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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실 May 30. 2022

도망가고 싶은 날, 나는 충분히 좋은 엄마야

엄마를 위한 그림책 '도망가자'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이에게, 걱정은 내려놓고 함께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자고 말합니다.



‘하아. 오늘은 쉽지 않겠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가 하는 말 몇 마디만 들어도, 그날 하루가 점쳐질 때가 있다. 아이의 목소리 톤이 평소보다 높거나, 목소리에 투정이 섞여 있거나, 엄마를 많이 부르는 날은 일단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하루를 시작한다.


‘지금 아이의 상태가 왜 그럴까?’ 한때 원인을 열심히 찾아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고, 아이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하다못해 밖에 비가 오는지 내다보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찾다가 결국 든 생각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였다. 나도 가끔 이유 없이 기분이 들뜰 때가 있고, 내 기분이 왜 그런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하물며 아이의 상태가 왜 그런지 내가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요즘엔 애써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며칠 전, 아침부터 아이의 목소리가 묘하게 거슬렸다. 너무 신이 난 것 같기도 하고, 들뜬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흥분 상태였다. 나는 몸살 기운이 있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오전 11시밖에 안 되었는데 내 고막은 이미 피곤함을 호소했다. 성난 고막을 달래기 위해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음악을 틀고 가만히 따라 부르며 집안일을 했다. 이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니, 정말 어디라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둘째 아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 남편에게 첫째 아이를 맡기고 집을 나섰다.


코트 주머니에 고디바 초콜릿 두 개를 넣고, 가방에 노트북과 그림책 몇 권을 챙겼다. 짧은 자유 시간이 생기면, 늘 서점이나 도서관에 갔다. 책 기둥에 적힌 제목들을 눈으로 훑어보다가, 궁금한 책을 꺼내어 펼쳐보고 다시 꽂아 넣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잔잔해졌다. 서점 쪽으로 가다가 도서관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며칠 전에 아이들과 도서관에 갔다가, 1층 카페에서 휘낭시에를 먹었었다. 하나 더 먹고 싶었지만, 아이들을 챙기느라 마음을 접었다. 갑자기 그 휘낭시에를 원 없이 먹고 싶었다.



도서관은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3층까지 있는 꽤 큰 도서관이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외관도 멋있고, 내부도 깔끔하다. 노트북이 든 가방을 탁자에 내려놓고 책장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제야 굳어 있던 얼굴 근육이 조금 말랑해졌다. 도서 검색이 가능한 컴퓨터를 찾아 ‘도망가자’를 입력했다. 가수 선우정아의 노랫말로 만들어진 그림책이다. 마침 대출 가능 상태여서 위치 안내표를 뽑아 들고 책장을 찾아갔다.


서명: 도망가자=Run with me

청구기호: 818-선66ㄷ


아무리 찾아봐도 책이 없다. 누가 읽고 있는 걸까? 문득 도망가고 싶다며 집을 나온 내가, 도서관에서 ‘도망가자’라는 그림책을 찾아보고 있는 게 우스웠다. 더 먼 곳으로 도망갈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이 정도가 딱 알맞다. 더 멀리 더 오래 떠나봤자 마음은 집 근처를 맴돌 것이다. 나는 결국 ‘도망가자’라는 책을 찾지 못했지만, 책을 찾아 헤매다가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도서관 1층 카페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페퍼민트 티와 다 먹은 휘낭시에 봉지들, 마음 가는 대로 뽑아 든 그림책 네 권이 곁에 놓여 있다. 글을 쓰며, 시끄러운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도망가자’의 노래 가사를 떠올렸다.


너라서 나는 충분해.

나를 봐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나는 지금 존재만으로 충분하고, 아이에게도 충분히 좋은 엄마야.’라고 생각하니 나에게도 봄 햇살이 내려앉았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으로 갈게.”

도망갈 곳이 있는 것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마음이 더 편했다. 애초에 나는 도망을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도망가자’ 책을 주문했다. 그렇게 다시 나에게 빛이 스며들었다.





너무나도 우연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막연한 답답함에 숨을 내뱉을 작은 틈을 내어 보려 시작한 일이었다. 소박하게 일기처럼 시작했던 ‘글’이 어느새 나를 찾는 얇디얇은 끈이 되어주고 있다. 매일같이 타닥타닥 글을 써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타닥타닥’에 ‘토닥토닥’ 위로받는다. 글을 쓰며 생각지 못했던 내 마음을 인정하고 도닥인다. 지나쳐 버린 감상을 되짚기도 하고 잊기 싫은 기억을 묶어 두기도 한다. 금세 흩어져 버리고 말 것들도 글로써 잡아두면 또렷해진다. 무엇이든 글로 남겨 놓아야 성이 차는 이유다.

-김선이, '오늘도 애쓰셨습니다' (김선이 外 9인 작가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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