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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Jan 01. 2024

어머니의 장례식

나의 고향


장례식


“어머이 돌아가셨다”


형님이 전화기 저편에서 전했다.

닥칠 일임을 알았음에도 머리가 하얗게 되어 신체의 모든 기능이 마비된 듯했다. 곧장 어머니가 계시는 진주의 경상대 병원으로 내려갔다. 올여름의 장마는 유난히 길었다. 해맑은 날이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구름 낀 하늘이 내내 비를 뿌렸다. 남강이 휘도는 강가에 위치한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반사된 빗물에 자동차 불빛이 빨갛게 비추는 밤이 되어서였다.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와 모여있었다. 장례식장은 경상대 병원에서 한일병원으로 바뀌었다. 가족들이 병원에서 주는 장례복으로 갖춰 입었을 때 나는 상복을 입지 않았다.


장례식 절차와 일정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프랑스에 살면서 장례 절차를 경험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대사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예를 올린 것이 전부였고 한국에서는 고향 친구 일홍이의 장례식장에서 고향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삼천포 화장터까지 함께 했던 기억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장례식은 대부분 셋째 형님과 막내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가족을 이룬 형제들의 자녀들까지 모두 모여 장례식장은 북적였다. 시대가 바뀌며 변한 장례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음에도 옛 것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상여를 메고 추억의 거리를 다니거나 초상집의 잔칫집 분위기도 모두 건물 속 간편한 비즈니스 속에 스며들었다. 오랜 기억 속에 남은 장례도 시대에 따라 변했으므로 전통이 있는 것인지, 전통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 시대와 종교의 유행을 탔을 게 분명했다.


조카의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에 시대의 변화를 느꼈다. 아이들은 낯설었지만 가족의 얼굴을 한 모습으로 가족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작고 앙증맞은 모습으로 뛰어다니는 모습 속에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첫날 조용하던 장례식장은 다음날부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일본 군인이었고 소문난 노름꾼이었다는 것, 서포 나리꼬지 몇 채 있던 집이 대게 술집이었다는 얘기는 막연한 생각을 하던 내게 안개를 걷어낸 것처럼 당시의 상황이 이해됐다.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들은 터전을 떠나기 힘들었고 6.25 참전 용사로 한쪽 다리를 잃어 2급 상이용사였던 아버지는 어부로 연명했다. 어머니는 10자녀를 두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문했던 어느 날, 동네 아머니들로부터 다구리를 당했던 기억도 있었다. 어머니는 거의 실성할 정도로 억척스러웠고 가끔 미쳤다 싶을 정도로 새로 사 온 고무신을 갈기갈기 찢어 놓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일제식 가옥에 참빛으로 단정하게 머리를 손질하고 아버지와 함께 촛불을 켜고 있던 아득한 기억이 영상처럼 스쳤다. 시골에 가면 내게 젖을 물렸던 동네 어른을 찾아 인사를 드리라고 항상 말했었다.


셋째 형님의 회사 동료들이 몰려왔다 썰물처럼 사라지자 막내의 지인들이 휘몰아쳤다. 동생은 곤양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나에게 곤양 고등학교에 다녀오라고 시켰는데 퇴학처리를 위해서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이유도 몰랐다. 막내는 내가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쿠데타 진압에 나섰을 때, 살인에 연루되어 청송교도소에 있다는 편지를 상륙함 헬기 우편으로 전달했다. 내 약혼녀의 가족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한나라당 간부였던지라 청송교도소 특별면회와 특별혜택이 이루어졌다. 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막내의 뒷바라지를 다 해주었으므로 효도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생의 지인들은 한눈에 봐도 조직 폭력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친구들은 몇몇 고향친구를 제외하곤 거의 오지 않았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아무리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오지 않은 내 형편을 말해주었다.


