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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Jun 30. 2024

삼성반도체 현장 부당해고 구제신청


기흥구 서천동


장마가 시작됐다.

곰같이 늦잠을 자다가 장대 같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자마자 비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다 차 키를 가지러 되돌아왔다. 비옷은 지퍼를 잠그지 않은채 걸치기만 했고, 잠에서도 덜 깨어 차로 달려가 조금씩 열어놓았던 창문을 올리고 들어오는 길에 이웃을 만났다. 산발한 모습이 비옷으로 걸치고 허리를 숙인 모습이긴 했어도 뱃살이 드러난 흉측한 상태라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후다닥 들어왔다. 일어난 김에 빨래방에 이불을 가지고 가 돌리며 잠을 깨려 했지만 오히려 졸렸다. 담배도 다 피워 50여미터 편의점에 가려니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차로 가서 담배를 사와 비몽사몽간에 빨래를 마치고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1시간여간의 분주했던 순간이 오늘 일과의 전부인 것처럼 바빴다.


내가 사는 기흥구 서천동의 반 지하 월세는 정말 조용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삼성전자 기흥캠퍼스가 지척이며 경희대 국제 기흥캠퍼스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 이렇게 음험한 집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집을 계약하고 며칠 지나면서 안 거지만 주변의 농토와 폐가가 몇 채 있었고 오래된 앞쪽 건물은 쓰레기 더미가 잔뜩 쌓인 조그마한 돌담으로 지어진 오래된 공장이었다. 경희대 신갈 캠퍼스로 들어가는 길엔 50여 미터 거리의 지하도가 있어 음침했다. 입구엔 사방을 경계하는 감시카메라가 윙윙 소리를 내며 규칙적으로 주변을 살폈고 오래된 집을 꾸며 카페를 운영하는 서천 카페는 은근히 분위기가 좋았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사색의 광장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희대 체대 복싱부를 다닌다고 곧장 거짓말을 하곤 했다. 그곳을 나이 50이 넘어서야 오게 되었고 105kg 나가던 흉측한 몸매를, 경희대 캠퍼스를 지나 기흥 호수 공원 한 바퀴 10km를 뛰거나 짧게 7km는 매미산, 아람산을 달리는 크로스컨트리로 일상을 보내며 85kg로 줄이는 목표에 성공했다. 9월 말까지 최고 75kg까지 감량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반듯한 뱃살과 아직 근육질 넘치는 허벅지를 보며 뿌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런 포만감만큼 서천동이 살기에 괜찮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끔, 어디에서 죽을 것인가? 마지막 인생을 살아야 할 곳이 어디인가 고민했다. 바다가 있는 고향에서 한적하게 낚시를 즐기며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너무 외로울 것 같았다.


나는 거제도가 조용히 살기에, 또한 즐기면서 살기에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깊은 바다와 면했고

외국인 친구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선주사 매니저가 된 그들이 나를 외면한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꼭 프랑스 친구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프랑스나 지중해를 면한 어떤 나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선 반듯한 직장이 있어야 했다. 그러한 성공을 위해선 매번 공사판에서 어줍잖은 조공으로 지낼 순 없었다.


다시 알제리를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계획은 최근에 완전히 접었다. 실력도 모자랐지만 오만하게 그럼에도 잘할 수 있다던 자만심을 버렸다. 그렇다고 긍정적이며 즐거운 마음까지 버릴 순 없었다. 아직 발전시키지 못한 나를 되돌아보고 더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한국 사회의 수직적인 문화에 스며들거나 죽도록 일만하며 아무 소리 못하는 의식 없는 노동자로 사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에 나다운 모습,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자영업에 눈길을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노동자의 삶이었고 그것을 벗어날 길은 막연했다. 그렇게 최근에 스마트팜 프로젝트 매니저 면접에서 떨어지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레자 가이드도 얼굴도 보지 않고 당근 톡만으로도 오만함을 눈치 챈 담당자에 의해서 컷트 되었으며 알제리 대형 프로젝트 지사장의 도움으로 면접을 보려했던 의도도 물건너 가버렸다. 다 제 팔자려니 했다.


