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급하게 빨리 갈 수도 있고 현지 상황을 봐야 하기 때문에 무작정 기다릴 수도 있다고 책임자가 말했다. 비자를 신청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느닷없이 월말 김어준의 피디에게서 연락이 왔다. 외인부대 관련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3인 구성으로 협의되고 공수, 보병, 기갑 쪽 사람들을 수소문해 보았다. 몇몇은 연락이 안 되고 한국에서도 공수부대 출신이었고 외인부대에서도 공수부대 출신이었던 사람은 가볍게 무시했다. 그러나, 최근에 어떻게 어떻게 연락이 닿은 선배가 있어 인터뷰 요청을 전달하니 참여하겠다고 했다. 필자의 알제리 행으로 인해 인터뷰 일정은 빨리 결정되었다. 간략한 네 개의 주제는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제대 후, 연락이 닿지 않았고 친하지도 않았던 선배를 만난 것은 서울 어딘가에서 청소 용역회사를 설립하면서 사무실을 방문했던 적이 벌써 10년도 된 것 같았다. 꽤 많은 직원들이 있는 사무실 회의실에서 선배는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플랜과 비전에 대해 영상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러면서, 곧 열릴 회사 창업식에 초대할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날 곽상도 의원도 오고 여러 연예인들도 오기로 했는데, 야, 벌써 자리가 다 차서 더 초대할 수가 없네! 좀 빨리 연락이 됐으면 좋았을걸!”
그의 표정과 언행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외인부대 제대 후, 외인부대 추천으로 한국 르노에 입사해 오래 근무했고 퇴사 후, 설립한 회사가 청소 회사였던 것이다.
필자가 기억하는 그는 언제나 잠이 모자랄 만큼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 피곤함은 그가 얼마나 모든 일에 열성적이며 진심이었는가를 보여주는 표시였다. 특히 항상 부어있는 눈은 그의 노력이 얼마나 잠이 부족할 만큼 열정적인지를 즉시 알게 했다.또한 그는 부드러운 마인드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쓴 소리나 싫은 소리, 욕설을 내뱉거나 성질을 부리는 것도 없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 나를 자기가 외인부대에 합격시켰다고 소문을 내고 다니면서 자신의 말만 잘 들으면 된다고 말한 것을 아직도 기억했다. 나중에 그가 속했던 보병 연대로 발령받아 갔을 땐, 그의 수족처럼 말을 잘 듣던 자칭 조폭 출신이 [선배의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공격한 적이 있어 싸울 뻔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논란이 일자, 아니면 말고 식으로 넘어간 적이 딱 20년 세월이었다.
홍대입구역 팟빵홀
최근에 연락이 온 선배는 느닷없이 세상 좋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야, 이번에 호반건설에 땅 팔면 외인부대 애들 싹 모아 파티 한번 하자 응? 내가 명색이 선배가 돼 갖고 그 정도도 못해주겠냐! 근데 이 새끼들, 그 10억, 얼마 안 되는 돈 자꾸 깎으려고 별 짓을 다하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데 술이나 마시자!”
세상 사람 좋은 미소를 날리며 옛 일을 까마득하게 잊고 뭐가 잘 되어가고 있다니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그의 말은 하나도 신뢰가 가지 않아 웃으면서 흘려 들었다. 그의 얘기는 장황한 다큐멘터리로 애들 가르치는 듯 했다. 상대의 흥미여부는 중요하지 않은 모양인지 중간에 자르지 않으면 멈출줄을 모르는 영양가나 흥미 없는 얘기들이 대부분이었음에도 전에 없던 미소와 살가움에 뭔가 아쉬움의 냄새가 짙었다. 만나자고 불렀으면서 파하는 자리에서 계산을 하지 않는 것이 눈에 훤해 먼저 계산을 하고 나왔다. 며칠 뒤, 내게 5천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잘 나갈 때 연락 한 번 없더니 갑작스러운 간드러진 미소와 친절함에 숨은 의도를 발견한 것이 벌써 5년 전이었다.
