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회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밴쿠버는 한 겨울에도 영상의 기온을 유지하기 때문에 눈없이 겨울을 나는 경우가 많다. 간혹 눈이 좀 온다 싶으면 도시 전체가 몸살을 앓는데, 주택 단지 입구가 언덕인 우리 집은 단지를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캐나다 동부가 한파에 폭설 기사가 계속 나오더니 서부인 밴쿠버도 며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결국 눈이 내리고 말았다.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 버린 눈을 보니 예전 우리 부부의 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 준 눈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2005년 1월, 밴쿠버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고 이틀간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도시 곳곳에 전기가 나갔고 우리 동네는 상수관이 터져 단수 사태가 발생했다.
아침은 간단히 해결했지만 점심때가 지나도록 물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밥을 할 수가 없었고 우리는 씻지도 못한 꾀죄죄한 모습으로 나가서 식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옆에서 엄마와 아빠가 주고받는 대화를 듣던 8살 큰 애는,
“오늘 점심은 내가 사줄게요. 나 돈 많아요.”
큰 애는 새해 첫날 친하게 지내는 주변 어른 집에서 세배를 하여 모은 돈과 그동안 책 한 권을 새로 읽을 때마다 아빠로부터 받아 저금한 돈이 약 80불가량 있었다. 아내와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큰 애를 쳐다보다 웃기 시작했다. 큰 애는 자기가 한 말이 거부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소리 높여 오늘 가족이 먹을 점심을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은채야! 정말 고마워. 그런데 점심은 아빠가 살 거야. 은채가 내지 않아도 돼”
하지만 계속 자기가 사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결국 큰 애가 점심을 사기로 하고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엄마가 이층에서 둘째의 옷을 입히는 사이에 큰 애는 자기 방에서 지갑을 가져와서는 나한테 조그맣게 속삭였다.
“근데... 아빠... 만약에... 돈이 모자라면... 아빠가 도와줘요.”
“은채가 가지고 있는 돈이 80불이 넘는데, 그 돈이면 우리 식구가 몇 번 나가서 사 먹을 수 있어.”
“정말요?”
큰 애는 자신 있게 점심을 산다고 했지만 내심 돈이 모자랄까 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아빠의 말을 듣고 안심한 큰 애는 다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고 지갑을 챙기는 나에게 큰 애가 소리쳤다.
“엄마! 아빠! 은채가 사는 거니까 지갑 가지고 나가지 마요.”
차 속에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은채에게 뭐 먹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은채야. 점심 뭐 먹을까?”
“엄마, 아빠 먹고 싶은 거요.”
“오늘은 은채가 사주는 거니까 은채가 먹고 싶은 것으로 말해봐.”
“음... 칼국수요.”
나를 닮아 면류를 좋아하는 은채의 결정에 따라 우리는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칼국수와 떡볶이로 우리 네 식구 모두 정말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은채가 사주는 칼국수라 그런지 정말 정말 너무 맛있는데”
엄마와 아빠가 이렇게 말하자 큰 애는 예쁘게 웃으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살아가며, 무언가를 통해 회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2005년 그때 그 눈은 밴쿠버 전역에 엄청난 피해를 끼쳤고 우리 가족 또한 일주일 간 정말 많은 고생을 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때 먹었던 칼국수와 아이의 환한 웃음이 지금까지도 눈을 보면 반갑고 미소 짓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