이러한 내 일상에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의 신축 연구동 공사에 배관공으로도 열심히 일해서 배관사가 되길 바랬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적극적이지 않았던 노력 탓도 있었겠지만 킥보드를 타다가 넘어져 팔, 다리, 어깨를 다치는 골절상을 두 번이나 당했던 것은 물론, 네 번에 걸쳐 부당한 해고를 당했던 이유도 있었다. 부당하다고 판단되었던 해고는 2개월만에 네 번에 걸쳐 일어났다. 네 건 모두 지방노동위원회에 진정을 넣었다.


경기지방 노동위원회


가장 먼저 일어났던 부당해고 아산종합건설이라는 회사였다.

긴 겨울을 HPC 현장, NRD-K 현장의 배관공으로 6개월을 보내고 난 후였다. 중원엔지니어링이란 처음 들어본 회사의 시스템은 그 동안 평택, 고덕, 기흥 현장을 다니면서 만났던 세일 이엔씨, 세보 엠이씨 같이 멋진 회사들처럼 썩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었던 기준은 회사가 노동력을 얼마나 착취하느냐, 착취를 위해서 노동자들을 얼마나 감시, 통제하느냐에 있었고 그에 따른 복지도 당연했다. 이들 회사들은 노동자들이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한번씩 개인 볼일이나 병원 등을 가는 것을 다른 회사들처럼 심하게 통제하거나 감시하지 않았다. 일은 모두 열심히 하는 것이고 좀 어수룩하고 모자라도 역량을 탓하지 않았다. 팀원들도 그런 영향력 덕분에 크게 트러블이 날 일이 없었으므로 나중에 이동할 시기가 되면 스스로 그만두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아산종합건설의 물량 팀장은 결근이 잦았던 나를 해고했다. 물량 팀장은 조용하고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그가 고용한 팀리더와 다른 동료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해고하라고 팀장에게 고자질했고 자신의 일이 아닌 일에 갑질을 시전하는 것은 물론  화장실 가는 것도 보고하게 했다. 마음대로 화장실을 가며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작업장소를 비운다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그러지 않았으나 갑질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던 일로 자체 종결했다. 그러나 팀장이 나를 해고한 원인은 인원 감축이었다. 이제 막 들어와 1개월 넘은 팀이 인원을 감축한다는 것은 말이 안됐고 절차와 방법을 무시한 처사였기 때문에 사람 좋던 팀장에게 내가 프랑스 올림픽을 위해 파리로 떠나는 5월 중순까지만 일하자는 부탁에도 해고를 공식화 했다. 그렇게 아산종합건설의 사장과 현장 소장을 마주한 경기지방 노동위원회에서 나는 보기 좋게 기각 당했다.


기각의 사유로


-      1일 단위의 일용계약 관계

-      근태불량, 두 번의 지각, 2개월 간 9일 결근

-      계약 기간 만료


등이었다.


따라서 대법원의 법리에 대한 판단을 첨부하여 1일 계약 일용직, 팀장에게 고용과 해고의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명시했다. 하루짜리 계약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중간착취 배제 위반으로 신고를 한 하이테크 알파의 팀장을 노동부에서 만났을 때, 아산의 계약서를 확인하면서 처음 알았다. 그 이전엔 한달짜리 계약서가 윤석렬 정부 들어와서 노동경시 문화로 1일짜리 해고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아프리카 등지에도 최소 3개월짜리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에 비하면 한국의 노동 문화가 얼마나 미개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계약서도 존재한다는 자체가 경악스러웠다.