한 번은 내 글을 읽은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왜 비난하는 글을 쓰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거나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우위를 누리려는 사람들의 의도를 간파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내게 보여주는 모든 것은 악의로 가득 찼을 뿐, 선의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는 유튜브를 만들어 내게 보내곤 했는데 샹송이나 오래된 가요, 백학을 불러 내 의향을 묻곤 했다. 1970, 80년대식 편집에 실소를 금치 못했음에도 친근한 접근이 고마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면서도 유치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최근에 만든 유튜브로 만든 설악산 촬영 편집을 보내주자 ‘잘 만들었다’면서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
미적미적 옷을 챙기는 모습이 내가 대기업에 다니고 선주사들과 계약도 맺어 잘 나간다는 얘기를 누구에게 들었는지, 그의 살가운 접근이 다시 돈을 빌린다거나 아쉬운 소리를 할까 싶었지만 행여라도 오해를 할까 싶어 불길한 생각을 거두었다. 거두절미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새롭게 연락이 와 예전에 좋지 않았던 오해를 풀 수 있다면 좋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엔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명색이 르노 삼성에 안전, 보안 어시스턴트로 일했으면서도 손님 접대를 수도 없이 받았을 덴데, 나를 대하는 언행이 느닷없이 친절하고 자상하기만 했을 뿐, 돈을 아끼려 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마련한 자리가 모욕을 느낄 정도로 허술했으므로 두 번 다시 자리를 하고 싶지 않은 생각에 불쾌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월말 김어준에 초대해 외인부대 얘기를 듣는 것이 이로울 것 같았다.
팟빵 홀 앞에서 주차할 자리를 탐색 중인데 눈길이 마주친 화사한 얼굴로 미소를 날리는 최욱이 연신 하얀 이를 드러내고 입이 귀에 걸린 채 인사를 했다.
그는 1시간 전에 만나기로 했던 것보다 30여분 늦게 나타났다. 커피 한잔을 마시는데 최근까지 간드러진 모습은 사라졌다. 얼굴에 표정 변화 없이, ‘어 그래!’, ‘그래, 그래!’ 마지못해 예의를 차린 말투가 툭툭 끊어졌다. 얼마 전에 다녀간 파리 한인회장이 외인부대 출신이었고 둘이 만났다는 얘기를 하면서 “야, 너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래 흔들면서 학을 떼더라!”라고 말하곤 고개를 숙여 양복을 괜히 털었다. 남이 곤경에 처하면 최대한 활용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한 순간에 드러난 오만함이 예의를 차린 언행에서 드러났다. 파리 한인회장이 된 친구는 내게 가장 소중하고 고마웠던 친구였지만 조선족 관련하여 멀어진 지 오래였다.
그는 차에서 오늘을 위해 준비한 상사 계급이 달린 외인부대 외출복과 유튜브에서 소개하던 두꺼운 앨범을 꺼냈다. 어깨에 잔뜩 힘을 넣고 걸음걸이도 느릿하게 얼굴에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수시로 옷매무새를 만지며 팟빵 홀로 들어섰다. 입구엔 처음 본 PD와 작가가 나란히 서서 기다렸다. 어쩜 그렇게 잘 어울리는 비슷한 키와 체형이 둘이 자매인지, 부부인지 어찌 서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야위었다. 최근 드론을 배우고 편집을 하면서 단 일주일 만에 몸의 모든 근육이 사라지고 다리엔 힘이 빠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직업상 운동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다.
*** 오만한 마쑤드씨!
팟빵 홀 내는 페인트를 입힌 벽돌 덕에 경찰서 지하 감옥을 연상할 만큼 어두웠다. 사진 촬영팀과 사진을 찍고 스튜디오로 들어가니 넓은 테이블에 의자가 편했다. 나는 작가와 김어준이 잘 보이는 테이블 가에 자리를 잡았다. 선배는 앨범 속 사진들을 피디와 작가에게 보여주며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하다가 작가가 “맞아요! 얼마 전에 유튜브로 보다가 이 앨범 사진들과 같은 사진 보여주며 설명하는 영상의 주인공을 섭외하려 했는데, 혹시 그분이세요?” “네, 맞아요” 내가 대신 답했다. 계속되는 앨범 설명이 이어지는 사이, 김어준이 들어왔다.
