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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Oct 15. 2023

거제도 조선소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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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조선소


 거제도는 참 이상한 곳이다.

해가 바뀌자마자 거제도로 내려와 옥포 시장 위쪽에 방을 얻었다. 2017년 조선소가 몰락하자 날물처럼 휩쓸려 나가는 사람들 틈에 묻혀 떠난지 3년 만에 돌아오는 거제도였다. 직접 방을 얻어 부동산 계약서에 싸인을 처음 해봤다. 옥포 시장의 실력자들로부터 반찬이나 요리 재료를 사고 근처 도서관에서 국제 안전 자격증 공부를 하며 해안로를 따라 덕포 해수욕장까지 조깅을 할 수 있는 요충지로 오랜 고민 끝에 선택한 집에선 덕포를 향하는 언덕길이 한 눈에 내다 보였다. 책상 앞에 앉아 한번씩 건너 보는 언덕 길의 신호등 뿐만아니라, 교통량도 한눈에 보여 운치도 있었다. 거제도 조선소 몰락이 가져온 부동산 하락폭이 눈에 띄게 컸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소에서 일할 때면 숙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불편하긴 해도 방을 구할 필요까진 없었지만 숙소 주변은 복지시설이나 위락시설이 별로 없었다. 하루종일 노동을 끝내고 돌아오는 집은 그저 숙박만 해결하는 곳에 불과했고 그런 주변은 몇몇 식당과 술집을 제외하면 대개 노동자들에게 임대하기 위해 지은 대부분의 빌라들은 구조가 비슷했다. 숙소 주변의 가파른 길과 삭막한 환경은 조선소 노동자들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감정 없이 삭막하게 바라보는 주변환경처럼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도 비슷했다.


 조선소에서 만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감정이 없는 것처럼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 표현력이 부족해서 내성적이어 보이기도 했다. 표면적으론 일만하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다가가는 것이 어려웠다. 사람들은 우직하면서도 믿음직스러웠다. 현장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얼핏 보아도 고수의 품위가 났다. 그럼에도 현장에선 일만 했기 때문에, 개개인에 대한 판단은 일에 대한 능력으로 이뤄졌던 기억으로 우직함과 믿음직스런 그들의 성격은 오히려 자존심 센 아집과 독선이 먼저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조선소 관리자와 노동자 뿐만아니라 전체적인 이미지가 나빴다. 노동자들은 노동자와 경영진들을 증오하며 조선소를 떠났고 일할 사람은 넘쳐 난다며 해고를 우습게 여기던 관리자와 경영진들의 오만한 갑질은 조선하청지회의 시위로 조선소가 얼마나 지옥같은 곳인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존중받지 못했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노동자들의 언행은 겸손과 거리가 멀었다. 철가루, 페인트 등의 분진가루, 용접으로 쇠가 타는 냄새와 각종 화학적인 냄새처럼, 생존을 위한 노동자들의 몸부림은 분진가루가 되고 아르곤 냄새가 되어 눈을 어지럽히고 의식을 갉아먹었다. 그런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신생 아파트 단지에 둥지를 틀고 조선소를 떠나지 못했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감시와 통제 속에 웃음을 잃고 고단한 노동에 길들여져 새로오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노동의 강도나 인생을 원하는 것처럼 굴었다.


 세계 2위의 한화 오션, 세계 5위의 삼성 중공업이 있는 거제도는 이미 계급화된 지위처럼 사는 곳에 따라 부동산의 조건과 가격이 달랐다. 편의점 알바의 일당과 조선소 알바의 일당이 다르지 않은 한국은 절대로 선진국이 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조선소였다. 조선소는 노동 강도 뿐만아니라 시간 착취가 눈에 훤했다. 조선소 하청업체나 하청업체의 재하청인 물량팀에 입사하기 위해선 '배치전 건강검진'을 자비 부담으로 받아야 했다. 의사는 검진란에 분진가루나 유해 가스, 위해 요소에 노출되는 노동 시간을 8시간으로 기록했다. 노동부도 하루 노동시간을 8시간이라고 했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점심시간을 제외한 노동 시간이 9시간, 아침 8시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하므로 9시간을 8시간이라고 속였다.