지노위에서 사용주 대리 위원은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가당찮은 어투로 위와 같은 내용으로. 공격적인 질문을 했다. 그 위원은 또한 시스템이 어떻든 일용직인데도 왜 부당해고로 신고했는가? 왜 해고 당했다면서 해고 당한 후가 아닌 작업 중에 신고했는가? 등의 질문을 경멸적인 시선과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당당하게 그의 어투를 받았다. 내가 조금 영악하고 주도면밀 했다면 위원의 마음에 들 수 있게 신고했을 수도 있었다. 는 식으로 답변했다. 그 와중에 아산종합건설의 대표는 뭐가 급했는지 물량팀장이 상용직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그도 나와 같은 하루살이 일용직이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정말 그렇다면 아산은 정말 좋은 회사라고 인정하고 회사에 사과할 용의가 있었지만 그럴리가 없었다. 모든 현장의 물량 팀장은 불법하도급이나 불법파견의 경향을 띠고 있었고 그 과정을 교묘하게 감추어 정확한 증거물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 노동부 사법경찰관이 조사만 한다면 얼마든지 잡아낼 수 있었지만 한국에선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 외에도 국책 사업인 반도체 현장의 경우, 국가 세금이 많이 들어간 이유로 타 현장에선 필요 없는 직업군들이 생겨 났는데, 대표적인 직군이 유도원, 화재 감시자, 안전감시자 등이 그랬다. 그들의 일급은 일일 125,000원으로 동일했고 숙식이 제공됐다. 힘든 일을 못하거나 쉬운 업무를 찾는 사람들, 특히 가정주부도 쉽게 일할 수 있는 이런 직군은 어느 현장에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반도체 현장엔 여자들도 많았다. 그들도 대부분 막 생겨난 신생 안전업체들에게 고용되어 일했고 쉽게 들어간 만큼 쉽게 그만 뒀다. 대신 그들은 회사가 직접 고용한 하도급 직원들이었기에 숙식제공은 물론, 최저 시급보다 높은 급여로 연장, 야간까지 포함하면 일반 시급으로 받을 수 없는 고임금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휴게소는 주황색의 유도원, 빨간색의 화재 감시자가 대부분 차지했으며 그들이 노동부 취업비율에 포함되기도 했으니 함부로 해고시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 대부분 잘 알고 있었다.


기흥삼성반도체 현장, 점심 먹으러 출구를 나가기 위해 몰려 있는 노동자들


경기 지노위의 심판사건 처리결과서를 받았을 때, 필자는 중앙노동위원회를 사건을 끌고 가기를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불법파견이나 불법 하도급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와중에 세 건의 부당해고가 동시 다발적으로 한 달여 동안 이뤄졌다. 필자가 부당해고에 대응하는 이유에는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다. 노동 현장에서 부당해고 건에 대해 이미 여러 번 이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모든 증거자료를 확보했다. 노무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 여러 명 만났지만 아무도 이 사건은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해고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단지 보다 정교하게 하기 위해 맑은 정신을 가다듬어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최근엔 배관을 떠나 비계 작업을 하기 위해 반도체 현장의 하청업체 세 곳에 입사했다. 가장 먼저, FM 이엔씨라는 업체였다. 계야서를 쓰고 다음 날 아침 교육을 마치고 곧장 현장에 투입하기로 한 그 날 저녁, 7명이 모두 입사 취소가 되었다는 연락이 와서 신고를 한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하이테크 알파라는 곳이었다. 들어간 첫날 무릎을 다쳐 절뚝거리면서 4일을 일한 뒤, 무릎이 아파 병원 진료를 받고 일주일 요양 진단을 받았는데 근태로 해고시켰다. 팀원은 대기방지라 9층 건물 옥상에서 일했다. 나는 이 높은 곳이 일하기가 얼마나 열악한지 잘 알고 있었다. 같은 건물 9층이라면 엘리베이트를 타고 올라가면 된다고 쉽게 생각하겠지만 엘리베이트는 언제나 사람이 몰려 대기 줄이 길었다. 때문에 차라리 걸어 올라가는 편이 나았다. 그러기 위해선 더 빨리 출근해야 했다. 진짜 문제는 9층에서 내려오려면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화장실은 6층에 있었고 담배를 피우려면 1층까지 걸어갔다 와야 했다. 평택에서는 화장실에 다녀오려면 최소 40분이 걸렸다. 중간에 지린 날도 여러번 있었다. 건물 중간이나 모둥이에 흡연장을 만들면 될 것을 만들지 않았다. 흡연장을 설치해 달라고 하자 관리자가 짜증을 냈다.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에게 반말로 업무지시를 하고 삼성 관리자와 더불어 노동자들의 일하는 모습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노동자들은 쉬지 않고 일했다. 그런 회사였다. 물론, 물량팀장이 고용과 해고의 권한을 회사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었다.


