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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Mar 11. 2021

감정의 눈

옥탑방 발자국

 학교 정문을 나와 모퉁이를 돌자 작은 슈퍼와 세탁소, 비디오가게와 쌀집이 나란히 붙은 골목이 나왔다. 우리는 정의 집에 가기 전에 슈퍼마켓에서 과자 몇 봉지를 샀다. 아이스크림은 집었다가 너무 추울 것 같아 다시 냉동고에 넣었다. 쌀집 다음부터는 비슷비슷한 집들이 이어졌다. 희와 나는 학교 담벼락을 오른쪽으로 끼고 정을 따라 걸었다. 골목이 깊어질수록 살갗에 닿는 바람이 매서웠다. 학교 담벼락이 끝나고 우유보급소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정은 축대 아래쪽에 있는 구불거리는 골목으로 내려갔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모인 좁은 골목이었다. 옆집과 맞닿은 지붕과 옥상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도 골목의 크기에 맞춰 좁아졌다. 앙상한 안테나와 전봇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구겨진 신문지처럼 칙칙한 빛을 띠었다. 골목이 좁아질수록 더욱 거칠어진 바람에 뺨이 얼어붙었다. 담벼락에 겨우 붙어있던 전단지가 바람에 날려 좁은 하늘로 날아갔고 나는 뺨에 두 손을 갖다 댔다. 그때 정이 멈춰서며 말했다. 바로 이 집이야.     


 활짝 열려있는 대문으로 들어서자 2층 양옥집이 보였다. 열쇠가 따로 없어서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대문을 열어놓고 다닌다고 정이 말했다. 1층은 주인집, 2층은 젊은 부부가 살아. 우리집은 2층에서 계단을 더 올라가.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는 파란색 철제계단이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계단에서는 녹가루가 부스스 떨어졌다. 괜찮아. 한 번도 계단이 무너진 적 없어. 정은 밑창이 얇은 구두를 신고 씩씩하게 올라갔다. 희와 나는 운동화를 신고 조심조심 정을 뒤따랐다. 


 시멘트로 바른 작은 옥상에 빨랫줄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창문과 갈색 출입문이 있는 네모반듯한 벽돌집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지붕이 없어 상자처럼 보이는 집이었다. 정은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개수대와 가스레인지가 있는 작은 부엌이 나왔다. 부엌 안쪽으로는 나무로 된 방문이 하나 있었는데, 정이 그 문을 열자 방이 나타났다. 우리는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깐만 기다려. 전기장판 틀면 금방 따뜻해질 거야. 

 정은 전기장판 온도를 높이고 엉거주춤 서있는 희와 나에게 창문에 올려져있던 검은 봉지를 건넸다. 귤부터 먹고 있어. 까서 버린 귤껍질과 섞여있는 귤을 서너 개밖에 되지 않았는데, 모두 수분이 빠져나가서 미지근하고 윤기가 없었다. 나는 귤 하나를 골라 들고 방을 둘러보았다. 단출한 방이었다. 옥상을 향해있는 창문에는 꽃무늬 커튼이 걸려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파르르 떠는 커튼을 살짝 젖히자 빨랫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눈이 내릴 것처럼 무거운 하늘 아래로 회색 시멘트 옥상과 빨랫줄, 파란색 철제계단의 일부, 거의 붙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웃집들의 옥상이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오갈 수 있을 것처럼 옥상들의 간격은 무척 좁았다.      

-정, 다른 집하고 옥상이 너무 붙어있는 것 같아. 저 정도면 내가 살짝만 뛰어도 옆집으로 넘어갈 수 있겠는데?

-가깝다고 다른 집 옥상으로 넘어오는 사람이 어디 있냐? 나 살던 섬에서는 다들 이웃집을 편하게 드나들었지만 도시는 다르지. 그리고 너는 다리가 짧아서 뛰어도 못 넘어갈 걸?

