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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Jan 01. 2021

매듭을 풀다. 강귀분

어머니의 고백


“너그 아부지는 일본군이었재!”


 90이 넘어 아직도 정정한 소녀 같은 어머니와 내 어릴 적 고향의 얘기를 나누었다. 다섯 채 바닷가 마을, 한 번씩 폭풍우가 몰아치면 바닷물이 마당까지 차 올랐다. 어디선가 떠 내려온 부유물들이 폭풍우가 지나간 마을 해변가에 전리품처럼 쌓여 원시의 모습처럼 웅장하고 신비했다. 바닷가 초가에는 몇 마리의 염소를 길렀고 햇볕 좋은 날에는 걸터앉아 말을 타도 충분할 만큼 큰 나무를 베어와 껍질을 까먹던 보릿고개를 동심의 기억 속엔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로 기억했다. 아마존 정글 같이 우거진 뒷 산은 호랑이가 어슬렁거릴 만큼 굉장했고 대나무 밭은 동네 아이들 놀이터였다. 그때 어머니는 조그만 점빵을 운영했던 기억이 있었다..


“술집이었다!”


 그 조그만 몇 채 안 되는 마을에 무슨 술 집이었냐고 물었지만 거기뿐만 아니라, 턱구지, 새몰, 나리꼬지라 불리는 대부분이 술집이었다고 말했다. 조그만 마을의 포구가 있었고 사천, 삼천포가 지척이어서 어업이 유행해 각 포구에는 자연스럽게 술집이 들어섰다고 말했다. 어릴 적 기억의 파편들이 조각 모으기처럼 불현듯 하나둘씩 기억나 그때의 나이와 연관해서 물어보면 어머니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설명을 해주었다. 17살에 시집올 때, 아버지는 군인이었다고 했다. 해방 후의 국군을 생각하는데 대뜸 ‘일본 군인이었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마디 덧붙였다.


“이름 난 노름꾼이었어! 돈 한 푼 안 갖다 줬재!”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고 남 얘기하듯 했고 남 얘기 듣듯이 들었다. 자식들을 낳은 해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하는 얘기에도 어렸을 때, 가난했다거나 배가 고팠던 기억이 하나도 없을 만큼 억척스러웠을 어머니의 희생이 눈 앞에 그려졌다. 그런 어머니가 자랑삼아 말해준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그때 배웠던 일본말 아직도 기억해!”






*** 매듭을 풀다


매듭을 풀다 표지

 

  

 프랑스 파리에 화랑 축구협회가 있어 한 번씩 가면 그다지 눈에 띄는 플레이어도 아닌데 배 나온 쌀집 아저씨처럼 뛰어다니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는 중원을 지배하고 골을 넣은 선수보다 더 기쁘게 선수들을 지배했지만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어쩌다 한인회가 모두 모여 경기를 하는 5월 1일 노동절을 기회로 토너먼트를 펼치면 등장해 큰소리로 그라운드를 누볐지만 그 팀이 결승에 오른 적은 없었다. 대신 외인부대 팀은 젊고 혈기왕성하게 우승한 적이 많았고 골키퍼는 내 차지였다. 원체 뛰어난 체력과 훌륭한 선수들이 많았던 탐이라 이쪽으로 넘어오는 공이 별로 없어 골대 가운데 턱을 괴고 누웠다가 한 번씩 공이 오면 별일 아닌 듯 막아내는 꼴이 우스웠던지 쌀집 아저씨는 ‘절마 저 뭐 하는 놈이고?’라고 하는 비난을 건네 들었던 적이 있었다. 쌀집 아저씨는 고등학교 3회 선배였고 경제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코로나로 시작한 2020년 한 해 마무리를 코로나로 끝내야 하는 우울한 시대에 망년회를 기념으로 만나지도 못했는데 선배 장모님이 에세이 집을 출간했다며 소개를 해주었다. 오랫동안 잡지 않았던 책은, 한 두 페이지 읽어보고 술술 읽히면 끝까지 읽고 아니면 금방 포기하는 성격이긴 해도, 한 세대 앞서 살았던 부모님들의 세계를, 그것도 어머니의 세계를 듣는다고 생각하니 호기심이 생겼다. 영화나 드라마의 세계는 그럴듯한 상황이라 해도 체감하는 온도가 달랐다. 그것은 일제 치하를 살았던 부모님 세대가 전쟁을 경험하고 나무껍질을 먹어야 했던 보릿고개를 지나온 얘기를, 휴대폰으로 세계정세를 판단하고 필요하면 세계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현실에선 너무나 괴리감이 느껴지는 얘기였다.