세 번째로 두손건설이란 곳이었다. 이번에는 1층과 4층 사이를 다니며 비계 설치를 하는 업체였기 때문에 3주 동안 결근 없이, 팀원들도 너무 좋아 업무 효율도 좋았다. 맡은 역할도 좋아 일을 배우기에도 좋았기 때문에 필자에게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결근이 없던 이유가 당뇨 약을 달리 처방했기 때문이었다. 잠이 편해지고 중간에 깨어 잠을 못자는 일이 없으니 컨디션이 좋았다. 비계의 단가 180.000원은 다른 배관이나 전기 업체보다 얼핏 보면 높아 보였다. 그러나 다 눈속임이었다. 일비라는 출퇴근과 식사 비용을 포함한 금액이었기 때문에 배관 업체보다 못했다. 게거품 물고 일하는 업무량과 감시, 감독의 체제 하에 일하는 것에 비해 그랬다. 그런데, 두손건설은 오전에도 담배 필 시간, 오후에도 공식적인 휴식 시간 30분이 있어 좋았다.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은 타 업체들 모두 오후 2시까지 일하는 토요일에도 5시까지 일을 시킨다는 거였다.


두손은 불량 발판 및 자재 공급으로 삼성물산으로부터 작업 정지를 당했다. 그 날 오전 작업만 하더니 토요일 휴무, 월요일도 휴무 시키더니 화요일에 네 팀을 해고시켰다. 팀원들이 난리가 났다. 유도원을 하다 온 팀원이 욕 짓거리를 하며 부당해고로 신고하고 동의했다. 팀원 6명은 필자를 대표로 세워 단체 부당해고 구제 신청에 들어갔다.


최근들어, 기흥 반도체 현장은 인원이 넘쳐났다. 공정이 정점을 치닫는 덕분이기도 했지만 평택의 반도체 현장이 셧다운 되어 노동자들이 몰린 이유도 있었다. 물량팀장들은 어떻게든 이익을 남기려 단가는 싸게 광고했다. 심지어 출퇴근 비용으로 회사에서 주는 3만원의 비용도 중간에서 5천원씩 착복했다. 전기 업체는 아예 지불하지 않거나 1만5천씩 착복했다. 아예 주지 않는 곳은 더 많았다.


 노동부는 근로 개선에 관심이 없었고 갑질 건은 사내 자체 개선책으로 있는 것이 없었다. 사회는 경찰 없이도 알아서 정리될만큼 한국은 성숙했다. 경찰이 저지른 비행이 실제로 일어나는 범죄들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럴수록 조직의 비리를 덮기 위해, 정당화 하기 위해 경찰을 영웅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어 우상화 하는 것처럼 노동부는 노동의 질서는 관심 없이 온갖 부정부패가 찌들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사회를 모르는척 살아가는 것은 정말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외노자 부당해고


거제도 옥녀봉과 한화오션


 꾸준한 10km 조깅으로 지방을 제거하며 점점 배에 빨래판이 보이는 것 같았다. 파리를 가야만 했던 5월이 지나 파리 올림픽 동안 파리에서 에어비엔비를 하겠다던 플랜은 물 건너 갔고 9월 지나 실업급여 받으면 산업안전관리나 크레인 자격증을 따겠다는 계획도 3개월동안 일을 못한 관계로 점점 계획에서 멀어져 도대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 그런 와중에 하이테크 알파의 답변서를 받았다. 필자는 노무사를 찾아 세 건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다른 건은 승산이 없다며 하이테크 알파 건만 받았다. 그것만 할 거였으면 혼자 진행해도 괜찮았을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하이테크 알파는 아산종합건설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 자료를 제출했다. 아산 종합건설에서 제공한 급여 명세서에서 확인한 자료로 중앙노동위원회로 가져 갈 증거자료가 완성됐다.