-정, 몇 번을 말했지만 난 다리가 짧은 게 아니라 허리가 약간 긴 것 뿐이라고. 

 정과 내가 옥상을 건너뛸 수 있는 다리 길이에 대한 논쟁을 이어가는 동안 희는 방구석으로 가서 “이 정도 간격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 라고 말하며 전기장판을 뛰어넘었다. 희는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정과 나는 희가 전기장판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몇 번이나 뛰어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과자나 먹자는데 동의했다. 


-이 방에서는 늦잠을 못 자. 하루 종일 해가 들어서 눈이 부셔. 그래서 해지기 전까지는 커튼을 쳐놓고 있어.

 꽃무늬 커튼을 닫으면서 정이 말했다. 커튼을 닫아도 방은 밝았다. 오후 햇빛이 은은하게 스며드는 방은 전기장판이 놓인 자리를 빼면 비키니옷장 하나, 커다란 종이상자가 두 개, 교과서와 문제집, 소설 몇 권이 꽂힌 삼단책장 하나, 빨간 체크무늬 천이 깔린 밥상 하나가 전부였다. 거울과 빗, 로션, 립글로스, 알록달록한 매니큐어 같은 화장품을 담아둔 플라스틱 상자와 전기포트와 컵, 책 한권이 놓인 상은 체크무늬 천이 깔렸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해보였다. 밥상이 멋지다고 말하자 정은 밥상이 아니라 테이블이라고 말했다. 초라한 자취방이었지만 당시에는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부러웠기 때문에 나와 희는 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우리가 부럽다는 말을 반복하자 정은 별것 아니라는 듯 부러우면 너희도 독립해, 라고 하며 전기장판에 깔린 담요 속으로 쏙 들어갔다.      


 전기장판은 금방 따뜻해졌다. 다리를 쭉 펴고 앉아서 과자를 먹고 정이 끓여준 인스턴트커피를 마셨다. 엉덩이가 뜨뜻하고 배가 부르자 몸이 노곤해지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우리는 전기장판에 등을 대고 누워 학교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했다. 벼락치기를 했지만 망쳐버린 시험과 화장실에서 발견한 낙서와 가출한 어느 반 아이의 행방에 대해서. 그러다가 보온도시락을 안고 사람들의 등과 어깨에 얼굴이 눌린 채로 콩나물시루 버스를 타야하는 매일 아침의 등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때 정이 “여기에서 학교 정문까지 빨리 걸으면 오 분이면 도착한다.”며 으쓱했다. 부러운 가시나. 나와 희는 우리도 여기에서 같이 살면 안 되냐며 정에게 달라붙었다. 정은 언제든지 환영이라면서 대신 청소, 설거지는 모두 너희 담당이라고 했다. 




 정은 섬에서 나고 자랐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이곳 소도시로 오면서 독립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혼자서 살지만 겨울이 지나면 섬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동생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이 집에 들어와서 함께 살 거라고 했다. 얇은 쌍꺼풀에 도톰한 입술, 귀 뒤로 넘긴 숏컷. 날씬한 다리에 발목까지 올라오는 스니커즈나 밑창이 얇은 구두를 자주 신고 다녔던 정은 어른스러운 느낌이 풍기는 아이였다. 활발하고 쿨한 성격에 어떤 경우에도 당황하는 법이 없이 똑부러진 말투는 정을 더욱 어른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교실 뒷자리에 앞뒤로 앉으면서 가까워졌다. 정은 섬이 늘 지겨웠다고 말했다. 


-섬에서 나와 살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자라면서 날마다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풍경에 질려버렸거든. 섬마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지내는 사이라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독립하면서 자유를 얻었어. 가족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어쩔 때는 직접 만나는 것보다 가끔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정도가 좋을 때도 있어. 이번 겨울방학 때는 짧게 내려갔다가 올라올 거야. 