마지막 날 아침, 얼핏 잠결에 동생이 형님과 가족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곧 나에 대한 저주로 이어졌다. 커닝했다고 고등학교를 퇴학시킨 원흉이라는 것이었다. 착한 동생에게는 잘해준 기억보다 나쁜 기억만 남은 듯했다. 동생을 설득하려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미 어른이었고 장가가지 못한 나보다 일찍 결혼해 내가 있는 프랑스에 신혼여행을 왔었다. 동생은 외인부대 제대 후 게스트하우스를 막 시작하는 집에서 다투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동생은 어머니를 똑 닮은 딸을 낳았다. 조카는 나를 처음 보고 핏줄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꼭 끌어안았었다. 수줍고 어려운 조카였다. 동생은 박근혜를 추종했다. 동생의 응징세력인 국가는 존재하지도 않는 조직폭력배를 만들어 조폭 살인범으로 꾸며 내는 검사 출신, 국민의 힘 법사 위원장 김도읍을 자신의 영웅으로 삼았다. 동생은 과거의 진실과 현실의 사실과 관련 없이 이날 이후 가족과의 관계를 끊었다. 나는 동생이 스톡홀름 증후군의 표본이라 생각했다. 동생의 언행은 추후를 내다볼 수 있을 만큼 단순했고 시야가 좁았으나 고집이 쎘다. 그렇다고 어렸을 적 순수를 잃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본성은 벗어날 수 없으나 사고는 어떻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가산을 탕진하고 빚더미에 앉힌 큰 형님의 장대하던 기골은 할아버지가 되어 쪼그라들었다. 조카들은 장성하여 아이들을 두었는데 모두들 우리 가족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듯했다. 언제나 시원시원하고 싹싹한 큰형수의 곡소리는 화장터를 지배했다. 조각 같던 둘째 형은 병약했다. 강했으나 어떻게 그렇게 병약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 잘 생기고 멋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존재만으로도 여자들을 울렸다. 형제들은 어머니의 관이 모셔진 곳에서 손님들을 맞았다. 나는 그곳 향 뒤에 있는 관에 어머니의 시신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참을 수 없는 냄새가 영안실에 가득할 때, 나는 처음으로 그것이 어머니가 세상의 먼지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또한 처음 알았다. 어머니는 현충원 아버지 옆에 항아리로 안장됐다. 어머니가 형제들을 불러놓고 임종할 때, 염습하거나 입관할 때, 마지막으로 화장할 때도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의 잔소리와 해탈의 미소만을 간직하고 싶었다. 나는 평생 어머니에게 프랑스와 유럽 여행을 시켜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알제리 그녀와 결혼했더라면 모든 게 가능했을지도 몰랐다.



간첩


어머니가 살던 집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내려온 김에 하루 머물렀다 가기로 했다. 주차를 하는데 동네 동생이 주차 위치를 정해주었다. 예쁜 동기의 동생이라 두 살 터울에 여동생과 친구인 김인철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술 한잔 하자고 했다. 인철은 아파트 철문을 지나더니 2층 술집으로 올라갔다. 관능적인 여주인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우리를 반겼다. 고향에 오면 만나는 친구들만 만났고 가는 곳만 갔으므로 이런 술집에 올 일이 없었다. 술집 여주인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먼 곳에서 왔다며 묻지도 않은 얘기를 했다. 인철은 어머니 돌보미를 마음대로 불렀다. 나보다 한 살 많다는데 누구인지 몰랐다. 오빠가 내 고등학교 2회 선배라 했는데 네댓 정도 되는 선배의 이름 중에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여자는 너무 싹싹했기 때문에 부담스러웠다. 우리 가족들 앞에서도 엄마라고 부르며 살갑게 구는 모습이 가식 같아 보였었다. 인철은 이런 사람 세상에 없다며 가족들보다 더 헌신적으로 어머니를 돌보았다며 치켜세웠다. 여자는 과연 어머니 안구 차가 집 앞에 왔을 때, 차 앞에서 동네가 떠날 정도로 곡을 했다. 두 딸보다 나았다. 원하지 않는데도 계속 어머니에게 헌신한 얘기를 했다. 더 이상 하지 말라고 잘라 말했다. 여자는 자리를 지켰다.


