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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업계포상 Sep 28. 2017

핫초코 먹고시풔우엉

작은 이야기

 습한 방의 가장 구석진 곳, 옷장을 기대어 누운 등짝이 욱신거렸다. 갈라진 뺨께로 바람이 스쳤다. 뜨거운 이마는 차갑게 미적지근했다. 붙여 놓은 쿨링패드는 열을 뺏는 건지, 기운을 뺏는 건지. 아무튼 뭔가가 빨려 나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좁게 나있는 창문 틈으로 비가 쏟아졌다. 쏴아, 쏴아아아 공간의 빈틈보다 빗물이 더 가득한 여름날의 장마거늘, 나만은 아직 겨울, 누런 콧물을 질질거렸다. 쿨쩍- 들이마신 콧물은 그대로 목구멍을 통해 넘어갔다. 으슬으슬한 공기에 두툼한 솜이불을 바짝 끌어안았다.


 이불에서는 눅눅한 비 냄새와 시큼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나는 몸을 둥글게 만 채 이불에 폭 쌓여 들었다. 내 팔뚝에서도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이대로 가만히 잠들고만 싶었다. 하지만 잠들 수 없었다. 나는 꼭 먹어야 했다. 사람의 의지란 정말로 대단한 것이어서, 쿨쩍-, 이불을 놓지도 못하는 주제에 먹고픈 건 꼭 먹어야 했다.

 

 이불을 잔뜩 끌어안고 일어났다. 피부를 스치는 이불은 쓰렸다. 채 가려지지 않은 발목 틈으로 찬바람이 파고들었다. 발이 이리앙상했던가? 아니, 앙상한 것은 비바람. 한 여름인 주제에 오늘은 춥다. 쿨쩍-


 “으으 죽겠다.”


 띵한 머리. 두툼히 부푼 발바닥.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징징 온몸이 울렸다. 하지만 나는 먹어야겠다. 그래야만 나을 것 같았다. 집념은 냉장고를 열었다. 성에 머금은 삭풍이 휘휘 불어 나왔다. 쿨쩍- 이제 고지가 코앞이었다.


 “으으”


 몸을 멀찍이 둔 손길이 하얀 우유팩을 잡자, 손끝부터 찌르르한 냉기가 퍼졌다. 맨투맨 소매를 바짝 당겨 감싸 쥐었다. 때문에 드러난 빗장뼈가 추위에 놀라 움푹 들어갔다.


 “끄응-”


 냉장고 문은 쿵하는 소리를 내더니 쩌적 달라붙었다. 나는 몸을 돌려 가스 불을 켰다. 우유 주전자 밑으로 번지는 가스 불에 손을 녹였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 이번엔 또 너무 뜨겁다고 난리다. 정말 인내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몸이다. 갈무리한 손이 뜨거워 귓불이며 목 뒤에 연신 비벼대다가, 찬장을 열어 잔을 꺼냈다.


 “이크.”


 생각보다 힘없는 팔이 휘청, 잔을 깰 뻔했다. 안 될 일이야. 쿨쩍-, 치울 힘도 없는데. 다시 한번 찬장을 뒤적여 코코아 파우더를 떠 넣었다. 폭- 공기 중으로 터져 나오는 파우더에 콜록… 콜록 키엑 켈록 쿨럭쿨럭 덕분에 폐가 당길 때까지 기침을 내뱉었다. 이제 내 삶에는 죽느냐 먹느냐, 그 두 가지만 남았다.


 ‘그리고 마시멜로가….’


 으으 젠장. 왜 나는 미리 마시멜로를 떠올리지 못했는가? 난 다시 냉장고 앞에 섰다. 젠장, 젠장. 젠장! 나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먹느냐, 혹은 죽느냐 밖에. 이불을 바짝 여미고 문을 열었다. 여민 만큼 드러난 정강이가 시려댔다. 불어 터진 몸뚱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 마시멜로를 꺼내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속도에 짓눌린 바람이 더욱 매섭게 휘몰아쳤다. 쿨쩍- 되는 일이 없다. 다시 마시멜로를 넣을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진다.


 ‘아, 아냐. 내일 넣자. 내일.’


 이젠 즐기는 것뿐이다. 마시기 전부터, 따뜻한 온기와 달콤한 향기로 만족을 주는 것은 물론, 한 입 머금으면 부드럽게 입안 곳곳으로 퍼져 사르르 녹아내리는, 떠나간 자리마저 기분 좋은 여운이 감도는 나의 사랑, 핫초코를.