대학로나 충정로 벙커나 여러 번 가서 보고 즐겼는 데다, 뉴스공장과 다스뵈이다는 진실을 보고 듣고 말하게 정리해주는 정점으로써 유쾌한 공연과 같았다. 수꼴 쪽 마이크들이 거짓 정보를 생산하거나 증오와 혐오로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것과는 엄연히 달랐다. 김어준은 숨겨진 음악 고수들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미술, 연극,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가감 없이 건전한 데다 정치적 음모술수가 판치는 곳에서 예리하고도 정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했으므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혜안이었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를 끝내고 녹화에 들어갔다. 그의 이름은 외인부대에서 ‘아옹’으로 불렸다. 나는 모든 이름을 이미 마쑤드로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마쑤드로 칭하기로 했다. 김어준은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외인부대를 지원하는지를 아옹에게 질문했다. 그는 역사부터 알아야 한다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아옹은 남들이 관심 없는 얘기에도 혼자 취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습관이 있었으므로 중간에 자르지 않으면 그칠 줄을 몰랐다. 다행히 김어준은 그런 내용이야 인터넷에 찾아보면 된다면서 궁극적인 질문을 했다. 이어,
-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
- 최강의 군대에 입대하여 최고가 되고 싶은 사람들,
-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
-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
네 가지로 구분하여 다큐멘터리처럼 설명을 시작했다. 이윽고 지원병에서 합격 후, 교육대에서 받는 4개월 교육을 너무 힘들게 묘사하여 내 기억과 달랐으므로(신병 교육대는 유치원 수준이다) 병장 교육이나 중사 교육받은 얘기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정색을 하면서 교육대 훈련을 힘들다고 말했다. 같은 곳에서 교육을 받았음에도 경험에 대한 기억의 표현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그의 얘기에 귀 기울였다. 그는 외인부대 생활을 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묻는 질문에 ‘달리기를 잘해야 한다’고 말해 김어준이 웃었다. 그 많은 요소 중에 ‘달리기’라고 말한 것은 체력이 좋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것을 가장 주요한 포인트로 뽑았다.
아프리카 챠드의 양치는 소녀들
나는 외인부대를 4전 5기로 합격했었다. 3번째 지원했던 때, 병장이었던 아옹을 오바뉴 사령부에서 만났는데 한국인들 통역을 해주었으므로 고마운 대접을 받았던 셈이었다. 그럼에도 세 번째도 탈락하게 되었고 탈락 절차를 밟는 와중에 “세 번씩이나 와서 탈락했는데 당신 같으면 이해하겠냐!”며 독일인 상사 앞에서 책상을 들었다 놨다 했던 얘기를 했다. 상사는 어딘가로 전화를 했고, 선별자 중대로 돌아오자 “내가 게슈타포 전화해서 괜찮은 놈이니 합격시켜 달라고 했어! 앞으로 내 말만 잘 들으면 돼!”라고 말했던 것이다. 세상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며 뜻이 맞으면 몰라도 “내 말을 잘 들으면”이란 전제로 그가 가스 라이팅을 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물론 마지막 말만 빼고 그 얘기를 김어준에게 했다. 외인부대는 행정 교육을 받지 않으면 잘 모르는 분야가 두 개 있는 얘기를 했다. 하나가[군인 신분 조정(RSM;Régularisation de Situation Militaire)]과 [제대 시, 품행 방정 증명서(CBC; Certificat de Bonnes Conduite)]를 받는 것인데 꼭 알아야 하는 기본 상식이라 생각해서 설명하자 김어준은 호기심을 발동했다. 그러나 제2 외 인공 수연대에 자대 배치를 받고 갑작스러운 무릎 이상으로 이후에 ‘고문관’이 되었다는 말을 하면서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리 얘기들을 준비하지 못한 후회가 밀려오면서 이야기는 전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렀다.