-정, 바다는 아름답잖아. 나는 바다를 날마다 볼 수 있으면 진짜 좋을 것 같은데.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바다만 보고 살아서 그런지 더 보고 싶지도 않아. 음.....그래도 아주 가끔은 바다가 그리울 때가 있다. 바닷가에서 우리집으로 가는 고개는 여럿인데, 그 중에 감정고개라고 내가 좋아하는 고개가 있어. 해질 무렵 그 고개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앉아 바다를 보면 정말 좋거든.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정의 얼굴에 쓸쓸하고도 홀가분한 미소가 떠올랐다. 집을 떠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부럽다. 나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에 정은 뭐라는 거야, 라고 말하며 귤 하나를 던졌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감정고개에 가는 걸 엄청 싫어했어. 내가 그곳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엄청나게 화를 내셨어. 그래도 나는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면 고개를 향해 달렸어.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으니까.

-고개 이름이 특이하네. 감정이 담긴 우물이라는 뜻인가?

-아니, 그런 감정이 아니라 달 감에 우물 정. 아주 오래전에 그 고개에 있는 우물에서 차갑고 맑은 물이 샘솟았대. 물이 어찌나 달고 시원한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어. 한여름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우물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앉아 물을 마시며 목을 축이고 더위를 달랬어. 그 물을 길어 밥을 짓거나 국을 끓이면 단맛이 돌고, 세수를 한 얼굴에는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어. 그런데 나는 차갑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우물을 한 번도 못 봤어. 

     

 어린 시절부터 정의 기억 속 우물은 돌무더기의 형태로 남아있었다. 그 형태를 처음 깨뜨린 건 일곱 살 여름이었다. 친구들과 섬을 뛰어다니다가 감정고개에 올랐다.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하던 곳이었지만 커다란 무화과나무를 타고 오르는 놀이를 하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주 그곳에 갔다. 한참 무화과나무를 타고 놀다가 한 아이가 돌무더기에 올라가서 섰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굴렀다. 돌무더기가 높지 않아서 무릎이 살짝 벗겨질 정도의 상처만 났다. 하지만 아이가 구를 때 돌무더기가 헐거워지면서 작은 돌멩이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돌멩이가 빠진 돌무더기 사이로 무언가 보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돌무더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힘을 합쳐 큰 돌들을 떨어뜨렸다. 몇 차례 반복하자 돌무더기는 무너져 내렸다. 

 무엇이 들어있을까. 둥근 모양의 커다란 나무 뚜껑이 보였다. 수백 번의 못질이 된 나무뚜껑은 녹슨 못에서 흘러나온 물과 틈 사이마다 자라난 이끼로 얼룩져있었다. 손잡이도 없는데 어떻게 열지? 한 아이가 말했다. 열면 안 될 것 같은데. 무서워. 다른 아이가 말했다. 보물상자를 감춰둔 곳인지도 모르잖아. 또 다른 아이가 말했다. 정은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드는 동시에 뚜껑을 원래대로 돌로 덮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열어봐야지.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정이 뚜껑을 열어보자고 말하자 아이들은 머뭇거렸다. 뚜껑을 열었는데 이상한 게 있으면 빨리 닫으면 되잖아. 그럴까. 아이들은 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할 때 뚜껑을 들자! 하나 둘 셋! 