인철은 사천에 있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어느 하청 업체에 다니는 모양이었다. 중공업 엔진 기술자로 일한 전력을 자부심을 가지고 조선업의 모든 엔진 기술력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며 허풍을 떨었다.


“엔진 설계나 생산 기술력이 없을 걸? 수입하는 거 아녔어? 거제도 조선소 일하다 보니 주요 핵심 설비나 엔진은 죄다 수입하고 벤더들 들어와서 기술력 지키려고 직접 조립, 설치까지 하지 않아?”


“이야, 형님 진짜 간첩이네요? 그럼 KF-21은요?”


“그야, 미국 GE나 P&W꺼 쓰지!”


더 이상 대화를 섞지 않고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인철이 어딘가 전화를 했다. 그리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여자들과 프랑스 생활에서 느낀 남녀는 서로 갈망하며 스스럼이 없고 난잡하며 친절하고 부드럽다고 유럽인들에 대해 얘기했다. 프랑스 여자들에게는 한국 여자에게서 느끼는 거리감이 없었다.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대화했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나약하거나 보호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만큼 한국 여자들에게서 느끼는 이미지가 달랐다. 여자들은 나의 이빨에 빠져들어 맞장구를 쳤다. 여주인은 이런 시골에 어울리지 않은 외모와 어투를 가졌다. 감미롭게 착 달라붙는 목소리가 간드러지고 언행에선 우아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매상을 올리려는 노력보다 적당하게 마시는 것을 권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게는 가라오케 같기도 했고 바 같기도 했으나 음향과 노래 설비는 별로여서 노래할 맛은 나지 않았다. 값싼 듯 비쌌지만 시골에선 고급 술집이었다.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서 함정 탐문을 시작했다. 어떤 종교의 포교 활동 같기도 했고 정치활동의 정보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크루즈 여행사의 한 점선임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토했다. 월마켓 주네스 글로벌이냐고 묻자 경쟁업체라고 말했다. 그런 걸 어떻게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거제도에서 그런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마음이 가지 않아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영업은 이해되지 않으면 허당이거나 이용당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촌구석에 스며들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이런 촌구석도 첨단을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고수는 어디든 존재했다.


곧 경찰 둘이 들어왔다. 한 사람은 나이가 많고 하나는 어둠 속에서 딱 봐도 어려 보였다.


“저 사람입니다!”


인철은 그렇게 말하고 휴대폰으로 나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기괴한 광경에 놀란 여자 둘과 내가 어안이 벙벙해서 경찰과 인철을 번갈아 보았다. 인철의 행위는 자신이 발견한 절대 악을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영웅적인 행위로 나를 촬영하기 시작한 것이고 그 행위엔 동네 형동생의 인간관계는 물론 나에 대한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어이없는 상황에 경찰에게 왜 왔느냐고 물었다.


“간첩 신고가 있어서 왔습니다!”
 “네? 간첩요? 경찰이 그렇게 할 일이 없습니까? 문대성이 압니까?”

“압니다”

“제 친굽니다!”


순식간에 나눈 대화에 경찰은 상황을 파악했다. 여자 둘에게 이빨을 터는 남자는 누가 보기에도 한량으로 보였고 어떠한 위화감도 보이지 않는 분위기는 평화로웠기 때문에 촬영을 하고 있던 인철에게 경찰은 신문을 하기 시작했다.


“신고자께선 이 사람들이 간첩임을 증명할 증거를 제출해 주시고 먼저 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나이 많은 경찰의 말에 나도 놀라고 인철도 놀랐다.


“아니, 간첩으로 신고한 사람에게 신분증을 요구합니까? 저 사람 간첩이라니까요?! 저 사람을 현행범으로 체포하십시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야, 이 미친놈 아! 개소리 말고 이리 와서 앉아! 경찰 분들! 저는 이 김인철이 이번 일로 인해 어떤 불이익을 받길 원치 않습니다. 다른 업무 보시길 바랍니다!”


