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도 도대체가 아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원래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이해의 여지가 생기는 게 정상인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다.
작년 아이의 교실에는 어떤 교육적 목적과 가치가 있었는지 올해 새로운 선생님과 그 분의 교실을 보며 더 자주 묻게 된다.
내 아이는 늘 옳지 않다. 공동체 생활에서 아이가 교사를 힘들게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가정에서도 지나치리만큼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니까 아이가 교사를 힘들게 했다고 해서 교사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교사는 또 교사대로 어땠는가를 짚어내고 싶은 게 사실은 솔직한 내 마음이다.
아이가 어떤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너의 말을 증명해줄 증인을 데리고 오라는 교사. 그래서 데리고 오면 아이를 믿지 않은 것에 대해 일언반구 없는 교사. 늘 스스로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증인을 찾아 다니게 하는 것에는 어떤 교육적 목적이 있었을까.
회장 투표 때 자기 자신을 뽑지 말라는 교사. 이것도 잘 이해가 안되는데 더한 것은 자기 앞으로 나온 1표를 두고 스스로 뽑은 것인지 확인하고 그것을 다시 무효표 처리하는 교사. 역시나 공개적으로. 자기를 투표할 수 없는 규칙과 무효표 처리하는 과정의 목적은 무엇일까.
특수반 아동과 비특수반 아동을 동일시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교사. 교실에서 공공연하게 특수반 아동과 동일시된 비장애 아동은 어떤 마음으로 교실에 있어야 했을까.
나는 작년에 아이가 무엇을 배웠는지 정말 모르겠다. 처벌과 회피, 소외와 차별만 가득했다. 물론 모든 배움과 모든 교육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잘 알고 있다. 성인 학습자인 대학생들과 공부를 하다가도 마음이 상하고 태도에 화가 날 때가 있으니 다듬어지지 않는 초등생과는 더욱 그렇겠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얼룩지거나 무가치하지는 않다.
새학년 시작한 지 고작 일주일. 아이는 이미 존중어가 무엇인지, 예의를 실천한다는 게 무엇인지, 협동과 사랑, 신뢰라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학급 내 갈등 상황을 판단하고 처벌하기보다, 대화하는 장을 만들어주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는 이미 감동하고 있다. 시를 읽어주고 음악을 들려주는 선생님. 학급회장을 뽑기 전에 같이 선거에 대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주는 선생님은 굳이 설명을 보태지 않아도 어떤 교육적 목적과 가치를 지녔는지 알 수 있다. 감사한 일이다.
작은 아이의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이 어여쁜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아 너무 그리운데 어머님들은 이 시절의 아이를 만지고 사랑할 수 있으니 참 좋으시겠다고, 오늘도 더 많이 사랑해주자는 메시지에 마음이 동한다. 역시 감사한 일이다.
지독하게도 고달픈 학교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선생님들이 애써주고 계실까. 자라나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동시에 쏟아지는 학교 업무를 처리하며 매일이 얼마나 힘들까. 손이 덜 가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딱 수업만 하고 퇴근하는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아이들을 대하는 그런 무가치한 태도들에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게 내 아이 일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좋은 것만 기억하기로 한다. 아이가 일주일 새 넘치게 경험한 그 가치들을 통해 지난 날의 무가치를 잊고 잘 성장하기를, 그리고 그 성장 곁에서 나 역시 늘 아이와 함께하기를. 이 이상 바랄 게 없다.
새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써준 시를 보고 마음을 녹인다. 봄이 왔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