 일제 치하는 경험해보지 않은 세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독립운동에 대해 알 수 없을 것이고 일제 앞잡이가 되어 이웃의 처자식은 물론, 한국의 혼을 상납했던 친일파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어떻게 알겠는가! 군부 독재 시절엔 일제 치하에 모자람 없이 잡아서 고문하고 사회로부터 고립시켜 연좌제의 괴물이 된 희생양들의 고통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일본 군인으로서, 온전하게 일제 교육을 받았을 아버지가 미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한국의 통일과 일제 청산에 관심이 없던 미군정 하에 국군으로 거듭나고 친일파들의 명령을 받았던 악몽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난 전쟁이 풀 수 없는 매듭처럼 꼬여 있는 한국 사회였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현실로 와 닿지 않는 얘기들이었다. 그렇게 자상하던 아버지가 일본 군인이었고 노름꾼이었으며 세상에 둘도 없는 내놓은 자식이었다는 사실을 어머니로부터 듣기 전까지…… 그토록 싫어하던 아버지 상이 아버지였다니! 아버지는 6.25 참전 상위 용사였다. 우리 가족이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은 유자녀가 된 그 이후의 삶은 익히 알아왔으므로, 부모님 시대에 엮인 역사가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안 것은 오래되었다.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고 어제 책을 받았다. 출간하자마자 보려 했는데 크리스마스가 겹치는 바람에 하나는 주문 취소하고 빨리 올 곳에 주문했지만 결국 두 권의 책이 동시에 도착했다. 주문 취소를 취소하고 하나는 차에 두고 하나는 내일 읽을 생각으로 책상 위에 두고 피곤한 나머지 일찍 잠자리에 들어 새벽 세시에 깨고 곧장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잠깐 덮어두고 출근을 했더니 정신을 어디다 두었는지 출입증 카드를 두고 왔다. 오후에 출근하겠다고 집으로 돌아와 마저 읽기 시작했다. 오후 한 시까지 현장으로 가는데 하필 들었던 골목 지름길 가운데, 식당 차가 움직이지 않고 섰고 줄을 선 차들이 빵빵거려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 나가 멱살을 잡는 대신에 회사에는 결근한다고 통보를 하고 책을 들고 나머지를 읽었다.


 [매듭을 풀다]는 딸이자 아내이며 어머니이자 할머니의 이야기다.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남자들과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각 시대별 시선으로 따라 읽어간다.


작가 강귀분


 7살 난 천둥벌거숭이 여자 아이가 전쟁도 이념도 남의 땅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만주, 중국 공산당을 피해 도망친 평양, 개성 피란 길에서 바라본 엄마의 희생과 무조건적인 사랑,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다루었다. 열 명의 자녀를 낳은 어머니는 소처럼 일만 하고 감시와 통제 속에 존중받지 못했던 종갓집 며느리에게 강요된 전통은 소 한 마리보다 못했다. 딸의 시각에서 바라본 아버지, 아버지의 첩, 아버지에게 심적으로 버려진 모녀는 공산화되는 중국 땅에서 탈출하면서 아버지에게서 리더십을 보고, 어린 딸아이는 평생 아빠에 대한 증오가 매듭으로 남았다.


 그 매듭은 스물 다섯 해, 명문가 8남매의 종부 자리 며느리로 들어가 1년에 열세 번의 제사를 모시며 부엌데기처럼 산 인생에 찾아온 아이들, 암울했던 독재의 시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고문당한 아이들을 찾아 나선 엄마가 마주한 서슬 퍼런 경찰서에서의 목숨 건 절규 속에 어머니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통곡의 세월호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 무너진 한은 회한, 이윽고 사랑도 애틋한 연애 감정도 없이 평생을 함께한 남편의 죽음 앞에 의연하게 선 동반자로서 용서와 사랑으로 매듭을 푼다. 어린 시절 직접 겪어 가슴에 쌓인 아버지에 대한 한은 그러나 독립군의 핵심 거점이었던 곳과 가까워 독립자금을 대고 이주해온 조선인 이민자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자립을 도왔던 훌륭한 아버지였음을 사촌 형부에게 전해 들었다고 한다. 가슴이 먹먹하다.


 이야기는 다시 흑백 영상처럼 남루한 거지차림의 가족과 피난민 무리들이 남의 말 같은 조선, 압록강, 팔로군, 광개토대왕비, 평양을 보여주며 엄마가 딸의 옷 깃에 바느질로 숨겨놓은 비자금을 조심하라는 신신당부에도 강에서 멱을 감고 종아리를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송악산을 지나 개성으로 돌아온 긴 피난길 속 난민들이 남루한 차림으로 지쳐 밥 짓는 연기를 유년 시절의 가장 황홀한 추억으로 기억한다. 그 폐허 속 피어올랐던 연기는 새로운 도시, 국가를 건설하는 희망이기도 했으니! 이야기는 다시 아득한 세월을 지나 노년의 백발이 된 할머니가 미국에 가서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 다양한 인종들을 바라보며 화려하고 선명한 색체를 지닌 할리우드 영화의 영상처럼 변했다. 자유의 섬, 세계의 인종들이 모여 자유를 누리는 곳에서 전쟁과 기아를 극복한 한국인이 그들에게서 느끼는 자유는 긴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먹먹한 가슴이 화려한 봄날의 햇빛처럼 향긋하다.


 이야기는 의심 없는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서 삶을 동시에 보여준다. 인민의 눈물이자 아편이라는 종교를 불신하는 독자로써 읽는 내내 불편했으나 신앙인들마저 불신하지 못하게 하는 진실된 마음을 느낀다. 옅어지고 약해지는 마음을 쓰다듬어 위로해주었던 주님에 대한 신념이었으리라!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신앙인들의 믿음을 먹고 산다는 생각에 쓰라린 가슴이 참된 신앙인의 숭고한 정신 앞에 숙연해진다.