 작고 어린 손 여덟 개가 오랫동안 돌무더기에 갇혀있던 뚜껑을 들어올렸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 시도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오랫동안 돌에 눌려있어서 그런 걸까. 아이들의 손은 뚜껑에서 흘러내린 녹과 이끼로 물들었다. 두 뺨은 뜨거웠고 등은 흘러내린 땀으로 축축했다. 바람 한점 불지 않던 여름 오후, 아이들은 더위에 지쳤다. 목이 마르고 손을 깨끗이 씻고 싶었다. 그래서 돌무더기를 다시 쌓아둘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우르르 바다로 내달렸다. 신발만 벗고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고 뚜껑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해질 무렵이 되어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 정은 다시 감정고개를 향해 달렸다. 집까지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무화과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고개가 보였을 때 정은 불길함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췄다. 낮에 아이들과 들어올리기를 포기한 채 그대로 두고 떠났던 뚜껑이 열려있었다. 다른 길로 돌아갈까 하다가 정은 저녁밥 먹을 시간에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고개를 올랐다. 정은 돌무더기가 무너져 내린 쪽을 보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며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보지 않으려 할수록 이상하게 눈이 자꾸 그쪽을 향했다. 정은 자신도 모르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돌무더기로 걸어갔다. 지는 해에 비치면서 뚜껑에 낀 녹과 이끼는 낮보다 짙어져있었고, 그렇게 애써도 열리지 않던 뚜껑은 활짝 편 손바닥 정도 크기로 열려있었다. 우리가 간 뒤 누군가 열어둔 걸까. 정은 조심조심 다가가 열린 뚜껑 틈에 눈을 가까이 댔다. 검고 깊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은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 뚜껑을 힘껏 밀었다. 뚜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정은 다시 열린 틈새에 눈을 댔다. 여전히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깜깜해. 집에 돌아가자. 정이 눈에 떼고 고개를 들려고 할 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그리고 텀벙 하고 물에 무언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철벅철벅 물을 헤치고 움직이는 소리에 젖은 옷이 마찰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깊고 낮은 곳에서 시작된 소리는 점점 위로 올라왔다. 어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정의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마침내 뚜껑이 덜컹거렸다. 정은 셋을 세면 뚜껑을 완전히 열리고 무언가 나타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둘.... 정아. 그때 누군가 정의 이름을 불렀다. 정의 엄마였다. 


-그날 우물가에서 들었던 소리가 진짜인지 꿈인지는 잘 모르겠어. 다만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도 먹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다가 한밤중에 이웃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었는데, 무너진 돌무더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어. 누가 돌무더기를 그렇게 헤치고 뚜껑을 열려고 했을까. 아이들 장난이겠지. 무슨 소리야, 우물을 덮은 뚜껑 테두리를 시멘트로 발라놓았는데. 망치 같은 걸로 부수지 않고서는 열 수가 없다고. 아무래도 돌무더기를 파헤친 범인을 찾고 있는 것 같았어. 이웃들의 목소리 사이로 엄마 목소리가 섞여 들었어. 내일 아침에 가서 다시 원래대로 해놓아야지. 한숨 소리와 긴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 말했어.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르던 우물이었는데, 너무 안타까워. 우리 어릴 적부터 우물가에서 음식도 나눠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많이 놀았잖아. 그 일만 생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일이 무언지 궁금했어. 그래서 계속 잠든 척을 하고 눈을 감고 있었어. 어쩐지 그 일에 대해 말할 것 같았거든. 

 전기장판에 담요를 덮고 누운 채 정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해가 진 건지 날이 흐린 건지 꽃무늬 커튼으로 비쳐들던 해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둑해진 방안으로 어린 시절로 이끄는 정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의 예상대로 마을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물이 샘솟던 그때만 해도 섬을 찾는 외지인들이 제법 있었다. 깨끗한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거나 넓은 집의 방 한칸을 빌려서 조용히 쉬었다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끔은 단체로 몰려와서 시끄럽게 놀다가는 무리도 있었다. 정의 엄마가 고등학생이 된 뒤 첫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섬에 내려왔을 때 도시에서 온 청년 네댓 명이 캠핑을 하고 있었다.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고기를 굽고 술을 마셨다. 