경찰은 사라졌다. 동시에 인철도 경찰과 함께 사라졌다. 우리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좀 전에 나누던 얘기에 몰입했다가 인철이 다시 등장하며 분위기는 깨졌다.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내가 신고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이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여러 태극기 부대스러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음에도 이렇게 대놓고 간첩 소리를 듣거나 경찰이 출동한 것은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동네 형이 간첩이라 신고하고 촬영까지 하고 있으니 그저 어이없고 황당했다. 한반도를 전쟁상황으로 몰아가던 박근혜를 추종하는 우리 막내의 모습이기도 했다. 노무현의 봉하마을에 가서 아방궁을 지어놓고 세금을 탈루했다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빨갱이 외치던 큰 형님의 모습이기도 했다. 지금껏 만났던 맹목적 빨갱이 추종자인 태극기 부대의 모습이기도 했다.


 빨간 물이 들면 미쳐버리는 그들의 광기는 권력 앞에 빨개지고 권력 앞에 굴종했다. 그들은 권력과 폭력 앞에 한없이 비굴했고 비상식적이었으므로 정상적인 상식으로 상대하기 힘든 부류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광신도적 발언을 제압할 방법이 독재자적 권력과 광신도적 광기 외에도 경찰에 신고하고 과태료를 물리거나 법 앞에 세우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폭력 앞에 그들은 더없이 선한 사람이 되어 폭력 피해자로 둔갑했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폭력을 행사했다고 경찰 앞에 거짓말을 밥 먹듯 했다. 경찰은 진실의 관계없이 그들의 말을 믿었다. 증거가 있어도 웬만하면 그들의 편이었다. 시끄럽고 성가시며 괴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 뒤에 교회가 있었고 교회 뒤에 정치권력과 돈이 있었다. 과태료와 훈방 조치는 경찰의 권력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법은 광신도적 다구리에 관대했고 정의는 다수의 광신도가 승리하는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확한 논리와 광신도적 빨갱이 논리에 대항할만한 논리를 가져도 그들의 막무가내 무대뽀엔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광란과 방종은 법 위에 존재함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들 뒤엔 자본과 경찰 권력과 검찰 권력이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 그들은 가장 앞에서 논리로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물리쳤다. 그들의 언행은 혐오스러웠고 증오로 가득했다. 기독교적 헌신적인 사랑과 윤리 없는 쾌락, 도덕 없는 경제처럼 희생 없는 신앙을 실천하는 광기 가득한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빨갱이란 말 한마디로 천하제일 전사로 돌입했으나 민주주의의 달콤한 방종을 즐겼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너무나 방탕하고 나약한 타락이었다. 그 정도 수준의 인철이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아팠다.



고향 친구들


고향을 떠나기 전, 마을 입구에 위치한 친구 영규사무실을 방문했다. 경상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학원을 운영했고 토굴을 파 젓갈 사업을 하는가 하면 현재는 태양광 사업으로 언제나 부지런했다. 사회의 흐름을 파악하며 동네 청년들의 상담사 같은 코디네이터이기도 했다. 회사 사무실은 언제나처럼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사무실 방 안쪽에서 담배를 피워대며 판을 돌렸기 때문에 사무실에 사람이 없으면 아는 사람이라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시골이라기에 고수들이었다. 거의 매일 팀을 이루어 조그만 동네 서너 곳에서 판을 벌였다. 친구에게 전화를 하자 문이 열렸다. 그곳엔 윤황태와 주기정도 같이 있었다. 스스럼없이 즐거운 기정인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을 오간다고 했다. 회사에 충실한다고 자신의 건강과 가족을 챙기지 못하는 시골스럽고 정이 많았다. 곁에 있으면 마냥 마음이 편했다. 한편 황태는 악수를 거부했다. 거제도 술 집 사건 이후, 볼 때마다 불쾌해지는 놈이었다. 부끄러워하고 사과해야 할 놈이 오히려 오만하게 굴었다.