 조선소에서 A코드, B코드뿐만아니라 C.D,E코드라는 게 존재했다. A코드란 오후 5시 정시 퇴근이며 한달에 한 두번 있을까 말까 하는, 그것도 폭우나 폭풍, 사고 등에 의한 비자발적 퇴근이었고 B코드는 노동자들이 돈을 더 벌게 해주기 위해 1시간을 추가로 제공하는 배려라는 사용자 측, 즉 대기업의 논리였다. 따라서 E코드라는 연장 작업에 들어가면 퇴근 시간이 10시였는데, 반도체 등의 상식으론 2공수, 즉 두 배의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을 마치 적선하듯 착취한다는 것이었다. 그 착취 시스템은 토요일에 극에 달했다. 조선소의 노동 강도는 세상 그 어디에 비교해도 최고이자 최악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편의점 최저 시급과 다름 없는 시급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적선하듯이 1시간을 줄여 토요일 오후 5시까지 근무했다. 노동부도 의사도 모두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면 경찰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하는 곳이 조선소였다.


 여러 해안로들과 아름다운 바다와 옥녀봉과 국사봉에 이르는 등로들, 옥포만에 형성된 매립지 번화가는 서울의 유흥가 못지 않은 유흥의 불을 밝혔다. 그러나 거제도는 작은 곳이었고 유흥과 오락, 문화를 누리기엔 웬지 좁아 보였다. 이런 곳에 자연보호를 외치는 단체들과 아파트를 짓기 위한 개발업자들 간의 승리는 언제나 돈과 권력으로부터 나왔다. 아파트의 공실은 넘쳐났고 산과 들을 헤집어 놓은 흉측한 현대문명의 이기는 권력마냥 오만했다. 상식은 시장 경제의 논리 앞에 무너졌고 공정이나 정의는 권력의 노리개가 되어 오만한 눈을 부라렸다. 모든 것은 조선소의 모습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조선업 도약 센터


 실업급여 수령 마지막이 눈 앞이었다.

대하소설 프랑스 외인부대 소설 한 편을 끝내고, 국제 안전자격증인 NEBOSH IGC를 따고, 105kg의 몸무게를 80kg로 줄이겠다는 각오로 내려온 거제도 생활은 이미 5개월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삼일 천하로 끝날 것 같았던 다이어트는 15kg를 줄여 성공해갔고 공부도 몇개월동안 진척을 보이는 것 같았다. 소설을 쓰겠다는 계획은 뒷전으로 밀렸다. 게으런 놈이 욕심 많다고 글을 쓰는 일은 피곤과 나태함으로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여러번 시내 요충지마다 걸려 있는 '조선업 도약 센터'에서 공모하는 취업 지원금 100만원 플랜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3개월 동안 노동부가 정한 합법적인 하청업체에서 일하게 되면 정부 지원금 100만원을 준다는 공고는 누가 보기에도 혹할만한 미끼였다.


 또한 조선소 하청 노동자들을 공권력을 동원해 때려잡던 윤석열 정부의 노동 경시 문화가 팽배한데도 조선소 인력을 구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엉뚱한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 눈에 훤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조선업도약센터라는 곳을 새롭게 만들어 직원들을 채용하고 여러 프로그램을 마련해 예산을 지원했다는 것이었다. 혹한 마음에 당장 지원을 했다. 조선업 취업 전에 2시간 교육을 받고 노동부가 정한 법령에 따른  합법적인 업체인지 확인하고 교육에 들어갔다. 나름 닳고닳은 필자의 인생 경험이 줏어듣고 강제로 들어 알만한건 다 아는 더닝 크루거 효과의 압권을 이루는 당사자에게 2시간 교육을 담당한 직원은 경남 진주의 어느 대학의 무슨 교수라 했다.


그녀는 DISC라는 단어로 개인의 성향을 판단하는 특강을 진행했다. 알건 다 알지만 모르는 것은 토옹 모르는 필자의 기억에 남는 것은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와 칠푼이 같이 흥겨웠다는 것은 필자가 외쿡 생활을 그나마 꽤 했던 터라 고향 사투리에 대한 애정이 컸다는 것이다. 강의는 [다양한 직무현장에 실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심리검사도구]를 소개하는 한국교육건설팅연구소에서 강사과정을 마친 사람들로 조선소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그저 컨설팅연구소의 배를 불리는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처럼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취업과정이 아닌 것 같았으나 100만원을 준다는 말에 3개월의 지옥같은 조선소를 다시 한번 지원했다.