 바쁜 현실을 살아가는 이 전문화된 정보화 시대에 옛날 얘기를 꺼내며 ‘우리가 산 시대’를 주관적으로 가르치려는 사람들은 모두 꼰대가 되는 시대다. 어른들의 해방과 전쟁이 너무나 멀리 있어서 그때 그렇게 배곯고 어렵게 살았다는 얘기가 먹을 것이 넘쳐나고 사람의 가치가 음식 하나, 배달료 몇 천 원으로 평가절하되는 시대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말인가? 그러나 그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처절하도록 진실된 고백 속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한 가정의 역사와 한 개인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 속엔 나만 살겠다는 이기적이고 오만한 관료의 권위라곤 찾아볼 수 없고 사람 사는 정과 존중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어머니는 왜 그랬을까?

좋아하는 박완서의 글들을 읽을 때마다 남의 얘기처럼 정답게 물 흐르듯 읽혀 한 편의 드라마를 본 것처럼 흡수가 되어버리는 스펀지라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된 것처럼 강귀분 작가의 글은 여성의 입장에서 직접 겪는 것처럼 인식된다. 세탁기의 발명이 여성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는 어머니나 누이가 흐르는 개울가에서 손을 불어가며 했던 빨래로 하루 종일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 직접 보고 각인해 왔던 여성을 대표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다른 여성작가들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던 여성으로서의 삶이, 전통에 강요당하여 어떻게 희생당하며 살았는지, 그때 어머니는 왜 그랬을까? 남자가 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강요당한 어머니의 희생이 얼마나 몰상식했는지를 비로소 이해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결코 닮지 않겠다던 어머니의 무한 인내심과 뿌리가 깊이 박힌 나무처럼 흔들림이 없던 의연함을 반의반이라도 닮았더라면 좀 더 지혜로운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맨손으로 이루었던 재산도 다 잃고 아끼던 애첩도 떠나보냈다. 충남 두계역 근처에 살던 이모부에게 믿고 맡겼던 살기에 충분한 재산도 이모부의 배신으로 다 빼앗기고 빈손이 되었다. 명석하고 당당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던 무서운 아버지는 허깨비같이 얼이 빠져 초라하게 늙은 노인으로 남았다.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가문의 명예도 자존심도 소원하던 아들도 쓰나미같이 격동하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다 쓸려가고 폐허만 남았다.


중략


어머니는 열병을 앓다가 털고 일어난 사람처럼 꺾일 듯 수척해 보였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강한 영혼을 가진 분이다. 노년의 어머니는 인생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간장이 타 들어가던 젊은 날보다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속이 썩는다고 죽지 않는다.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문을 걸던 어머니의 말씀이 영험 한 예언이 되어 만고풍상에도 살아남았다.]


라고 작가는 고백한다.

폐허가 된 것을 지탱하며 집안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고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어머니였으며 딸이었음을 책을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어려운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의 독백이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를 만나 세상에 나왔다. 다 풀어놓지 않은 얘기인 듯 절제된 문장, 자식들 다 잃고 아내마저 잃어 세상만사 다 해탈해버린 렘브란트의 초상화처럼 후덕하면서도 욕심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의 미소가 곱다. 교복을 입고 수더분하고 부끄러운 시골 학생 사진을 걸어 놓고 강귀분이란 이름을 세상에 내놓았다. 손자를 안고 세상 행복한 팔불출 웃음을 짓는 초로의 노인이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얽히고설킨 옛날이야기를 매듭을 풀고 고백하듯 독자에게 건넨다. 


가브리엘 천사와 함께


 책을 모두 읽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작가가 만약 아직도 만주 땅에 남아 있다면 지금은 중국 조선족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만났던 조선족들의 순박한 시골의 이웃 같던 사람들은 그러나, 중국인임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한국 사람들, 북한 애들로 부르는 그들의 정체성에 놀랐었다. 그들 중에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국력이 약한 나라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우리 말과 전통을 지켜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기도 전에, 한국 사람들 공동체에서 밥벌이를 하면서도 중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너무 강했다. 100년의 세월, 중국 교육을 받은 그들 이 말하는 역사에는 중국 인민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여한 자부심은 있어도 동포라는 인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을 보고 필자가 겪었던 가장 큰 충격은 백두산을 방문하는 후진타오 환영식에서 한복을 입고 북한 인민들처럼 꽃을 흔드는 데 있었다. 고구려를 중국 역사라고 주장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인데, 유럽이나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일하면서 ‘니 하오’ 소리만 들어도 불쾌해지는 내게 중국인 소리는 모욕이자 수치였다. 중국인이나 중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단지, 중국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일제 강점기 비참한 한민족의 심정이 이제 자발적 남의 땅, 남의 민족이 되어 흩어진 매듭은 어떻게 풀 것인가?


강귀분 작가의 매듭에서 그 매듭을 풀 수 있는 지혜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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