우리는 평소에 연락하지 않았다. 프랑스에 살던 한국에 살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가끔 친구들과 만나 잘 놀다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의 말을 끊고 ‘가만있어!’라고 명령하거나 노래를 중간에 끊어버렸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말하면서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묻고는 상대에 따라 술을 얻어먹는 수준이 꼭 고급 룸을 가는 걸 즐겼다. 그가 룸을 즐기는 이유는 고급 술이 아니라 매춘이라는 것을 거제도 사건에서 경험하고 나자 친구를 이용한 가스라이팅에 능한 놈이란 걸 알아버린 이후였다. 그것도 돈 좀 번다는 친구들을 상대로 자주 그런 짓을 벌였다.

황태는 내가 거제도 조선소 선주사들 상대로 영업활동을 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어머이 잘 계시나? 나 지금 너랑 술 한잔 하려고 택시 타고 거제도 가고 있다. 어디로 가면 되노?”


황태는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아프리카 알제리 삼성엔지니어링 스킥다 프로젝트 때, 동일 산업 현장 소장으로 근무했던 경상대 출신 형님과 같이 거제도 바 거리에서 맥주에 담소를 나누었다. 친구가 진주에서 거제까지 9만 원이나 택시비를 주고 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황태와 나는 우정의 대화를 나눌 상대가 아니었음에도 술 한잔 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황태는 소장 형님과 대화를 나누는 우리의 대화에 끼지 않았다. 굳어 있는 얼굴이 못마땅했다. 자리를 바꾸자고 요청하며 먼저 거리로 나섰다. 나는 바에서 외국 애들 만나 대화하는 걸 좋아했다. 지금 뭘 먹으려 해도 간단하게 초밥집이나 찾는데 황태는 혼자 어디론가 훠이훠이 걸어 어느 고급스러운 비즈니스 룸으로 들어갔다. 두 시간 동안 황태는 놀지 않았다. 흥에 겨운 소장 형님이 ‘너 경상대 출신이야?’라고 물어도 대답 없이 얼굴이 굳었다. 우리의 의사 없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다리를 꼬고 술을 주문했다. 심히 불쾌해진 상황에서 놀 기분도 아니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술을 마시러 온 게 아니란 것을!


황태는 술 값을 낼 의사가 없었다. 소장 형님과 80만 원씩 현금으로 지불했다. 우리의 기분도 잡쳤다. 진주에서 학원을 운영했던 자신의 카드는 마누라가 쥐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어머니 부조금으로 5만 원을 보냈던 놈이었다. 시골에선 거제도까지 찾아가 나와 술을 마셨는데 둘이서 반반씩 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럼에도 얼굴을 붉히지 않았음에도 악수마저 먼저 거부해 버리는 놈이 매를 벌었다.


“너희 진고 출신들은 술 한잔 얻어먹었으면 사줄 줄도 좀 알아야지, 맨날 삔데만 치고 다녀?”


“내가 한잔 사줄 테니 이따 가자”


내게 술 얻어먹어 본 적이 없는 규가 대신 대답했다.


형 동생 포함한 6명이서 근처 갯마을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젊고 에쁜 여자가 서빙을 하는데 한국말이 서툴러 태국 여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근처에 남편과 같이 산다고 했다. 약간 병자처럼 보이는 남자가 주문과 서빙을 겸했는데 말투가 어눌했다. 4년여 전에 서포로 들어온 여수나 순천 사람이라 했다. 전어회와 구이, 해산물을 주문했다. 깻잎과 마늘을 계속 요구했다. 요구하는 사람도 가져도 주는 사람도 뭔가 불편한 듯 서로 불만이 많았다. 몇 번씩 잔심부름을 하던 주인이 ‘아 참, 한꺼번에 시키든가 하시지 왜 자꾸 하나씩 시킵니까?’하고 볼멘소리를 했다. 같이 있던 후배 하나가 신경질을 냈다.