 그날 밤 엄마는 집으로 놀러온 친구들과 밤늦도록 함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섬에 남아서 집안일을 돕는 친구, 도시에 나가 일찌감치 직장생활을 친구. 친구들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엄마를 부러워했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엊그제 만난 것처럼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너무 늦었으니 자고 가라는 말에 친구들은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는 익숙한 길인데 뭐가 걱정이냐며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해서 집에 가야된다고 했다. 두 친구는 집이 반대쪽이었다. 엄마는 양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까지 친구들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뜰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엄마가 잠들어있는 사이 한 친구가 사라졌다. 아침이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며 친구의 부모가 우리 딸 여기에 있냐며 정의 엄마를 찾아왔다. 아무도 친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바닷가는 비어있었다. 아침 일찍 청년들은 텐트를 걷고 짐을 싸서 첫 배로 떠났다. 마을사람들은 흩어져서 친구를 찾기 시작했다. 한나절이 지난 뒤 감정고개에 오른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사라진 친구의 행방을 추측해보았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우물가에 슬리퍼 한 짝이 떨어져있는 걸 발견했다. 친구가 자주 신고 다니던 보라색 슬리퍼였다. 설마. 경찰이 섬에 도착할 때까지는 불안의 범주에 속해있던 일은 현실이 되었다. 친구는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몸을 피하기 위해 다급히 뛰어든 모습으로 우물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누구에게 쫓겼던 걸까. 마을사람들은 밤새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놀다가 아침 일찍 떠난 청년들을 떠올렸다. 경찰은 청년들의 행방을 좇았지만 혐의점을 찾지 못한 채 친구의 죽음을 실족사로 결론지었다. 그 뒤부터 우물에서는 흙이 섞인 탁한 물이 나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더이상 샘솟지 않았다. 우물은 급속도로 말라갔다. 마을사람들은 시멘트를 바른 뚜껑을 덮고 돌무더기를 쌓아서 우물을 완전히 막았다. 그리고 주변에 작은 꽃들을 심고 해마다 그때가 되면 우물가에서 친구의 넋을 기렸다. 몇 해를 보내면서 친구의 가족들은 도시로 이사를 떠났다. 몇 해를 더 보내면서 감정고개를 찾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정의 엄마만 친구의 기일이 되면 그곳에 와서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이야기는 끝났지만 우리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정이 일어나서 불을 켰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나보다. 정이 던져주었던 귤은 손에서 물렁하고 따뜻해졌다. 별로 먹고 싶은 마음도 없이 그냥 껍질을 벗겨 귤을 입에 넣었다. 신 맛도 단 맛도 아닌 시큼하고 미지근한 맛이 났다. 오래 고인 물을 마시는 느낌이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나있었다. 나와 희는 급하게 가방을 챙겨들고 부엌에 놓인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 사이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가까이 붙은 옆집 옥상에도 앞집 지붕에도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눈이다.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문을 연 순간 현관문을 향해 선명하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쌓인 눈으로는 감춰지지 않는 발자국. 우리 것보다 훨씬 큰 발자국이었다. 발자국은 옥상을 오르는 계단이 있는 쪽에서부터 시작해서 옥탑방 현관문에 이르렀다가 옆집 옥상으로 이어졌다. 뛰지 않아도 건널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옥상. 나와 희는 정에게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하지만 정은 누가 집을 잘못 찾아왔을 거라면서 걱정하지 말고 더 늦기 전에 가라며 손사래를 치며 웃을 뿐이었다. 우리는 정이 현관문을 잠그고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옥상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에는 올라오는 방향으로 커다란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도대체 누가 정의 집을 찾아왔던 걸까. 골목을 나오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비슷하게 닮은 집들 속에서 발자국의 주인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사이 하얀 눈이 검은 발자국을 덮을 것이고 마침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롭고 조용한 풍경만이 남아있을 테니까.

 밤새 눈이 내린 다음 날, 학교에서 만난 정의 안색이 창백했다. 지난 밤에 대해 묻자 별일 없었다고 하면서 눈이 많이 내려서 계단을 내려올 때 불안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정은 섬으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무겁고 축축한 눈이었다.    

            


#일상공포 #무서운이야기 #우물 #발자국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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