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깊이 묻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 김사인 '깊이 묻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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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품 속 오래 깊이 묻어둔
푸른 낫 한 자루가 있소
서슬 퍼런 그것이 칼이 아니라
낫인 까닭은 그 날끝이
구부러졌기 때문이오
상대를 찌르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갈고 깎고 다듬기 위함이오
나를 향해 구부러진 그 낫은
지금껏 한 번도 녹슨 적이 없소
쉼 없이 날을 갈아서 나를 깎아서
여즉 단 한 번도 무뎌진 적이 없소
막다른 골목 아니었던 적 없는
삶이 내게 그 낫을 그만 내려 놓으라
허락하는 그날까지
내가 품은 이 낫 한 자루는
여전히 푸르게 빛나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 김사인 '풍경의 깊이' 중에서
https://youtu.be/zbt3QCeMZJk?si=jKx-8B9Z-h0gC0QY
그냥 그렇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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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좋아하는
#시집이품절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