“요새 시골 텃새가 장난 아니라더니 내 고향에서 보게 될 줄이야! 딱 보니 몸도 불편한 사람이 고생하는 구만 필요한 거 가서 좀 달라고 해서 가져오거나 진짜 한 번에 다 시키면 되지, 내가 보기에도 너희들 심하다”


 세계의 중심이던 고향은 어렸을 때부터 거대한 미지의 세계였다. 뒷 산의 우거진 숲은 금방이라도 호랑이가 뛰어나올 것 같았고 바다엔 거대한 고래가 향유했다. 바다 끝자락에 몇 채씩 붙은 마을에서 친구들은 저마다 책보따리를 메고 10리씩 걸어 서포 초등학교로 가는 것은 기본이었다. 학교에서 만나는 서포 친구들은 이렇게 큰 마을에 사는 것이 신기해서 같은 시골에서도 비교가 됐다. 초교와 중학교가 있는 서포를 중심으로 팔방으로 펼치진 먼 거리 곳곳에 친구들이 살았다. 점점 멀어지는 마을의 끝 점들은 서로의 형편을 알 리가 없었고 친구들의 집이 어디 있는지, 부모가 누군지도 알 수가 없었다. 모든 정보는 시장과 학교에서 모이고 흩어졌다.


 방학을 이용해 한 번씩 토끼 섬 비토를 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 했고 폭우나 폭풍우가 오는 날이면 학교를 가지 못했던 곳을 가보는 것은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교통편이 없던 시절이라 모두 걸어 다녀야 했다. 마을은 모두 비슷해서 내 집 형편이나 친구들의 형편이 다르지 않았다. 먼 거리의 친구들은 어른이 된 지금도 멀리 살았다. 첩첩산중에 살던 친구나 거기에서 훨씬 더 멀리 들어가는 금진 같은 마을도 나이 들면서 더 먼 곳이 되었다. 초가집이 벽돌 양옥집이 되었을 뿐, 동네의 고단한 살림살이는 농기계가 버려졌고 파손된 비닐이 날아다녔다. 멀리 살아도 정이 넘치던 어린 시절의 정취는 좀 먹고살게 되었다는 시기엔 오히려 신비감마저 사라져 버려 더 멀게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 고향을 볼 때마다 아프리카의 사막 속 원시인의 집이 점들이 이어진 집과 다를 바 없었다. 좀 살만한 북아프리카의 짓다 만 건물들 위로 솟아오른 철근 뼈가 모든 건축물이 그렇다는 것이 비교됐다. 프랑스에 살면서 다닌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은 도시란 어떤 것인지, 어떻게 꾸며지고 운영되는 것인지 그저 놀라웠다. 한국은 그 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평화로운 여유를 잃어버리고 모든 게 경쟁과 계급화된 제도 속에 정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부와 직급이 행복의 척도가 된 세상은 프랑스와 같은 사회주의를 이해 못 할 거 같았다. 프랑스 시골 사람들이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보다 훨씬 정이 많고 순수하며 시골은 전체가 정원이나 공원 같아 우리 시골과 확연히 비교됐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순수한 정감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절감했다.


[우물 안 개구리]


이 말을 했다고 동생 한 놈이 골이 났는지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 일부러 말을 크게 해 내 말을 방해했다.


“구석기시대 촌놈이 우물 안 개구리라고 놀렸다고 행님한테 하는 꼬라지 봐라!”


“알긴 아네!”


“이놈아! 우물 안 개구리가 무슨 대단한 모욕이라고 혼자 뿔나서 지방 방송 키고 그래! 엇 저녁에 인철이 만났는데 나보고 간첩으로 신고해서 경찰이 왔었어. 술집에서! 내가 문대성이 아느냐고 했더니 안다면서 오히려 인철이에게 신분증 요구하고 조사를 하겠다고 그런 거야! 그래서 경찰들에게 이번 일로 어떠한 불이익과 처벌받길 원치 않는다고 다른 일 보시라고 돌려보냈지!”


“그건 잘했네!”


동생이 맞장구를 쳤다. 친구에게 인철의 행동을 타일러 달라는 뜻의 전달이었다.