 막이 생기기 직전까지 데운 우유를 붓고, 정성껏 젓는다. 시커먼 가루들은 퍼져 보드라운 갈색이 되어간다.


 “음-.”


 콧물뿐인 얼굴에도 한 조각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이미 완벽한 이 녀석에게 화룡점정, 하이얀 점을 찍는 게 남았으니까. 팡- 남극에서 구출해온 마시멜로를 열었다. 집에서 먹는 거니 통 크게 한 줌 때려 넣었다. 다 잠기지 않는 마시멜로를 스푼으로 꾹꾹 눌렀다. 달콤 쌉싸래한 카카오의 향기가 보드라운 마시멜로의 향을 만나 기분 좋게 풍겨온다. 그래, 나는 이 순간을 위해 버텨온 것이다.    


 나는 다시 방으로 가 구석에 기댄다. 옷장에 등을 대고 앉으면, 구석진 곳이 그리도 안락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손에는 핫초코가 있지 않은가. 습기가 가득한 날이라 그런지 하이얗게 김도 피어올랐다. 그 완벽한 순간에, 헤헤 웃음을 터트렸다, 누런 콧물 나온 채로.


 쿨쩍- 다시 콧물을 집어삼키고, 쿨쩍-, 쿠르륵- 씁씁- 콧속과 목구멍을 완전히 비웠다. 완벽한 음료를 위한 준비. 흐으음- 다시 한번 향을 맞고는 다가간다. 뜨거운 녀석에게 더 뜨거운 입술로.    


 “철퍽.”    


 그리고 내가 자주 말했었지? 이 빌어먹을 세상은 한 번도 내 편인 적 없었다고. 시원하지도 뜨끈하지도 모르겠던 쿨링패드 놈, 마시멜로 위로 자유 낙하한 것이다, 젠장. 덕분에 내 솜이불에 달달한 향이 풍기는 것이 제가 목화가 아니라 모카인 줄 아는 모양이다, 젠장.


 아냐 아직 괜찮아. 먹을 수 있을 거야. 어차피 여긴 나 혼자 뿐이라고. 그냥 건져내고 먹으면 돼….

 무거운 걸음을 다시 싱크대로,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스푼을 들어 쿨링패드를 건져냈다. 희끄덩 히끄덩 얄미운 놈이 나오지는 않고 텀블링을 구른다. 아주 녹차처럼 잘도 우러나오겠구먼 아주.


나는 잔을 기울여 쿨링패드를 밀어냈다. 덩달아 떨어지는 한 모음의 핫초코가 아쉬웠다. 심장을 파먹는 이별을 뒤로하고, 눈물 대신 콧물 한 줌을 떨어트린 채, 다시 방으로 와 등을 구석에 박아 넣고, 드디어 한 모금….


 -푸우우웁


 저, 저기 내가 만든 게 핫초코가 아니라 민트 초코였나요? 어째서 입 속이 이렇게 시원한 거죠? 말이 씨가 된다는 빌어먹을 속담을 이렇게 체험하게 될 줄이야. 별 효능도 없던 쿨링패드 놈, 우러나긴 정말 드럽게 잘 우러났다. 박하보다 산뜻하고, 스피아민트보다 화-한 맛이라니….


 하… 핫초코 한 잔 먹기가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일어날 힘도 없는데…. 콧물 같은 우울감이 끈적거리며 밀려왔다. 좁아터진 창밖으론 쏴아아 빗소리 얄밉게 두드려댔다. 하지만 역시, 나는 핫초코를 먹어야겠다. 시원해진 입속만큼 무거워진 머리를 쳐들고, 다시 파우더를 한 스푼 넣은 다음에 다시 한번 남극에서 우유를 구출해냈다.


 ‘후후, 완벽해 잭슨. 이젠 먹을 수 있는 거야.’


 뿌듯한 의지에 차 주전자에 우유를 붓는다. 콸콸!! 이 아닌 조르륵…? 우유는 채 두 스푼도 안 될 만큼의 양을 뱉어내고는 멎어버리고야 말았다. …….


 “이게 무슨…”


 쉬어 터진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떨어졌다. 시린 육체와 무거운 이불. 우울한 빗소리와 앙상한 바람. 끈적거리는 장판을 디디고 선 두툼한 발바닥. 오늘의 핫초코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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