어느 날, 조깅을 하고 있는 와중에 카톡으로 거제도 한화오션에서 튀니지 출신의 노동자 한 명이 부당해고를 당했으니 도와 달라는 요청이 왔다. 최근에 조선소 고용 부양을 위해(정확하게는 부동산 부양을 위해) 100만원씩 지원하는 조손업도약센터 플랜에 지원했을 때, 카타르 페트롤럼의 하청 NOC의 Gallaf 프로젝트에서 튀니지 부부를 만나 적이 있었다. 북아프리카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중에 가장 유럽에 가까운 나라가 튀니지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지만 알제리와 같이 원주민인 베르베르와 침략자인 아랍이 섞인 나라였다. 비교적 아랍 색깔이 적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지만 사실, 3국은 문화적, 종교적, 역사적인 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 정도만 알았다. 부부는 어느 유럽인들보다 뜨겁게 놀았고 여자의 마인드는 과연 프랑스 여성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의상이 필요 이상으로 야했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만나 같이 커피를 마시면서 다양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으니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마침 해고당한 팹타는 경기도 근처 친구 집에 와 있었다. 그는 곧장 내가 있는 서천으로 오겠다고 했으므로 저녁에 치킨 집에서 만났다. 체격이 좋고 훤칠한 친구는 불어를 못하는 친구와 함께 왔다. 친구가 러시아인처럼 생겼다며 농담으로 인사를 건넸다. 얼핏 보기에도 노동이나 하며 살 놈들이 아니었다. 팹타는 튀니지에서 사업을 하다 사고를 저질러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외노자들 중에 모로코 출신도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알제리에 호의적인 이유는 스킥다 프로젝트에서 만난 소나트락 매니저들의 신사다움과 호의에 대한 호의였다. 물론, 그곳에서 사랑에 빠졌던 그녀와의 추억도 있었고 그들과의 깊은 유대관계도 한몫 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청년들은 오만하고 무례했으며 건방졌다. 재수 없는 언행이 묻어나는 젊은 친구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만난 두 명의 알제리 젊은이들은 한국어가 유창했다. 하나는 삼성엔지니어링에 다녀 한국 여자와 결혼했고 한 명은 한양대를 다니며 한국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 둘은 오만했으며 건방지고 재수 없음이 흘러 넘쳤다. 그들은 어디서 미소를 짓고 어디서 얼굴을 붉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지 잘 알았다. 필자는 알제리 전력플랜트 프로젝트에서 발주처인 CEEG의 젊은 PM에게 해고 당한 전력이 있었다.


남자들은 여자가 기독교든 상관없이 결혼했지만 여자들은 남자들이 개종하지 않으면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다. 남자들이 세계를 다니며 여자들을 농락하며 종교를 농락하는 사이, 그들은 알라의 위대함을 외쳤으므로 이슬람이 얼마나 가당치도 않은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나라에선 눈치 보며 하지 못하던 짓을 남의 나라에선 집 떠난 중생의 자유를 만끽했다. 팹타는 그런 부류였다. 그리곤 마치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냥, 튀지지에서 자신이 사업을 했고 한국에 와서 자신 같은 일급 기술자를 일당 15만원에 착취한다고 거드름을 피웠다. 튀니지에선 상상할수 없는 돈을 벌면서도 말이다. 그의 튀니지 급여는 고작 70~80만원이 고작이었다. 하청업체 사장 급여가 200 정도였다.


