 구 년을 살았던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어릴 적, 아주 오래전 일이야.     


 특별한 일이 특별한 날에만 일어나는 건 아니야. 평범한 저녁이었어.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갑자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다급한 목소리. 겁에 질린 여자 목소리였어. 가족들은 서로를 쳐다보았어. 어쩌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문을 열어줘도 되는 걸까. 목소리를 들으면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도둑이나 강도면 어떡하지?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마루에 서서 대문을 향해 누구냐고 물었어. 도와주세요. 어떤 남자가 자꾸 쫓아와요.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도둑이나 강도가 여자를 쫓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 아버지는 얼른 마당을 내달려 대문을 열어주었어. 긴 머리에 투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겁에 질린 얼굴로 서있었어. 

 아버지는 여자를 얼른 마당으로 들어오게 한 뒤 대문을 닫았어. 후들거리는 다리로 마당을 걸어 겨우 마루에 앉은 여자에게 어머니가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어. 긴 생머리에 핑크색 투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자는 예뻤어. 그런데 예쁘다는 생각보다는 가엾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 늦은 시간, 남의 집 대문을 두드려야 할 정도로 무서운 일을 당하다니 어떡해, 하는. 여자는 넘어졌는지 무릎과 손바닥의 살갗이 벗겨져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어. 웅크리고 앉아 늘 누군가 넘어져서 피 흘리기를 바라는 밤의 골목이 여자에게 달라붙었던 것이 분명해. 


 오늘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지금 골목 밖으로 나가면 남자가 아직도 있을 텐데 너무 무서워요. 여자는 애원했어. 따라오는 남자가 도둑이나 강도냐고 묻자 그건 아니라고, 자신을 따라다니는 남자라고 했어. 싫다고 말해도 피해 다녀도 계속 따라다니는 남자라고.     

 어떻게 해야 했을까. 처음 보는 여자를 하룻밤 재워줘도 되는 걸까. 이 시간까지 집에 안 들어가고 무릎이 보이는 치마를 입고 돌아다니는 젊은 여자라니. 애초부터 이렇게 어두운 골목으로 달려 들어온 것부터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 겨우 세 집밖에 살고 있지 않은 골목으로 애당초 왜 들어온 거야.      

 집사람과 상의를 해봐야겠어요. 그 순간 누군가 대문을 세게 두들겨댔어. 계십니까! 이집으로 제 애인이 들어온 것 같은데 문 좀 열어주십시오! 도둑이나 강도는 아닌, 여자를 따라다니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남자였어. 누구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남자는 자신은 여자와 결혼할 사람이라고 했어. 아 그렇구나. 결혼할 사람이었던 거야. 그 말에 아버지는 안도하며 대문을 열었어. 남자가 우리집 마당으로 들어올 때 골목에 깔려있던 어둠이 함께 스며들었어. 물컵을 쥐고 있는 여자의 손이 파르르 떨렸어. 

 둘이서 데이트를 하다가 사소한 문제로 싸웠는데, 여자가 갑자기 화를 내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남자는 말했어. 밤늦은 시간에 소란을 피워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어. 젊은 사람들이 연애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남의 집에 와서 소란을 피우면 쓰나. 데이트도 밝을 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 아버지는 그런 충고 끝에 여자를 향해 말했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화가 나도 대화로 풀어야하지 않겠냐고. 여자는 남자의 눈을 피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 정말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날 여자는 남자를 따라 돌아갔어. 가고 싶지 않은 얼굴로. 남자는 밤이 깊어져서 더 짙은 어둠을 뿜어내는 골목으로 여자의 팔을 붙잡은 채 데리고 들어갔어. 골목을 빠져나가는 동안 넘어졌을까. 넘어져서 피를 흘렸을까? 넘어진 건 누구였을까? 


정말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골목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금세 보이지 않았어. 

대문 닫아라. 

그 뒤로 밤에 낯선 사람이 대문을 두드리는 일은 없었어.    


       



 핸드폰 진동음이 멈추자 나는 눈을 떴어. 메시지는 내가 가진 두려움의 실체처럼 숨이 막힐 듯한 숫자로 쌓여있었어. 확인을 누르는 순간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날까봐 메시지 확인 버튼을 누르지 못했어. ‘기다려. 너도 데리고 갈 거야.’ 라는 마지막 메시지가 화면 창에 떠있었거든.      


웃는 듯 화난 얼굴. 네가 먼저 나한테 웃었잖아. 그 얼굴은 그렇게 말했어.      