아옹은 이름을 바꾸는 것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했다. 그리고 내가 탈락하던 때, 선별 중대에서 자신이 지원자들을 위해 한국어 번역을 하고 있었는데, 게쉬타포로부터 전화가 와 나에 대해 물었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다면서 그것이 합격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파리 시내의 모든 곳을 다니면서 나를 합격시켰다고 자랑했으면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때 그는 나의 불합격 원인이 물렁뼈였기 때문이라고 통역해주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진주의 복싱 체육관에서 코치를 하다가 외인부대 지원했던 터라 체력, 달리기, 전투력 등에 자신이 있었다. 그 의도대로 외인부대 신병 훈련소는 애들 장난에 불과했지만 훌륭한 신병이 한번에 몰락했던 것은 바로 달리기를 못했기 때문에 그의 말에 공감했다. 외인부대는 그런 곤란함으로 부대원을 곤경에 빠트리거나 동료들도 비난하는 일은 없었다. 달리기를 못하게 된 배경엔 제2외인공수연대에 자대배치를 받고 아침 구보 도중에 무릎에 갑작스런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았던 3년 6개월 짬밥 동안 고문관으로 고생했던 기억이 끔찍했다. 왜냐하면 외인부대는 달리기만 잘해도 인정받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아옹은 외인부대 제대 후에 외인부대로부터 세 곳에 채용 제의가 와서 결국 한국의 르노삼성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김어준은 내게 그런 아옹이 부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처럼 살고 싶은 생각도, 부러울 것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묻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신에 존중은 하되 전혀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서서히 아옹이 외인부대로부터 제의 받은 세 곳 모두 남들이 듣기에 대단해도 보안과 안전에 관한 일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자질과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그런 제안은 대단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에서 월 2천 유로 이상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는 것을 의미했다. 외인부대 제대 후, 그런 자리를 제의 받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스스로 헤쳐 나가야했기 때문에 나는 전혀 부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증오했었다. 그런데 그 증오한 이유를 세월이 지워버렸던 것이다.
김어준은 느닷없이 나에게 “오만한 마쑤드 씨”라고 불렀다. 그리고 외인부대 생활 동안 목숨을 잃을 뻔한 전투경험에 대해 물어왔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서아프리카 코트 디보아르 쿠데타를 제압하기 위해 상륙함을 타고 프랑스 해군 특수부대(부르키나파소에서 한국인 인질을 구출했던 부대)와 프랑스 보병 연대와 함께 대서양에서 대기하던 1개월 동안의 여정에 대해 얘기를 하려고 했다. 제2외인보병 연대 1, 3중대가 주력 부대가 되어 상륙을 기다리면서 카보베르데라는 섬에 상륙해서 외출을 얻었는데, 그곳에서 현지인들과 외인부대 2개 중대가 육박전을 벌였고 상륙함으로 돌아오는 와중에는 높은 산등성이를 차지한 현지인들이 돌맹이를 던져 많은 부상자가 나왔던 경험이었다.
외인부대 생활동안 전투로 인해 전사한 동료는 없었다. 장갑차에 끼였거나 민원 봉사 나갔다가 쓰러진 나무에 깔려 사망했거나 사격 후, 총기 확인하면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현장을 전해 들은 것이 전부였다. 또한 분쟁 지역인 아프리카에 가서, 미라쥬, 라팔 전투기, 전투 헬기와 수송 헬기, 수송용 차량을 가진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일 어떤 아프리카 군대도 없었다. 내가 배운 프랑스 군대는 복지가 훌륭하고 인권이 살아 있으며 매일매일이 여행 같이 즐겁고 신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역에서 알카에다니 보코하람을 상대로 대테러 작전을 펼치거나 쿠테타를 제압하는 작전을 펼치는 것에 대해, 아주 작은 상식만 가지고 있으면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학군과 일본군의 전쟁보다 더 심한 원시인과 첨단 무기의 전투를 전투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한 두명의 사상자가 생겼으나 그것은 외인부대의 수준을 그만큼 낮췄음에도 그들에 비해 강한 군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이 준비되지 않았던 탓에 꺼내지 않았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일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나는 스튜디오와 김어준, 아옹이 잘 보이는 자리에 느긋하고 앉아 정말 여유롭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자세를 보고 그렇게 말한 것으로 이해했다. 외인부대 제대 후에 퐁피두 센터 앞 광장에서 초상화 화가로 잠깐 활동했다. 이윽고 프랑스에서 유명한 프랑스 자전거나라 가이드와 지점장을 경험하며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들과 프랑스의 내면 깊숙한 지식을 습득한 자부심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말이 허황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지 김어준의 표정에 실망이 서리고 어투는 듣기 싫으니 ‘그만 하시고’, ‘됐구요’와 같은 말이 들렸다.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팟빵홀 월말 김어준 스튜디오
나는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고 사람들도 그렇다고 했다. 오랫동안 달변이라 생각하면서도 한국에 온 이후로는 말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최근에 평택 삼성반도체에서 계속되는 야간작업에 몸과 마음이 지치는 것은 물론, 의식까지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계속 받으면서 이런 생활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활에 빠져 살았다. 책을 가까이 할 여유도, 사람들과 다양한 소재로 대화할 만한 사람들이 없을 만큼 주변이 삭막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게 달변이던 나는 자신감과 논리를 상실해가고 있음을 확신했다. 또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나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사람들의 어투가 김어준이 말하는 어투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속절없이 의기소침하게 만들어 많은 할 얘기들을 막아버렸음으로 그만큼 나 자신이 가소로운 사람인지를 자문하게 만들었다.