 정겨운 서부경남 사투리로 진행되는 흥겨운 강의란 것을 제외하곤 조선업 직종과 도대체 무슨 개연성이나 연관성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또한 2시간 교육을 받고 입사하는 협력업체가 교육기관에 등록 되지 않았거나 숙소를 사용해도 수령 자격이 박탈되었다. 대부분 물량팀들이 낸 채용공고를 보고 입사하면 숙소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00만원 지원금을 받기 위해 안정적이지 않은 물량팀에서 보증금과 월세를 감당할 지원자들은 많지 않았다. 실제로 일하는 노동자보다 부동산을 위한 정책이 더 맞을 것 같았다. 조선업 개선의 주요 과제는 조선하청지회가 요구하는 조건과 별다를 바 없었다;


1, 노동자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게 안정적인 일자리와 복지를 보장해주고
2. 물량팀들로 구성된 물량팀제를 폐지하여 하청업체 직접 채용
3. 노동자들로부터 소속감을 느낄만큼 자긍심을 일깨워주고
4. 체계적인 교육
5. 각종 작업 코드를 없애고 시종시간 및 노동법 준수
6. 하청업체를 노예화 하는 능률제 폐지(모든 불법과 착취의 근원)


등등 개선의 여지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소의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상식을 불허하는 곳이었다. 아무리 사람을 갈아 배한척을 건조한다고 해도 숙련된 노동자들이 떠나버린 조선소는 청년은 커녕, 떠났던 숙련공들도 치를 떨며 돌아오지 않았다. 그곳을 한국어가 되지 않는 동남아 베트남, 캄보디아, 스리랑카, 태국, 네팔,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사아, 우즈벡, 방글라데시 인력들이 차지했다. 이제는 아예 국적을 알수 없는 흑인들도 들어왔다. 프랑스 생활 20년에 알제리 4년, 아프리카 가봉, 챠드, 지부티를 경험한 글로벌한 필자에게도 기이하게 이런 현상을 바라보았다.

 중국의 저가 수주에 대항하기 위해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국제 노동기구 ILO 법규상 우리나라 최저시급이 적용된 급여는 그들에게 최소 6개월에서 1년 연봉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사우디 건설개발에 참여해 밤낮없이 일했던 그 무법천지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다. 때문에 거제도의 휴일은 한눈에도 알아보기 쉽게 가난한 노동자들과 부유한 선주 엔지니어들이 거리를 점점 점유했다. 이 양분된 신분 또한 기이한 구경거리이면서도 무리를 지어 다니는 그들을 불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조선소에 산재한 문제는 거제도와 울산의 지형도 서서히 변모시켰다.


1. 숙련 노동자들이 없음으로 공정이 딜레이 되었고
2. 신용 하락
3. 프로젝트 비용 감소
4. 수주한 프로젝트 취소
5. 숙련공 변경으로 LNG 시리즈 효과 감소(숙련공들의 경험 필수)
6. 진급제가 없고 지속성이 없어 불안정한 일자리
7. 자동화가 불가
8. 물량팀 증가로 하청업체 책임 회피


등등의 산재한 문제들은 조선업 도약센터에선 관심의 대상도 개선의 대상도 아닌게 눈에 훤했다.

한때, 눈떠보니 선진국이란 말이 유행했지만 노동현장에선 소원한 일이라 여겼다. 가장 문제는 노동자들의 의식 자체라 생각했다. 대접받기 위해 요구하지 않았고 그저 주는 것에 만족하면서도 그것이 마치 스스로 얻어진 것처럼 여기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투쟁과 헌신, 희생에서 오는 결과라는 것을 모르는 현대판 노예들이 따로 있지 않았다.



조선소의 역사


 교육을 마치고 여러 정보를 취합해 들어간 곳은 NOC라는 선주사가 운영하는 Gallaf Patch3라는 프로젝트였다. 사실, 이 프로젝트에 들어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기 있었다. 저녁에 술한잔 거나하게 취해 옥포 밤거리를 배회하던 필자가 10년 전에 만났던 프랑스 친구 필립을 우연히 만났다. 필립은 필자가 처음 삼성중공업에 비계팀에 들어갔을 때, 셸 프렐루드 테크닙 전기 책임자였다. 이후, Inpex 이치스 프로젝트의 토탈에서 전기 시운전을 담당했었다.

 찬바람만 가득한 초봄 횡한 밤거리를 혼자 배회했는데 숱한 외국인 엔지니어들이 즐겨찾던 바 거리가 황량한 것이 조선업을 떠났던 3년 전 상황이랑 다를 바 없었다. 더 혹한 바닷바람이 휑하게 거리를 날카롭게 할퀴었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곤로가 켜진 다운타운 바엘 들어갔다. 곤로에서 나오는 기름 냄새에 기겁한 필립이 다른 바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 가보는 바엔 옛날에 두어번 만났던 밴드에서 기타와 보컬을 담당하던 친구가 운영하는 라이브 바였다. 여러 외국인들이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외국에서 흔히 보는 펍엔 한국인과 결혼해서 두 아이른 낳았다는 꽤나 매력적인 필리핀 타냐가 근무했다.


