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ssoud Jun Sep 20. 2020

우연한 여행 1

김미화 마을


*** 유럽 커피와 한국의 아메리카노


사실, 일부러 커피숍을 다니지 않는다.


 커피숍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도 익숙지 않고 업무 얘기를 하거나 그냥 커피 한잔을 위해 일부러 커피숍을 찾지도 않았다.


 만약 그곳이 다가 다리 아파 쉬어갈 수 있는 길거리 테라스에, 햇빛이 잘 들어 괜히 햇빛에 취해 한가하게 졸만한 곳이라면 모를 일이다. 괜히 지나다니는 사람들 곁눈질하며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릴만한 그런 공간이라면 행여 잠깐 멈추어 찐한 카페 알롱제 한잔에 물도 한 잔 들이킬지 모른다.


 유럽에서는 카페테라스에 앉으면 물 한잔을 가져다주며 주문을 받았다. 괜히 물 한잔을 쓰윽 비우곤 한잔 더 시키면 안 될까 고민해본 적이 많았다. 한국이라면 얼음물을 가져다 달래도 될 판인데, 유럽에선 그랬다간 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미소를 짓거나 친절하지도 않아 괜히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식당 주문에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하면 괜히 초조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노동은 하찮아서 물 더 달라, 가져다 달라, 이거 해 달라, 저거 해달라, 남의 노동을 경시한다고 생각했다. 사회가 그러하니 학생들도, 사회 초년생도 자연스럽게 자본의 못된 서비스 습성을 배운다고 생각했다. '돈 주는데 왜 안해줘?' 와 같이 값싼 돈에 우월한 갑질을 서스럼없이 저지르는 광경을 많이 보았던 이유였다.  


 한 프랑스 친구가 말했다. 한국은 서비스 천국에 밖에만 나가도 택시가 넘쳐나고(파리에선 택시를 줄 서서 기다려야 하고 어쩜 밤을 새울 수도 있다) 음식 밑반찬을 무한대로 달라니 믿을 수 없이 서비스가 좋은 나라!라고 극찬했다. 왜냐하면, 프랑스인들은 손님에게 웃을 이유가 없는 프로(직업군)들이라 서비스엔 미소를 팔지도 않아, 왜 그렇게 퉁명스럽냐고 물을 수도 없다. 오래 그곳에 살다 보면 그렇게 퉁명스러워지고 웨이터에게 미소를 줄만큼 유머를 가진 사람은 괜히 으쓱해진다. 그런 유럽의 카페에선 위대한 작가도 음악가도 미술가도 커피 한잔을 마시며 행인들을 구경하다가 졸았다. 웨이터들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들의 잠을 깨우지 않고 생활 먼지 가득한 노상 카페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그렇게 길들여진 유럽의 아메리카노 카페 알롱제는 한국에 와서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되었다. 맛도 다르고 잔도 달라 길들여진 맛을 찾을 수 없었다.


 비슷하게 투 샷에 물 반만 넣어 찐하게 흉내 내어 주문하면 어린 아르바이트생은 머그 컵에다 아메리카노와 다를 바 없으니 에스프레소 잔 세 배 정도 크기에 아담하게 물을 넣어 원액의 맛을 희석시키는 알롱제의 맛을 알 리가 없었다. 또한 노상 카페 웨이터가 주는 물 한잔의 의미가, 진하면 물을 타서 먹든가, 아니면 먼 길을 걸었을지 모르니 물 먼저 한잔 마시라고 주는 의미라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됐다. 그러나 커피 잔은 오랫동안 닦지 않아 물에 남은 석회가루가 컵에 달라붙어 유리잔이라는 것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햇빛 좋은 테라스에서 지나는 사람 구경하며 커피 한잔 마시고 싶었다. 넉넉한 시간에 산천을 바라보는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도로 가 여러 식당 간판이 지나가면서 식욕을 자극할 뿐, 딱히 내려서 들어가 볼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제 먹었던 안주가 아직 소화기 되지 않아 부푼 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오후엔 산행을 하리! 주변 산행 코스를 찾아보았다. 딱 좋은 코스가 있었다. 


김미화 마을 펜션을 올라가는 계단에 자란 풀
황혼에 물들어 가는 아름다운 가을 평원. 쌍령산 자락이 오른쪽으로 이어져 문수봉과 만나고 천주교 김대건 신부의 길과 만난다.


 내비게이션이 김미화 마을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카페를 스쳐 올라가자 펜션이 나타났다. 구조를 모르니 구경 삼아 펜션 구경을 나섰다. 계단 사이 아담하게 자란 풀이 일부러 둔 것인지 관리를 하지 않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평택에 있으면서 매일 출퇴근만 해서 몰랐는데 코로나 여파가 심한 모양이었다. 곧 관리를 하지 않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기웃거리다가 젊은 친구들이 숙박을 끝내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방마다 꽃 이름이 새겨진 펜션엔 가을의 전령인 꽃들이 조그만 정원에 피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정원이 좁게 붙어 있는 펜션과 어울려 사람들이 모이면 친밀해질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하며 천천히 둘러보았다. 객실에 손님들이라도 있었으면 분명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만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친구들을 제외하곤 한가한 펜션이 운영이 어려울 것 같았다. 코로나 때문이려나? 괜히 운영 걱정이 들었다.