나는 언제나 웃으면서 말을 했다. 표현이 문학적이었지만 어휘에서 사투리를 들키지 않으려는 표현력에서 드러나는 사투리가 꼭 모자란 사람이 얘기할 때의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무엇보다 대화를 즐기며 친근감에 상대방을 비하하는 언어들이, 그 표정들이 비웃는 듯 하여,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지만 악의가 없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는데, 상대방은 자신을 비하하고 비웃어 곧장 나를 공격하는 언행을 표현했었다. 그 표현을 김어준에게서 발견하자,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 과거의 기억
외인부대는 급여는 프랑스에서도 최저 시급 수준(우리나라와 비슷)이지만 동구권, 아프리카 지역 출신들에게는 급여가 1년 연봉에 달한다고 했다. 외인부대 구성이 동구권과 러시아가 주를 이루고 있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들의 자질이 대단했고 인성도 훌륭했음으로 외인부대를 구성하는 [국적, 인종, 종교가 무엇이든 가족과 같은 연대의식]이 외인부대를 지탱하는 주요 정책이었다. 복지와 군 시스템적으로는 ‘선진국이란 이런 곳이다’라고 느꼈고 그 이름으로 세계 오지를 다니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런 외인부대 생활 말년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는데, 아프리카 지부티 파병 후 부대 복귀가 8일 늦었고 복귀한 날, 곧장 영창으로 향했다가 며칠 후, 중대장 대동 연대장 징계 면담시(20일 영창 이상 시, 연대장 명령권) 40일 영창을 명 받았었다. 이후, 어떤 사유를 들어서든 중대장은 내게 40일 영창을 3번 연속으로 내렸는데, 이유는 8일 탈영이 이유가 아니라, ‘군인 신분 조정(RSM)을 권한 없는 중대장이 거부한 것에 대한 반항으로 “중대장 까르도나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이유였다. 그렇게 영창 생활이 길어지던 와중에 아버지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고 영창에서 식음을 전폐하자 의가사 제대 명령이 떨어졌는데 그때 까르도나는 이렇게 물었다.
“아옹 중사를 알고 있나?”
IMF 이후에 한국인들이 많아졌다고 해도 연대 병력 1.300여명 중에 25명에 불과한 한국인들 중에 유일한 부사관을 모를 리도 없겠거니와 그걸 왜 묻는지 궁금했다. 징계를 받기 위해 차렸 자세로 오래 서 있으니 온 몸이 떨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알고 있습니다”
“아옹이 너에 대해서 말해줬어! 은혜도 모르는 나쁜 놈이라더군! 나는 너의 약혼녀가 부대 방문을 왔을 때, 하루 특별 휴가를 주어 만나게 해 주었어! 게다가 지부티에서 상관에게 하극상을 했을 때도 관용을 베풀었는데도 이렇게 배신하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과연 너를 경험해보니 아옹의 말이 맞아!
‘앞으로 내 말만 잘 들으면……’이라고 말하던 아옹의 말이 생각났다. 그 이후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대가로 제대 말년의 불행마저 깊이 관여하게 되었던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 때 감금 상태에서 가족과 연락하기 위해 부대를 탈출했다가 몽둥이로 나를 두들겨 팼던 포르투갈 출신 하사는, 외인부대로부터 칸느 영화제 보디가드 직무를 소개 받아 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옹에게는 르노 삼성의 보안, 안전직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친한 부사관들에게 전해 들은 까마득한 일이 기억났다. 외인부대에 충성한 결과로 얻은 일자리와 부친 사망에도 영창과 의무대에 감금됐던 그 기억은 외인부대 생활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런 나를 짓밟고 욕하며 손가락질 했던 사람들이 한국인들이었다.