옥포 바 거리의 라이브 바 홀릭은 많은 위안을 준다.


 필립은 내게 무슨일을 하는지 물었다. 국제안전자격증 공부를 한다고 했더니 안전은 인원이 너무 많아 채용이 불가하다고 했다. 가만보니 알제리에서 현장 통역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현장 코디네이터 역할을 했던 비전문적인 직위를 생각하면 내세울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1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안전교육을 받았다. 한 번에 400여명이 교육을 받던 2017년 이전에 비하면 100여명 가까운 신규자들은 하루 종일 각 분야별로 배정된 법정 안전교육을 받았고 다음 날부터 즉각 현장에 투입되었다. 한 번 조선소에서 일해 본 사람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주 만났다. 설령 만나지 않았다하더라도 어디선가 본 것처럼 그 언행이 닮아 있는 모습은 이웃같기도 했고 인생에 두 번 만나기 싫은 악당이기도 했다. 물량 팀장도 어디선가 만났던 인물이고 현장에 같이 일하는 애들도 여러 프로젝트에서 스친 인물들로 이름만 들면 알만 했다.


 같이 일할 배관사도 평택의 반도체 현장에서 일하다 왔다고 했다. 거제에 터를 잡은지 오래된 전라도 출신이었는데 전라도 사람들은 특유의 나쁜 기질이 있었다. 경상도 사람들이 가지는 형동생의 관계를 직위고하로 우습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종내에는 꼭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경계했다. 배관사는 서두르는 기색없이 어렵지 않게 여러 작업들을 해치웠다. 반도체 현장엔 한 명의 배관사에 준 배관사와 조공 등 4, 5명이 한 조를 이루는 것과는 달리, 조선소는 배관공과 조공 단 둘이 조를 이루었으므로 성질 고약한 배관사라도 만나면 떠날 준비를 해야할만큼 사람들의 의식은 강철같았다.

 10여일 즘 일했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반장이 아침 조회가 끝날 무렵 현장에 들어가지 말고 남으라더니 다른 현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화장실 갔다가 차가 주차하는 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더니 금방 올테니 조회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떠나버렸다. 그 자리는 차가 들어올 수 없는 도크였기 때문에 도크 밖 화장실을 다녀오고 휴게소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마셔도 차는  오지 않았다. 45여분이 흘렀을 때,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바뀐 현장으로 찾아갈테니 위치만 알려달라고 했는데 현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팀에 합류하니 기다리라는 거였다. 곧 어디있냐고 전화가 왔다. 휴대폰 보는 사이 나를 찾으러 온 담당자가 차를 세워놓고 들어간 모양이었다.


"왜 업무 지시 어기고 마음대로 행동합니까?"


다른 업체 소장 2명과 함께 소장 안전모를 쓴 소장이 질책하듯 물었다. 소장 셋이 내가 누군지 보러 왔다는 것과 비로소 이들이 나를 징계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기서 기다리는 것보다 저기서 기다리는게 상식적이고 무작정 사람 기다리게 했으면 도착해서 사과하는게 먼저 아니오? 하여튼 조선소 사람들은 하는 짓들이 왜 하나 같이 양아치 같소? 재수 없어서 일 못하겠으니 퇴사 처리합시다."


그 길로 퇴사 절차를 밟았다. 작업복, 안전화, 보안경 등 비용을 모두 제한다는 공지와 함께 불법이 변한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팀장이 다른 업체 팀에게 소개해준다고 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2주가 지났을 때, 다시 안전교육을 받고 새로운 업체에 투입되었다. GRE 파이프를 전문으로 설치하는 하청에 하청 업체였다.

 

조선업 도약센터에 하청업체가 100만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업체인지 알아보았다. 다행히 등록된 업체였다. 이제, 또 어떻게 3개월을 버틸 것인지, 새로운 걱정과 함께 계절의 여왕 5월은 향기로운 봄햇살로 볼을 어루만졌다. 말끔하게 사라진 뱃살을 자랑스럽게 내려다보며 어떤 옷을 입어도 핏이 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NOC Gallaf Patch3 프로젝트


회사 자체 안전교육을 받던 날 아침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이 지나갔다.


"안면이 있죠?"


그도 안면이 있다고 했다. 선뜻 좋은 기억이 아닌 것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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