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은 아이의 ‘놀이의 짝’이 될 수 있을까? 온달이 자주 하는 질문 중에 하나이다. 물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아이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놀이친구’ 어른이 있다면 그분에게도 권하고 싶다. 몸을 사리시라고. 왜냐고? 그런 어른의 존재가 내 아이의 놀이를 망치거나 빼앗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리액션과 무궁무진한 아이템으로 무장한 ‘놀이친구’ 어른과 함께 하는 아이들의 놀이. 여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놀이의 주도권을 어른이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아이디어를 어른이 제공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의 경험치에서 우러 나오는 놀이는 아이 혼자 노는 것보다 훨씬 재밌고 스펙타클하다.
아이들은 혼자서 놀거나 여럿이 어울려 놀면서 집중력과 창의력, 사회성 등을 키워 나간다. 아이 스스로가 다양한 놀이 상황을 연출해 내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삶의 기술을 습득해 내는 것이다.
간혹 아이들의 놀이현장을 들여다 보면 그들의 놀이판에서 새로운 놀이를 제시하거나 놀이의 주도권을 가지고 다투는 아이들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다양한 또래 집단이 함께 하는 놀이공간에서, 신체능력이나 놀이 경험의 차이에 의해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또래 끼리의 놀이(특히 영유아의 경우)안에서 친구들의 놀이를 구경하다가 갑자기 끼어들어 다투거나, 친구들의 놀이를 선생님에게 수시로 전달할 뿐 자신은 집중하여 놀지 못하고 산만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 아이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또래들의 놀이를 시시해 하거나 어른들의 주변을 맴돌며 ‘놀아줘’나 ‘심심해’를 연발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런 아이들은 쎄게 놀아본 경험이 많은 아이들일 공산이 크다. 어른이 아무리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놀아 준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놀이의 칼자루’는 어른들이 쥐고 있다. 이렇듯 또래 집단과의 놀이 경험이 부족한 반면 어른과의 놀이 경험이 많은 경우의 아이는 어른에게 의존하여 수동적으로 그 놀이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 아이들은 ‘놀아줘’와 ‘심심해’를 연발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또 걱정이다. 혹여 라도 오늘 온달의 이야기를 빌미로 ‘여보 봤지? 아이들하고 너무 놀아주면 안된다잖아.’라는 아빠들이 있을까 봐서다. 그런 분들께 말씀 드리고 싶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 대부분은 그런 걱정들 안하셔도 된다. 온달이가 걱정하는 아빠들은 이 세상에 그리 흔치 않고 그런 아빠들은 이 정도 들었으면 금새 알아차릴 분들이다.
온달이가 걱정하는 것은 과유불급이다. 놀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놀이’라는 모습으로 너무나 과한 ‘놀이체험’을 하게 될 경우를 경계하는 것이다. 특별한 놀이도구나 놀이환경(어른이라는 대상도 이 환경에 하나일 수 있다)이 주어지지 못하면 놀지 못하는 아이들. 놀아주는 어른이 없으면 놀지 못하는 아이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놀고 싶을 때 놀아주는 어른들 보다, 놀게 허용 해주는 어른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어른이 아주 많아얄 낀디. 거참 우짤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