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는 흔적을 남긴다.
한 지인으로부터 나의 유년시절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분은 내가 참 잘 놀았을 것 같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리 잘 놀아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큰놈이 잘돼야, 집안이 잘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셨던 부모님. 그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적당한 생활통지표를 내세워 공부깨나 하는 큰놈으로 행세했던 나였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참 잘 놀아주셨을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내성적인 분이셨다. 반면 어머니는 수완이 좋았다. 그런 어머니 덕에 고향에서 장사가 잘되는 식당을 운영하던 우리는 경제적으로 살만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2학년때 오랜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남들보다는 이른 이별. 그러나 그 빈 자리는 돈 잘 버는 어머니 덕에 금새 채워지는 듯 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어느 여름날. 어머니는 식당을 하루 접자고 하셨다. 식당을 시작한 이래 단 하루도 식당문을 닫은 적이 없었던 어머니.
“니 막내가 불쌍하잖냐. 넘들은 방학이라고 바캉스도 가구 하는데. 낼은 우리도 하루 쉬고 어디 좀 가자”
다음날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는 물놀이로 온전한 하루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나들이였다. 며칠 후 나는 어머니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그날 나는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들며 참 많이 울었다. 한참이나 나의 이야기를 들어 주던 지인이 내게 물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더 없나요?”
나의 아버지. 표현이 서툰 당신은 약주라도 한잔 하시면 나를 안아주곤 하셨다. 모든 경제권을 가진 어머니에 비해 그런 아버지는 무능력해 보이기까지 했다. 거기에서 나의 기억은 한참을 멈췄다. 그리고 되살아난 기억 너머의 기억들.
나의 아버지는 가난한 벽돌공이셨다. 더운 여름날이면 어머니는 주전자에 미숫가루를 타서 내게 들려 주셨고 나는 설레는 발걸음으로 아버지를 찾았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연신 브로끄 벽돌을 찍어 내시는 아버지의 팔뚝은 신신파스의 광고모델 같았다. 그런 아버지와 그늘 아래에서 나눠 먹던 미숫가루는 꿀맛이었다.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당신은 내손을 잡고 자주 영화관을 찾았고 그때 봤던 이소룡이 생각났다. 여름날이면 나를 등에 얹고 강을 헤엄쳐 건너시기도 하고 어항으로 피라미 잡는 법을 가르쳐 주셨던 아버지. 투망 던지는 솜씨가 빼어나고 손재주가 좋아 새총이며 팽이며 무엇이던 직접 만들어 주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생각났다.
“많은 기억들이 유실되었던 것 같네요. 지금의 동완씨 모습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거예요. 어머니보다 아버님께 받은 게 더 많은 것 같네요.”
아비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아빠를 부르는 아이. 녀석의 소리에 뒤돌아 서서 미소 짓는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