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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Apr 29. 2023

그림움을 먹다

보말죽


방파제 안쪽으로 오색 깃발을 펄럭이며 배가 들어오고 있다. 누군가의 아버지 배가 만선을 한 모양이다. 오색 깃발을 나부끼며 들어오는 배를 보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어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어릴 때 자란 섬은 어장이 풍부했다. 1970년대에는 고등어와 삼치는 파시가 성행했다고도 한다. 엄마를 따라 어판장에 갈 때면 싱싱한 고기들이 여기저기서 파닥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갓 잡아온 선도 좋은 고등어는 깍둑썰기한 무와 함께 된장국을 끓여주셨다. 풋고추를 넣고 끓인 고등어 된장국은 심심한 생선살과 함께 잊지 못할 맛이었다. 삼치로는 미역국을 끓이시고 남은 것은 손질하여 소금 간을 약간 해서 말린 후 쪄주셨다. 싱싱한 생선은 비린내도 느껴지지 않고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아도 최고의 맛을 냈다. 어릴 때 신선한 생선만 맛봤던 미각의 기억 때문에 서울에서 먹는 생선은 늘 기대 이하였다.  


섬이라고 생선이 사시사철 흔한 것은 아니었다. 봄이면 장터나 선창가 넓은 공터에는 그물을 보망하는 아저씨들이 많았다. 고기가 많이 잡힐 때는 고기를 빨리 털고 돌아와야 선도를 유지할 수 있어서 어부들이 그물을 찢어 고기를 털어냈다. 그래서 어부들은 다시 고기잡이를 가기 전에 찢어진 그물을 미리 보망한다. 친구 아버지는 배를 여러 척 가지고 계신 선주셨다. 아저씨가 장터에서 보망 하실 때면 곁에 가서 그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보망하시는 손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감탄스러웠다. 고기들의 산란기 동안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손보고 8월부터는 다시 어장을 시작했다. 가을에는 태풍이 오기도 하니 배를 몰고 나가야 하는 어부들이나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은 안전하게 돌아올 때까지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지금은 거의 정확한 기상예보와 GPS가 있어서 안전하게 어장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생선은 비린 맛이 없는 서대와 장대였다. 살짝 소금으로 간을 해서 바람에 적당히 말린 것을 찌거나 장대 지리는 그 담백한 맛이 밥도둑이었다. 삼치는 잡히는 전량 일본으로 수출을 했고 서대와 장대는 흔치 않았다. 청산도는 해녀들이 있어 해삼과 성게, 전복, 소라 등도 풍성했다. 이 또한 많은 양을 수출했기에 섬사람들이 자주 먹을 수 없었다. 대신 바지락, 모시조개, 군소, 고둥 등은 섬의 아낙들이나 아이들이 바다에서 직접 캐고 바위에서 따서 먹기도 했다. 바지락이나 조개는 눈을 보고 파는 사람들은 쉽게 바구니를 채웠다. 고둥은 바위를 뒤적이거나 물에 잠긴 바위 밑에서 따기도 했지만 양은 많지 않았다. 


엄마가 가끔 사 오신 고둥은 그것을 먹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삶은 고둥을 작은 양푼에 담고 동생들과 둥그렇게 앉아 오손도손 얘기하며 고둥을 먹었다. 고둥을 먹기 위해서는 옷핀으로 고등의 머리 부분을 꿰고 고둥의 도르르 말린 꼬리까지 잘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냥 당기면 꼬리가 중간에 잘리기 때문에 내 손목을 비틀어 돌려가며 꺼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완전하게 나올 때는 그 모양이 예뻐 먹기가 아깝기도 했다. 



몇 년 전 제주도에 출장 계획이 있어 일을 마치고 동료와 이틀의 일정으로 여행 계획을 세웠던 적이 있다. 여행 중 식사 메뉴는 육지에서 먹기 어려운 보말죽과 갈칫국을 포함하기로 했다. 제주에서는 고둥 종류를 통칭해서 보말이라고 했다. 어릴 때 고둥을 먹어봤던 경험이 있어 죽은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비양도를 가기로 한 날 선착장 가까운 곳에 보말죽을 파는 곳이 있어 아침을 그곳에서 먹기로 했다. 식당에 들어가니 손님은 없고 메뉴도 보말죽과 다른 한 가지만 있었다. 보말죽을 주문하니 바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은 게와 밑반찬이 나왔다. 전복죽, 문어죽을 좋아하는 나는 보말죽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궁금했다. 곧이어 푸르뎅뎅한 보말죽이 나왔다. 고둥을 먹을 때 우리는 꼬리 부분을 똥이라고 했다. 가끔 그 부분은 쓴맛이 나기도 해서 잘라버리고 먹지 않았다. 식당에서 나온 보말죽은 전복의 창자를 전복죽에 넣듯이 고둥의 꼬리까지 죽에 넣었던 것이다.


‘맛이 괜찮을까? 괜찮아야 하는데’ 하며 죽을 식히기 위해 두어 번 젓다가 한 숟가락을 떴다. '오 세상에!!' 쓴맛은 전혀 없고 참기름의 고소함과 함께 고둥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색깔 때문에 우려했던 걱정은 저 멀리 달아나고 빈속의 허기를 보말죽이 순식간에 채워주었다. 죽을 먹은 동안 섬에서 고둥을 잡던 기억과 함께 친구 집에서 고둥을 반찬으로 먹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동료와 그 기억들을 나누며 오랜만에 아침을 맛있고 든든하게 먹었다. 참 단순한 재료만으로도 이렇게 맛을 낼 수 있다니 신선도가 맛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주인아주머니께 죽이 맛있다며 인사를 전하자 아주머니는 해안가 도로를 걷다가 비양봉을 꼭 다녀가라고 하셨다. 


비양도는 1002년 제주도에서 가장 나중에 화산이 분출되어 생성된 섬으로 하나의 오름이다. 해안가를 걷다 보니 코끼리 바위를 지나 기암괴석들을 모아 놓은 돌 공원이 있었다. 용암분출로 생겨난 섬이다 보니 해안가 바위와 돌들은 제각각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도로가 넓어 자전거를 타거나 바다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걷는 것도 좋겠다. 물속에 반쯤 잠긴 까만 화산암은 바다와 까만 자갈들과 어우러져 색다른 풍경을 이루었다. 해발 114m의 비양봉을 오르는 길은 계단이 있어 어렵지 않았다. 봉우리 주위에 작은 봄꽃들과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염소가 평화로웠다. 정상에서는 섬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고 멀리 한라산과 협재해수욕장이 있어 그 풍광 또한 아름다웠다. 제주도에서 청산도가 보인다고 하는데 어느 위치인지 알 수는 없었다. 언젠가 청산도에 가면 보말죽을 먹어봐야겠다. 그곳에는 보말죽은 없고 고둥죽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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