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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업계포상 Oct 14. 2017

우리, 특별해질 수 있을까?

상상 더하기

“뭐해요?”


은퇴한 락커라도 되는 걸까? 허스키를 넘어 스모키라 칭할 만큼 걸걸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고개를 든 곳엔 네가 서있다.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모습으로. 여전히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에는 스무 살의 어림이 넘실거렸다.


“어, 네가 웬일?”

네가 답했다.

“공부하러 왔죠. 누구랑 공부해요?”

막걸리 냄새가 폴폴 날 것만 같은 건들거림, 하지만 곱고 동글동글한 얼굴. 그 괴리.

“난 혼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내 앞자리로 외투를 던져 넣었다. 이미 작심하고 있었던 듯, 자연스럽다.

“오, 그럼 나도 같이. 잘 됐네.”

전설로만 들어오던 반 존대가 눈앞에서 펼쳐졌다. 이런 걸까? 이런 기분인 걸까?

“아, 음. 그래….”


하지만 그녀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가버렸다. 그래, 전설은 언제나 전설로 남아있을 뿐이다. 분명 책을 보는데, 귀만은 쫑긋쫑긋 그녀에게 향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그녀 다운 음료다. 다시 돌아오는 모습에, 구태여 의연한 척 책을 들여다보았다.


“공부할 만해요? 어떻게 하면 돼?”

밝게 밀고 들어오는 목소리, 미소. 살짝 들어가는 보조개. 아, 좋은 타이밍이다.

“난 뭐, 하루에 하나씩 해놨지.”

세상 이렇게 재미없는 놈이 있을까? 그래, 그놈이 바로 나다.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자괴감은 아직이다. 이렇게 재미없는 대답에도 그녀가 말을 이었으니까.

“아 진짜? 난 그럼 이미 늦었네?”

어찌 그리 상큼하게도 내뱉는단 말인가? 이미 마음이 움직여버린 나는 이런저런 팁이나 주절거렸다.


“프로이트 봤어? 거기 나온다는데.”

“아니, 아직. 여기 다 파랗게 그어놨지! 나 잘했죠?”

윽, 노트를 펼쳐 보이는 그녀. 다시 한번 그 미소, 폭신한 보조개. 당장에 그 볼을 살포시 눌러 잡으며 오구오구를 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어떤’ 사이라면.

“오냐, 잘했다.”

하지만 세상 제일 재미없는 놈의 답변은 이게 최선이었다. 그 작은 칭찬에도 취한 걸까? 아니면 그저 밝은 사람인 걸까? 그녀는 아침을 맞은 종달새처럼 재잘거렸다.


“아, 오늘 공부하려고 별 다방 갔는데, 자리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여기도 이 층까지 가 보고 자리 없어서 나가려다가 선배를 봤죠. 다행, 진짜 시험기간에는 사람 너무 많다니까요?”

나는 나름 훈남의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치고 있지만, 조금 서럽다. 결국 자리가 없어서 나에게 온 거구나.

“아, 잠깐만요.”

울리는 진동 벨에 그녀가 튀어나갔다. 허망함에 젖은 표정을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 진짜 어제 잠도 하나도 못 자서 완전 피부 푸석푸석, 죽겠다!”

돌아온 그녀의 입은 여전히 바빴다.

“피부 좋기만 하고만 뭘.”

아닌 듯, 또 아닌 듯 조금씩 던졌다. 우리의 대화가 잠깐 스쳐가는 이벤트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기에. 그렇다. 나는 너에게 어떤 특별한 존재… 그래, 선생이 되리라.


“교수님이 문제 어떻게 내는지 알아?”

“아뇨. 난 처음이잖아.”

“빈칸 문제 좀 나오고, 객관식 나오는데, 객관식은 좀 쉬워.”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우리는 가까운 것만 같다. 또 무언가 시작될 것만 같다. 그녀의 반 존대는 그만큼의 설렘이 있었다.


하지만 아까 뭐라고 했었지? 그래, 전설은 전설로만 남는 법. 그녀의 말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눈은 나 대신 책만 보기 시작했다.

“…….”

“…….”

그녀의 목적은 끝난 걸까? 마음이 급한 것은 나뿐이었다. 그 덕에 이렇게 되지도 않는 얘기나 떠드는 게지.


“그래서 오늘 몇 시에 간다고?”

“응?”

“그, 뭐 간다며?”

“아, 7시.”

짧은 문답이 끝나고,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아쉽다. 어떤 말이 좋을까? 어떤 주제면 오래 떠들 수 있을까? 내가 방해되지는 않을까? 결국 그것밖에 안 되는 나는 집중되지도 않는 종이 위로 눈을 돌린다.


“아 선배, 이거 뭐야? 모르겠어.”

포기만 하려 하면, 언제나 네가 다가왔다.

“응? 아, 이거?”

별 수 있나. 천천히 설명이나 해야지. 지금 내 포지션은 딱 좋은 선배, 그뿐이니까. 하긴, 아직은 이 정도여도 괜찮지. 음… 근데 진짜 딱 그 정도일까?


짧은 설명으로 시작된 문답이 또 주변의 얘기로, 내 애기로 한참을 맴돌았다. 이 밝디 밝은 여자는 같이 말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색채를 바꾸었다.

‘아, 그런데 그건 내 음료…’

심지어 내가 물었던 빨대인데… 당황하는 찰나, 그녀는 이미 빨대를 물었다.


‘아, 이런, 냄새나면 어쩌지?’

‘아… 젠장.’

‘근데 이거 간접키스 아냐?’

‘저 빨대를 내가 또 쓰면….’

‘아, 아냐. 너무 변태 같잖아.’

‘그렇다고 버리는 것도 이상한데….’


“아, 나 자꾸 이거 먹을 뻔.”

내 상상이 정말 결혼까지 생각하고 난 후에야 그녀는 내 음료를 가리켰다. 분명히 말하자면,

“너 이미 먹었어.”

푸훗 웃음이 터졌다. 아, 맑은 웃음이다.

“아 진짜? 어쩐지 갑자기 입이 달더라.”

그녀의 미소에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말도 안 했다.”

“진짜? 나 아냐. 아직 안 먹은 거 아냐? 거짓말이죠.”

“크크 여기 봐봐.”

선명한 립스틱 자국. 우리는 한 바탕 웃지만, 난 여전히 긴장해있다. 우린 친하다. 하지만 단지 친한 걸까? 너와 친한 건 너무 좋지만, 단지 친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또 이야기꽃을 피웠다. 연신 웃는 얼굴이 좋았다. 공부 따위는 이미 과거의 영광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너의 공부엔 도움되고 싶었다.

“학원 갔다 와서도,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봐.”

“오, 땡큐지.”

넌 씨익, 짓궂게 웃었다. 아아, 보상은 이미 충분했다. 더 바라는 게 있다면… 내가 계산해도 좋으니 같이 밥이나 한 끼 하는 것. 둘이서 밥 먹은 적은 이미 있지만, 본격적으로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올까? 아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테다. 너는 누구에게나 살갑고, 나에게는 용기가 없으니.


나는 바라본다. 너 머무르다 간, 허름한 소파를.




카페에서 마주쳤던 옆자리 커플을 보고, 약간의 상상을 더 해봤습니다. 비록 씁쓸하게 끝맺은 글이지만, 현실의 두 분은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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