 한국 여자와 사귄 전력을 자랑 삼으며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나는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 작업자들의 급여를 깎기 위해 기업이 데려온 외노자들의 수준이 이러했다. 피해는 모두의 몫이었다.


대화를 진행하는 사이, 지나는 여자들의 엉덩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을 앞에 두고 할 짓이 아님을 알텐데 언행에서 오만함이 묻어났다. 그의 얘기는 내가 당했던 얘기였다. 그랬으므로 새로울 게 업었다. 물량 팀장은 회사에서 불러온 외노자들을 위한 주거를 제공하고 한국인 기공에게 20만원이 들어가는 돈을 15만원에 계약해 가장 어려운 작업들을 맡겼다. 회사는 어려워졌고 사라졌다. 원청이 하청을 죽이는 방법인 능률제는 하청에게 지급할 인당 35만원의 계약금이 아니라 월간 공정을 얼마나 진행했느냐를 따지는 능률제로 보통 50%나 60%의 기성금만 지급했다. 그러므로 하청은 점점 직업소개소가 되었고 위험한 일은 물량팀장들에게 떠안겨 모든 법적 위험 요소들을 피했다. 물량 팀장들은 불나방이었다. 자신들만큼 일하라고 다그쳤으며 인원을 최소화하기  위해 인건비를 아꼈다. 여전히 특수건강검진비용을 착복했고 팀단가로 착취의 기쁨을 누렸다. 바뀐게 없었다.


팹타의 팀장은 나머지 튀니지인들을 다른 업체에 데려 가는 대신에, 누가 보기에도 오만한 팹타는 해고시킨 거였다. 회사가 없어졌으니 해고 수당을 주지 않아도 되고 집에서 내쫓기도 쉬웠다. 팀장은 외국인임을 이용해 ‘너를 도와줄 한국인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같은 한국인에게도, 그가 나이가 많아도, 가정이 있어도 그럴 팀장들이었다. 어디에도 많았으므로 외노자를 탓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물량 팀장에게 문자를 남겼다.

{조선소에서 당한 일이 많아 당연하게 그런 사람으로 보고 팹타의 일은 저의 일과 같습니다. 앞으로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을 시, 형사 고소까지 각오해야 할 겁니다}

팀장은 내가 누구냐고 금방 연락이 왔다. 프랑스어 통역가라고 말하고 좀 전에 만나 전후 사정을 들었으며 앞으로 진행될 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조선소하청지회에 연락을 취해 법률적인 도움을 받게 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한 거였다. 나머지는 절차에 따라 하청지회에서 다 맡아 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팹타는 프랑스식 교육을 받아 절차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결과가 나오려면 또한 오래 걸리는지 알면서도 내게 빠른 일처리를 요구했다. 호의를 권리로 생각하면 벌어지는 일이었다.


[한국인들은 너의 언행에 익숙치 않아. 나도 그렇고. 우리는 너의 비서가 아냐. 주의해]


팹타는 움직일 돈이 없었다. 우리나라 돈의 값어치는 형편없다. 손에 들어오기 바쁘게 물새듯 해서 모으기가 쉽지 않은 소비의 나라라 팹타처럼 소비가 크면 돈이 없을 것이 당연했다. 50만원을 빌려주었다. 그 돈으로 울산으로 이동해 금방 일자리를 구했다. 사건 해결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팀장은 배째라는 식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회사로 들어가 그대로 물량 팀장을 했으며 해결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청지회는 통영노동지청에 임금체불, 해고 수당, 부당해고 건으로 의견을 전달하여 조서를 꾸민 상태라 진행 절차를 기다려야 했다.


나는 곧 아산종합건설을 불법파견과 중간착취 배제 위반으로 신고했다. 그리곤 중앙노동위원회에 불법파견과 중간착취 배제를 위반한 같은 일용직이 고용과 해고를 했다는 자체가 불법인데 정부가 불법을 옹호할 수 없다며 부당해고 인정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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