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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May 21. 2023

잠 못 드는 밤

첫사랑(외사랑)


그의 시선은 종종 창밖에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을 곳은 방파제 너머 넓은 바다였다. 누구를 기다리기보다는 이곳에서 나갈 시기를 생각하는 거라고 짐작할 때면 가슴이 저렸다. 핀컬 펌을 한 듯 약한 곱슬머리. 수줍은 듯 웃는 눈과 입. 호리호리한 큰 키. 붉은빛이 도는 베이지색 단벌 양복. 불어 전공자의 영어수업.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는 때론 발음이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며 설명하기보다는 때때로 시선을 창밖 멀리에 두셨다. 다른 동료 교사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선생님에게서는 고독의 향기가 감지되었다.  단층 석조건물의 교실은 칠판을 향할 때 오른쪽에 창들이 있었다. 그 창으로 멀리 등대와 함께 짙푸른 바다가 보였다. 날씨와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펼쳐지는 다채로운 풍경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아이에서 소녀가 되어가는 시간, 그곳에서 이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중학교에 발령받아 오신 젊은 선생님들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오신 분들이 1년씩 계시다 가셨다. 연령이 많으신 선생님들은 교감 발령을 받기 전에 오셔서 2년 이상 머무셨다. 중학생이 되어 과목마다 선생님들이 바뀌니 사춘기 여학생들은 그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했다. 쉬는 시간 수다도 선생님 이야기는 꼭 끼어있었다. 남학생들에게는 당연히 여선생님이 인기가 많았으나 여선생님은 가정 선생님을 포함하여 한 두 분이셨다. 우리의 관심사는 선생님의 외적인 모습, 애인 유무, 성격, 스타일 등이었다. 선생님들의 정보는 선배들로부터 얻기도 했지만 어쩌다 회식이 있는 날은 마을에서 선생님을 본 친구가 목격담을 풀곤 했다. 목격담을 듣고 실망하는 친구, 자기 감이 맞았다는 친구 등등. 그 이야기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선생님들의 모습으로 우리 모두에게 흥미진진했다. 1학년 때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분들은 얼굴이 까무잡잡하면서 잘생기고 분위기 있던 미술 선생님, 얼굴보다는 옷발이 좋았던 국어 선생님, 목소리도 크고 성격이 불같았던 기술 선생님이었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선생님은 친구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1학년은 1반이 남학생반이고 2, 3반이 여학생 반이었다. 영어 선생님은 1반 담임이셨다. 가끔 1반에 심부름을 가서 빼곡하게 앉은 남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선생님께 무언가를 전달할 때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선생님에게만 관심이 있는데 선생님은 당신의 반 누군가와 좋아하는 사이라고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내가 가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아이의 시선을 좇을 거 같아 신경이 쓰였다. 한 번은 서류를 나에게 직접 주시지 않고 그 아이를 호명하여 내게 전달하게 한 적도 있었다. 그 아이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신 것인지, 아님 둘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신 것인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정작 나는 그 아이와 따로 만나 얘기를 나눠본 적도 없는데 우리가 사귄다는 소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그게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봄학기가 지나고 선생님들과 좀 가까워진 후부터는 방과 후에 친구들과 선생님 관사에 가서 선생님들의 방을 청소하기도 했다. 미혼인 선생님들이 사용하시는 방은 한 칸씩이니 청소할 것도 없었지만 우리는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걸레로 방을 훔치고 돌아가기 전에 화단에 핀 꽃들을 꺾어 유리병에 꽂아두었다. 몇 송이 되지 않는 꽃을 더 예쁘게 꽂기 위해 이리저리 시도하는 시간은 방을 훔치는 시간보다 더 길었다. 작은 방이지만 좋아하는 선생님의 방을 볼 수 있고 예쁜 꽃과 향기까지 드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이었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은 선생님 방의 작은 무엇 하나에도 관심을 갖게 했다. 그 당시 나는 선생님이 왜 좋은지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선생님의 수줍은 듯한 미소에서 순수함이 느껴졌고 아웃사이더 같은 느낌이 자꾸 신경이 쓰였었다. 2013년에 고향 남자 동창과 연락이 닿았다. 그 친구의 첫사랑이었던 K선생님의 안부를 나누며 처음으로 그 당시 느꼈던 영어 선생님에 대한 감정을 얘기했다. 그 친구는 영어 선생님과 연락이 끊긴 지 좀 되었다 하며 선생님이 계신 학교를 찾았다.


 선생님과 연결이 되어 J를 기억하시느냐고 여쭸더니.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고...”, “이쁘게 생겼고...”, “OO와 사귀던 아이” 아니냐고 하셨단다. 34년 전의 나를 기억하고 계신 것이 놀라웠고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내가 오랫동안 잊지 않고 선생님을 생각했던 마음이 통했던 것이었을까? 나는 섬에서 중학교 다니는 동안 OO뿐만 아니라 아무도 사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OO와 사귀었던 아이”라는 말이 나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때의 오해는 오늘의 기쁨이었다.     


친구가 보내준 선생님 단체 사진에서는 예전의 선생님과 달리 이제는 적당히 체격이 좋아지신 모습이었다. 중1 때 뵈었던 모습보다 훨씬 더 편안하게 느껴져 감사했다. 그 당시 곧 정년 퇴임을 준비하신다고 하시니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선생님이 날 기억해 내고 하신 말씀을 전해 듣고 다시 그때의 감정이 올라왔다. 그 당시 크게 요동치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서울로 전학 온 이후에도 오랫동안 선생님이 마음에 남아있었다. 누군가에게 첫사랑을 말할 때면 선생님을 얘기하곤 했다. 그날 밤은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잠 못 드는 밤   

  

“얼굴이 하얗고...”     


가슴이 일렁인다.     


곱슬머리

호리호리한 몸매

붉은색이 도는 베이지색 양복

한 손은 바지 포켓에

한 손은 책을


수업을 하실 때면 가끔

창밖 멀리에 시선을 두시던

그래서 늘 마음이 쓰였다    

 

“이쁘게 생겼고...”     


온몸의 세포들이 깨어난다.  

   

자신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괜한 사람과 엮는다.

너랑 손도 한번 잡아본 적이 없는데

난 여기저기 너랑 소문이 나 있다

해명도 못해보고

내 첫사랑 앞에서

그렇게 너랑 사랑이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불리어진 이름에     


“얼굴이 하얗고...”

“이쁘게 생겼고...”     

"OO와 사귄..."


이렇게 날 기억하고 있는 이는...     

열세 살 

가슴 아린

첫사랑     


YI선생님을 찾았다 1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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