20년이 다 된 얘기를 과거를 회상하며 결과부터 원인으로 역순으로 얘기를 하려하니 의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주요 포인트를 집고 넘어가려던 김어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나의 무력함에 김어준은 ‘그만 됐구요!’라 말하며 제지했다. 순간, 내가 말을 잘 못한다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 기분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무능함을 진작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수치심과 함께 나를 과대평가 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던 것이다. 이윽고, 아옹은
“그때 나는 그 부대에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라서 저하고는 아무런 상관 없는 얘깁니다”
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오바뉴 사령부로 헌병에게 이끌려 넘어가던 때와 함께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아옹은 안해도 될 변명을 거짓말 했고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내가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두 시간에 걸친 이야기는 어느 순간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외인부대가 훌륭한 군대이며 아무나 갈 수 없는 세계의 오지를 프랑스 외인부대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여행하듯 다녔으며 훌륭한 복지 시스템과 어리버리 아시안 사병을 차별과 편견 없이 대하는 외인부대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 이야기는 너무 뻔한 이야기라 다시 묻는 김어준의 질문을,
“감시와 통제, 구타와 왕따의 한국 군대 시스템이 아닌 한 명의 프로페셔널한 성인으로 인정하고 대한다”
는 얘기를 단지 성인으로 대한다는 얘기를 중복함으로써 나의 무기력은 절정에 달했다. 나는 한국 조선소에서 외인부대보다 더 강도높은 노동과 위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말하며 나중에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선주사 계약컨설턴트가 되었다거나, 알제리에 약혼녀가 있어 알제리에 꼭 가야하며 나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언제나 전성기처럼 살고 있으니 아옹이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아옹은 외인부대 지원하기 전에 한국에서 한 일을 비밀에 붙였다. 자신이 공군에서 헬기 조종까지 했다고 자랑했던 말을 할까 하다가 비밀에 부치자 나도 입을 다물었다. 아옹은 외인부대원은 무슨 슈퍼 히어로나 람보 같은 특수부대원이 아니라는 식의 얘기로 얘기를 마무리하고 녹음은 끝났다. 나는 빨리 스튜디오를 벗어나고 싶었고 아옹은 남아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어필하며 ‘이런 자리인줄 몰랐다’고 말하며 미련을 남겼다. 아옹은 밖으로 나와 딸아이를 데리러 가야한다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나는 오늘 재미있었다며 연락처를 가진 모두에게 뻐꾸기를 날렸다.
외인부대 훈련소 3중대 1소대, 1팀 훈련이 끝나고 케피블랑 착용 후의 단체 사진
인터뷰는 나를 완전히 침몰시켰다. 오르세, 루브로 박물관 도슨트, 파리와 프랑스의 역사를 줄줄이 읊던 시절, 학생들과 파리에서 운영하던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에게 했던 많은 얘기들이 김어준의 표정과 겹쳤다. 오히려 그들이 내 얘기를 들어준 것에 대한 인내에 감사할지경이었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를 거두고 허탈한 반성을 한 뒤, 이상한 현상이나타났다. 그것은 내가 무릎 부상으로 제2외인공수연대룰 떠날때 보았던 그들, 아버지 사망 소식에도 나를 짓밟던 그들의 경멸어린 얼굴이 오버랩된 것이다. 그 얼굴은 나이고하를 막론하고 인생에서 처음 겪어보는 야만적이고 비열한 단결력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군생활을 잘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난데 없이 다시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아옹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외인부대 관련 설명을 너무 부정적으로 잘못 설명한 거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며 피디에게 두 번 전화를 걸어 수정을 요청했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출연료를 나에게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의 이면을 잘 알고 있기에 거절했더니 웬 계좌 하나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직접 전달하라 했더니 그게 아니라, 돈이 급한데 좀 입금 시켜달라는 내용을, 백만원이라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일주일 후에 이자까지 쳐서 알제리 가는 여비에 보태 주겠다는 말과 함께!
돌려 받기 힘들겠다는 생각으로 보내주고 3주가 지났을 때까지 돌려주지 않자, 돌려달라고 뻐꾸기를 날렸다. 상기시켜 주어 고맙다면서 호반건설과의 계약건이 딜레이 된다며 욕을 하더니 회사 이름으로 송금하기가 뭐 한데, 내일 주면 안되겠냐고 말했다. 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이가 갈릴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상대했길래 의식 수준이 저 정도로 하찮을까 싶다가 그 모습이 김어준과 인터뷰할 때의 내 모습처럼 보여 다시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아옹은 내게 받았다는 확인 메시지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월말 김어준 피디에 전화를 다시 여러번 걸어 녹화 방송 송출을 취소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아옹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한국인 공수부대 출신들의 단결력 있는 집단 린치에 비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