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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승철 Feb 24. 2023

다시 일어서자 10-1

그 당시 내가 내 아픈 과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도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도 진솔하고자 한다. 나도 이러한 힘든 순간이 있었다는 것,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두번씩은 일생에 고난이 오게 마련이다. 항상 행복한 인생이란 없다. 인생이란 희노애락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시련을 우리는 무던히도 이겨내도록 용기를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 나 또한 당시 그 순간이 너무 괴로웠다.


나는 모태신앙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내 중심에는 항상 신앙이 있었다. 세상에는 내 힘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특히 나처럼 부족한 사람에게는 더 그렇다. 나는 공부에서 1등을 해본적이 단 한번도 없다. 키도 작았으며 체격도 작아 키로 줄을 세우면 거의 5번째 앞에 있곤 했다. 하지만 나는 공군 장교로서 누구보다 씩씩하게 길게 군생활을 했으며 옥스포드라는 분에 넘치는 대학에서도 공부했다. 나는 그것이 항상 하나님께서 도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이룬 것이라는 교만과 자만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무리 잘나가는 사람이라도,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도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래서 높을때나 잘나갈때 교만할 필요도 없고 못나가고 낮은 위치에 있더라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높낮이가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그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앞으로 만약 큰 성공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항상 나를 낮추고 겸손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모든 것은 한순간이다. 그 당시 나는 돈도, 그리고 직업도 없었다. 몸과 마음도 성치 않았다. 하지만 몇달간 나는 조금씩 몸과 마음을 회복해갔다. 조금씩 밖에 나가 산책을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쉬곤 했다. 2월의 날씨는 추웠지만 입춘의 계절이라 봄기운이 조금씩 느껴졌다.


나는 이대로는 주저않을 수 없었다. 다시 어떻게든 일어나야 했다. 가진 돈이 다 떨어져 일을 해야 했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일을 하며 다시 일어나길 고대했다.


갑자기 일을 하자고 결정을 했기에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날 계약직이지만 세종시에 있는 연구소를 찾을 수 있었다. 건축과 도시를 연구하는 이 연구소는 국책연구소였다. 공고를 보니 스마트도시 정책 관련 연구원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지원사항을 보니 다른 공고들은 다 건축이나 도시를 전공했어야 했는데 이것은 정책전공도 있었다. 나는 당시 건축과 도시 전공은 아니었지만 도시 관련해서는 관심이 많았기에 그리고 정책과 법을 만드는 것이었기에 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종시는 지금 사는 곳과 너무 멀었지만 일단 지원하였다.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며칠 후에 서류를 합격했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면접 준비를 시작했고 스마트도시 관련 사업과 정책 사례들을 찾아보며 면접을 준비하였다. 당시 나는 정말 간절했기 때문에 열심히 준비하였고 다행히 합격하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은 이 자리는 사실 안에서 계약직으로 오래 일했던 분의 계약이 끝나자 이 연구로 다시 합격시키려 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간절했기 때문인지 면접에서 대부분 내가 말을 하게 되었고 내부에서도 뒤집을 수 없을만큼 점수를 받아 합격하였다. 다만 모든 학력은 블라인드였기에 그날 내가 합격하고 다들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첫 출근때 내가 옥스포드 대학을 나왔다고 하니 의문이 들었던 분들은 의문이 풀렸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연구소 근처에 원룸을 구하려고 했으나 남는 방이 없어서 연구소에서 25분쯤 떨어진 조치원에 집을 구했다. 월세가 25만원짜리였고 앞에는 군부대가 있었다. 시골 느낌의 이곳은 예전에 내가 군생활을 한 곳과 비슷했다. 나는 연구소에 있을 때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 필요할때는 야근을 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연구소 사람들은 너무 좋았다. 다들 정이 있었고 친절했고 항상 나를 챙겨주었다. 오히려 일을 하니 몸과 마음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국토부 연구과제였기 때문에 국토부 사무관들과도 함께 토의하면서 일을 해나갔다. 열심히 한 탓인지 조금씩 인정을 받게 되었다.


연구소 분들은 나에게 가족과도 같았다. 연구소 안에서 친구들도 많이 만들었고 함께 관심이 있는 연구 스터디도 하며 그렇게 재밌게 지냈다. 그렇게 안에서 사람들과 잘 지내고 열심히 일을 하다보니 위에서도 나를 정규직으로 만들고 싶어 하셨다. 나에게 여기서 쭉 있으면서 함께 일하자고 하였다. 나도 이곳이 마음에 들었기에 이곳에 있고 싶어졌다.


여기서 그렇게 3개월동안 나는 몸과 마음을 거의 회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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