늦은 오후부터 문 닫는 밤 시간까지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어.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서 봄날치고는 쌀쌀한 저녁, 열린 창문들을 닫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을 때 비에 흠뻑 젖은 남자가 들어왔어. 그 시간대에는 손님이 별로 없어서 마감을 하러 사장이 올 때까지는 나 혼자 있을 때가 많아. 나는 서둘러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받았어. 남자는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어. 다른 손님이 없어서 나는 금방 커피를 만들어서 남자에게 건네며 말했어. 맛있게 드세요. 

 카페에는 저녁시간이면 틀어놓는 조용한 인디밴드 음악이 흘렀어. 비가 내리고 손님도 없어서 나도 커피를 한 잔 내려서 마셨어. 그뿐이야. 


 그 뒤로도 남자는 혼자 와서 커피를 마셨어. 카페에서는 커피 한잔에 도장 하나, 도장 열두 개를 받으면 커피 한 잔을 공짜로 주는 쿠폰이 있어. 나는 남자가 쿠폰을 내밀 때도 남자가 십이일 연속으로 카페에 왔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어. 그 뒤로도 남자는 계속 혼자 와서 커피를 마시고 쿠폰에 도장을 여러 번 채웠어.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내게 장미 꽃다발을 건네며 말했어. 좋아합니다.

 내가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장미는 지나치게 붉었고 남자는 지나치게 가까운 사이처럼 굴었어. 나는 약간 더듬거리며 말했어. 죄송합니다. 고맙지만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굳은 얼굴로 변한 남자가 왜 그러냐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했어. 잘 모르는 분께 받을 수 없어서요.     


 네가 웃으면서 커피를 건넸잖아. 네가 일부러 나와 같은 커피를 마시면서 눈을 마주쳤던 것도 알아.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했는데 나를 모른다고? 함께 듣던 조용한 음악들 사이로 눈을 마주칠 때마다 너, 웃었잖아. 우리, 서로 잘 통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나는 널 잘 알아. 좋아하는 음식과 손에 바르는 로션과 자주 입는 옷도 알아. 테이블을 정리하고 컵을 씻을 때 표정과 요일에 따라 달라지는 목소리도. 출입문이 열릴 때 종소리가 날 때 네 표정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카페에서 나온 뒤 네가 걸어가는 골목과 편의점에서 자주 사는 물건들과 경비가 없는 원룸 삼층 맨 끝방에 멈춰서 네가 누르는 빨간색 도어락 소리도 알고 있어. 우리가 몇 달 동안 얼굴을 마주치며 대화를 나눴는데 나를 모른다고? 다른 남자가 생긴 거구나. 네가 상냥하게 말을 건네며 커피와 샌드위치를 가져다주던 남자? 아니면 근처 사무실에서 우르르 몰려와서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던 놈들 중 하나? 아무에게나 그렇게 웃어? 나한테, 네가 먼저 웃었잖아. 내가 보낸 선물들은 다 버렸네. 원룸 지하 쓰레기장에. 쓰레기봉투에서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알게 됐어. 나만큼 너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데 왜 나를 피해? 문자 보냈는데 씹어? 전화 받아. 아직 방에 불 켜져있네. 안 자고 있으면서 왜 씹어. 지금 문 열고 나오면 용서해줄게. 아직도 안 나오네. 선물 두고 간다. 내 선물, 또 버렸네? 다른 걸 두고 간다. 너 닮은 고양이인데 안 움직이네ㅋ. 네가 먼저 웃어놓고 나를 이상한 놈 취급했어. 좋아한다는데 도망가? 못된 버릇 고쳐줄게. 전화 받아. 문 열어. 가만 안 둔다. 마지막 기회다.    


 남자가 보낸 메시지들은 갈수록 폭력적이 되어갔어. 문 앞에서 죽은 고양이가 발견된 날, 나는 경찰에 신고했어. 젊은 남녀 간에 웬만하면 대화로 잘 풀어요. 경찰은 사건이 발생해야 수사를 할 수 있다고 말했어.     

 

 한밤중 복도를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 사이로 휘파람이 섞여서 들려와. 잠들고 싶어서 눈을 감으면 어둠에 잠긴 골목을 지나고 있는 내가 보여. 넘어지지 않으려고 어둠을 향해 눈을 똑바로 뜨고 걸어가는. 초록색 대문이 보이면 냅다 뛰어보지만 대문은 굳게 닫혀있어. 어둠이 발목을 지나 허리까지 차올라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나는 눈을 감고 대문을 두드려. 누군가 그 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래서 대문이 열릴 때까지. 

 아주 오래전 평범했던 그날 저녁, 골목을 향해 걸어 들어가던 여자가 잊히지 않아. 넘어졌을까? 넘어져서 피를 흘렸을까?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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