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음식은 손맛이 아닌 좋은 재료의 맛, 정성이 아닌 정확한 계량이다
평생 음식이라곤 라면밖에 끓여본 적 없고, 아예 음식에 관심조차 없어 지금까지 아내에게 무엇인가 먹고 싶은 것을 해달라고 한 기억이 없다. 아내는 반찬 투정하지 않는 나에게 감사하면서도 때로는 "요샌 요리하는 남자가 대세라는데 나도 남편이 해준 근사한 요리를 먹어봤으면 좋겠다" 불평을 하곤 했다. 이런 내가 감히 어머니의 손맛과 정성을 부정하며 재료와 정확한 양이 음식의 맛을 좌우한다고 하면, 나조차도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음식 만드는 일을 참 좋아한다. 가족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요리하고, 맛있게 먹는 가족들을 보며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신혼 초에 캐나다로 이민 와서 그런지 김치만은 넘사벽이 되고 말았다. 올림픽 행사처럼 3~4년에 한 번씩 김치를 담가 실패하자, 김치는 자연스럽게 사다 먹는 음식이 되었다. 우리의 삶 속에 김치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음식이 되었다.
지난 10월 초, 정치 및 사회 뉴스만 보던 내가 총각김치 사진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맛있는 총각김치 담그기" 기사를 클릭했다. 부부 모두 좋아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대로만 따라 하면 나도 맛있는 총각김치를 담글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장모님이 얼마 전 보내주신 고가의 고랭지 고춧가루에 무만 제대로 절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아내가 하지 못하는 음식이니까, 설령 실패한다 해도 본전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마음먹으면 계획하고 실행하는 성격에 바로 유명 맛집 블로거들의 레시피를 찾아보았다. 엑셀에 무의 중량을 같은 기준으로 놓고 각 레시피들의 절임 소금의 양이나 시간, 양념 재료들의 양을 비교해 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차이가 나서 당황했지만, 적절히 보완하여 간결하지만 정확한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었다.
총각김치 레시피
재료: 총각무(3.0kg), 소금 1.5컵, 맛술, 식초, 쪽파 2단
1. 무의 앞 자르고 경계를 손질, 잔털을 칼로 긁으며 조심히 씻고
2. 절임물은 무중량의 4배 컵 (2.5kg X 4=10컵), 소금은 물의 10:1.5 (즉, 1.5컵), 맛술(쓴맛을 잡음)은 소금의 2:1 (즉, 0.75컵), 식초는 맛술의 3:1 (즉, 0.25컵)
3. 무를 세워서 1시간, 눕혀서 무청까지 추가 1시간 절임 (중간 뒤적여주고, 무의 휘어짐으로 절임 정도 확인)
4. 물로 2~3번 조심히 씻고 20~30분 물기를 뺀 후 2~4등분 칼질
양념장:
붉은 고추 4개, 마늘 8개, 생강 1.6(마늘 크기), 양파 0.3개, 배 0.25개, 사과 0.25개, 액젓 0.4컵, 새우젓 1스푼, 고춧가루 1.2컵, 설탕 1.5스푼, 블루베리청 0.8스푼, 매실청 1.2스푼
5. 물 160ml에 건다시마 넣고 4시간 우려내고
6. 다시마 물에 통밀(밀가루) 2.5 스푼 넣고 섞은 후, 끓였다가 완전히 식힌 후,
7. 양념장에 쪽파 2단을 추가하여 버무린 후, 3~5일 상온 보관 후 김치냉장고에 넣는다.
* 계량 수치 - 컵: 250ml, 스푼: 15ml
꼼꼼히 살펴보고 중량까지 확인해 구입한 총각무를 다듬으며 나의 총각김치 담그기가 시작됐다. 10월의 찬 기운 속에 찬물로 무를 다듬으며 "왜 내가 사서 이 고생을" 잠시 후회를 하였다. 아내는 액젓이 뭔지, 새우젓이 어디 있는지, 매실청이 어떤 맛인지 모르는 나를 위해, 내가 말한 모든 양념재료들을 조리대에 준비해 놓았다. 마치 이번 기회를 통해 음식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맛을 낸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한번 깨달아 보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화학 실험을 하듯이 모든 재료들을 철저히 계량컵과 스푼으로 계량하고, 한치의 주저함 없이 레시피 순서대로 김치를 담가나갔다.
아내는 참견하고 조언했지만, 나는 전혀 듣지 않았다. 예전에 아내가 김치를 담글 때 내가 뭐라 하면 아내는 "어디서 감히"하며 내 말을 철저히 무시했었다. 소심한 복수다. 아내는 중간중간 간이나 양념 맛을 확인하기 원했지만, 난 총각김치를 담가서 통에 다 담아 넣을 때까지 한 번도 간이나 맛을 보지 않았다. 아내는 이런 나의 모습을 너무나 황당해했다.
나는 "간이나 양념의 맛을 모르는데 내가 맛을 본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나?" 또한, "무를 절일 때 날씨와 기온을 고려하지만, 레시피를 철저히 신뢰해야 나중에도 항상 같은 맛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장모님의 고춧가루 덕에 완성된 총각김치의 색깔은 환상 그 자체였다. 색깔, 모양 및 향으로만 평가를 내린다면 어디에 내놔도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 완성되었다.
2주 후, 주변 지인 세 가정에 총각김치가 배달되었다. 처음 총각김치를 받을 때의 표정들은 약간의 당혹스럼과 주저함이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받지만, 굳이 안 주면 더 고마울 것 같다는 마음 같았다. 하긴 나라도 음식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중년 남자가 뜬금없이 김치를 담갔다고 먹어보라고 하면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날 밤, 아내에게 전달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만들어 팔면 비싸도 사 먹겠다." "예전 할머니가 담가주시던 총각무의 맛이다." "지금까지 먹어본 총각무들 중 최고 수준이다." "흰쌀밥에 총각김치 만으로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며 고마워했다. 이미 아내조차 그 맛을 인정했기 때문에, 나는 어느 정도 기대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난 누구라도 이 고춧가루와 레시피만 가지면 같은 맛을 낼 수 있을 거라며 겸손해했다.
3달 후, 같은 맛을 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나는 다시 한번 총각김치 담기에 도전했다. 동일한 지인들에게 총각김치가 배달되었고 같은 맛이라고 인정받았다. 우연히 아닌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것이 내가 음식은 손맛이 아닌 좋은 재료의 맛, 정성이 아닌 정확한 계량이라 생각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