 펜션이 있는 곳에서 카페가 내려다 보이는 배경으로 저 멀리 어디서 흘러온 물인지 조그만 물 길을 형성하고 있고 농부들의 땀이 서려있는 곡식이  수고에 보답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병풍처럼 그만그만하게 솟은 봉우리들이 가만히 대지를 감싸 안은 마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아 정겹고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도 어디선가 만났던 거 같아 그저 즐거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서서히 카페로 향한다.


 나는 긍정적이고 활동적이며 쾌활한 성격에도 한국에 와서 마음 놓고 사람을 사귀어 본 적이 없다.


 프랑스에서 20년 살았던 게 뭐 대수라고 프랑스와 비교하는 나를 보며 재수 없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뭐라 하겠냐만, 사람 사는 게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서로 모자라는 거 보살피고 다독거리며 사는 거지, 스무여덟 해, 남조선을 떠나기 전에 보았던 상부상조의 전통과 동네 형 동생, 아재 같던 정감은 없어져 버린 것 같아 삭막하게 돈 벌 궁리만 하는 사람들, 사기꾼과 꼭두각시를 추종했던 사람들, 신을 믿는다 하여 몸 바쳐 시간 바쳐, 돈 갖다 바치고 정신까지 바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도 뾰족하게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거짓말이 일상화되었을 뿐, 진짜 독하게 나쁜 놈 아니면 돈을 우상화하는 가진 놈이 되기도 어려웠고 그곳에 대차게 착취와 사기 등의 범죄가 허용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현실에 저마다 내가 더 난 놈이야 자랑하는 꼴이, 꼭 내가 더 충성스러운 노예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잘 나가는 학교를 다녔던 탓에 주유소를 하는 친구는 일일 백만 원을 번다고 만수르라 자랑했고 자동차 회사 감수를 맡은 친구는 고작 그렇게 산다며 겸손을 부리는 모습이 역겨워 토가 나올 지경으로 겸손을 부렸다. 경찰을 하던 친구가 프랑스에서 온 친구들 상대로 눈탱이를 치고 비즈니스 관계에서 만난 파트너가 계약이 이뤄지자 그간의 말을 완전 무시하고 뒤통수를 쳤다. 무서운 세상이었다. 외인부대에서 전쟁터를 다녔던 내게 한국에서 본 조선소만큼 지옥 같은 곳을 보지 못했고 한국 사람들만큼 비상식적인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마음 한 켠엔 무엇이 좋은 것인지, 어떻게 사는 사람이 좋은 것인지도 모른 채, 외국에서 경험한 인종차별이나 전투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한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서웠다. 그것은 내가 가진 삶에 대한 가치를 온전히 무너뜨리고 증오와 혐오를 불러들였다.


 타인과 다른 삶을 산 내가 가진 것은 다른 삶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삶이 나에게 군림하려 들고 길들이려 하며 자신의 삶을 가르치려 한다면 용서할 수 없는 노릇이리라! 한국사회엔 그런 것들이 만연했다. 부당한 것이 당연하다는 것으로 가르치려 들었고 권한과 위계로써 굴복시키려 들었다. 그곳엔 이해와 동의가 필요치 않은 명령과 지시로 이루어진 체계가 설령 옳지 않더라도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어 쉽게 익숙해질 수 없었다. 내가 다닌 외인부대는 천국이었다.


혼자 카페에 앉아 이름 없는 천을 바라본다. 오른쪽 위로 보이는 곳이 펜션이고 주차할 공간이 넓다. 분주한 주인의 발걸음을 기대했는데...


카페를 주문하려 들어가서 주문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카페를 지키는 총각의 대응이 의외였다.


"여기서 주문하실 건가요?"


"네? 영업하지 않나요?"


"아닙니다. 영업합니다"


"다행이네요. 그러시면 복숭아 주스 한 잔 주세요"


"여기서 드실 건가요?"


"네!"


대화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옆에 서 있는 여자는 우리의 대화는 아랑곳 않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고


"혹시 이 뒤편에 산이 있던데, 이 근처에 등산로가 있나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여자가 퉁명스럽게 말하곤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곧 주스가 나오고 나는 들판과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김미화 마을' 뒤편으로 펼쳐진 골프장 뒤편으로 구봉산과 달기봉 등산로를 확인했다. 여기서 나가면 주차할 장소를 물색하고 다녀오면 어젯밤의 폭식으로 짜구가 난 뱃살을 다듬을 수 있을 거라고 위로했다. 어딘지 몰라 한번 가볼 수 있을까 싶었던 티비 속 그녀, 고향 친구같이 익숙한 그녀의 익살스럽고 정다운 미소에 즐거웠던 마음 뒷편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과 산을 바라보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덜 깬 술은 침대를 찾았고 시간대는 밥을 먹어야 한다고 보챘다. 피곤함인지 배고픔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고뇌 속에 산을 탈지, 13시부터 입실 가능한 이미 예약한 엠티에서 한 숨 자고 일어나 올라갈지 복숭아 주스가 밑바닥을 보이고 더 이상 빨릴 게 없음에도 혼자 츄르릅 소리를 내는 빨대 소리에 괜히 멋쩍어하다가 일어났다.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로 본 프랑스와 한국의 의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