“니가 노빠고 노빠면 간첩이 맞다”


과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규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확신에 뒷통수를 맞은 것처러 놀라웠다. 나는 좌중을 바라보며 이 황당한 인민재판과 좌표에 당황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규를 알아왔던 사람들은 나의 정치 성향을 몰랐을 테고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개인의 성향일 뿐, 이렇게 대놓고 모든 사람에게 단언하여 재판해 버린 확신은 세상 처음 겪어보는 인민재판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확신에 찬 판단은 주변인들이 모두 자신의 말에 동의할 것이란 확신도 섰다. 규의 말은 마치 자신이 검사 윤석열이 된 것처럼 올곧았다.


 문재인이 간첩이라고 법원에서 판결 난 적이 있었다. 노무현의 장인이 좌익활동을 했다고 빨갱이라고 공격당한 적이 있어서 빨갱이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자들의 확실한 공격어였다. 문제는 그런 공격을 일삼는 자들이 진짜 빨갱이였으며 독립군을 빨갱이로 몰아 때려잡던 일제 앞잡이 박정희를 추종한다는데 있었다. 온갖 배신과 음모와 모략이 판쳐도 우익으로 전향하면 태영호도 지성호도 같은 편이 되어 일본 앞에 굽실거리고 충성하는 데 있었다. 그들의 논리는 박정희 때문에 우리가 먹고살게 되었으니 빨갱이, 일본 관동군 장교 경력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북한=민주당=빨갱이란 논리가 간단했다.


내가 프랑스에서 만난 구국의 영웅 샤를드골은 박정희와 확연히 비교되었다. 박정희는 나라를 팔아먹은 페탱 장군이었고 샤를드골은 장준하에 비견되었으나 우리나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불운이었다.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굶어 죽었을 거라는 광신도적 신념에 빠진 사람들 많이 만났음에도 이렇게 간단하게 좌표를 찍어 나를 빨갱이로 모는 사람은 규가 처음이었다. 시골에서 지방 국립대 사회학과를 나오고 학원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던 고향 친구라는 놈의 단정은 신념이 분명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바라보며 느꼈을 이들의 분노와 증오가 가득 전해졌다. 이윽고 자신들의 세상이 온 것에 대해 백정 칼 춤추듯 하는 짓이 어찌 서북청년단과 그리 닮았는가!


“이 남조선 간나 새끼들 진짜 사람 잡을 놈일세!”


“남조선 그러는 거 보니 진짜 간첩 맞네! 넌 빨갱이야!”

"경기도에 올라가면 그런 놈들 몇 놈 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황태도 거들고 영규가 못을 박았다. 영규의 저 확언의 출처가 궁금하지 않았다. 단정적 오만과 불가역적인 판결의 이면엔  상대를 깔보는 승자의 여유가 넘쳤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가 뭘로 보인 것일까? 시골에서 대학 다닌 두 놈이 의기투합하여 빨갱이로 몰아가자 나는 졸지에 궁지에 몰렸다. 선후배들이야 이 상황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지만 가만히 있으면 얼마나 위험한지는 불을 보듯 훤했다.


“사기꾼 이병박이가, 닭대가리 박근혜가 빨갱이 그러니까 눈이 막 디비졌는갑제! 이제 상등신 윤석렬이 대통령 되니 아 새끼들이 누구 하나 간첩 만들어서 죽여버리고 싶어 미치겠어? 없는 죄 만들어서 조작하고 모함해서 노무혀이 죽는 거 보이 좋아 죽겠더나?! 전라도 사람들 빨갱이 몰아 학살하니 눈이 벌개 가 고마 미치겠더나?! 니 놈들이 살인마지 따로 살인마겠나. 내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별의별 악당들을 다 만나봤어도 진짜 악당들이 고향에 다 있었다니, 야 이거 영화로 만들어도 되겠다. 너그 둘이 주인공으로 만들어서!”


내가 눙치며 능글맞게 할 말을 다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박정희가 우리나라를 먹여 살렸다는 무기를 애국으로 삼고 자신들과 뜻이 다르면 우기고 어르고 협박하는 일에 능했다. 논리나 이성이 없고 오로지 빨갱이로 몰아가는 일에 능했는데 그 정점에 있는 놈들을 오늘에야 만났다. 술 값을 지불하고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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