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행복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는다. 행복이 있다, 없다, 행복을 느낀다, 안 느낀다를 따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행복하다!‘가 입에서 튀어나오고, 몸과 마음이 행복을 느낀다면 그때 반갑게 두 팔을 뻗어 맞이할 뿐이다.
‘행복’이 도달할 목표가 되는 순간부터 오히려 나의 삶은 행복과 더 멀어진다는 신념이 살면서 생겼다. 행복은 절대적이지 않다. 추상적이다. 그렇다 보니, 나에게 행복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은 필수였다.
사전에서 정의를 빌리면, 행복은 1. 복된 좋은 운수. 2.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거나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를 의미한다.
나에게 행복은 일상에서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상태, 희로애락을 느끼며 붕 뜨거나 가라앉더라도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상태다. 긍정 감정만 추앙하지 않고, 부정 감정이라 불리는 감정 친구들도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
슬프고 지치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나아갈 힘이 있고, 그때마다 힘을 주는 나, 그리고 누군가, 환경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의 호제는 행복 덩어리다. 일상의 희로애락을 너무나도 흠뻑 느끼고 투명하게 표현한다. 가끔 버거울 때가 있다. 특히 노와 애를 느낄 때.
즐거울 때는 길을 가다가도 춤사위를 펼친다. 노와 애를 느낄 때는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힘껏 울고 소리친다. 희로애락에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금방 일상으로 돌아온다. 노와 애를 표현하는 호제에게 이따금 나는 놀라고 지치고 속상해하며 금방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나는 쿨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발견하는 호제를 만날 때면 나까지 기뻐진다. 예상치 못한 발견을 기대하고 내일을 꿈꾼다.
어느 날 저녁, 호제는 만족이 가득 찬 진지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나에게 말했다.
“엄마, 오늘 급식에 나온 순대국밥, 정말 맛있었어!!!“
”어머! 호제야, 정말 좋았겠다! 호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하나 또 늘었네! 축하해! 급식에 순대국밥이 나온다니! 나도 먹으러 가야겠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빠르게 덧붙였다.
”아! 엄마!! 순대국밥에 수육이 2개나 들어있었어! 2개!!!“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수육 2개가 들었다고 강조했다. 양쪽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오! 럭키데이였네!“
”그래서 더 맛있었어! 수육이 한 개도 없는 친구도 있었는데 나는 2개나 있었어. 마지막에는 밥을 국에 넣어서 말아먹었어. 다~ 먹었어!“
점심에 먹은 순대국밥을 상상하는 듯하더니,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하… 또 먹고 싶다. 학교에서 주는 순대국밥.”
“호제야, 이번 주말에 엄마랑 아빠랑 다 같이 맛! 있! 는! 순대국밥 먹으러 가자.”
기쁨이 그득 차서 급식 메뉴를 얘기하는 호제를 보니 덩달아 나도 기뻐진다.
어떤 날은 공동현관 번호판에 붙은 개미를 신나게 얘기하고, 어떤 날은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학원 선생님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얘기하고, 어떤 날은 친구한테 배운 재미난 퀴즈를 맞혀보라며 히히거리며 물었다.
밥 먹고, 학교 가고, 학원가는 일상 속에서 희로애락을 느끼고, 전하는 호제. 앞으로 수많은 경쟁 속에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은 하찮은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혹여나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순대국밥 속 수육 2조각 때문에 밥이 더 맛있고, 더 즐거웠던 점심시간을 꼭 떠올리며 일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매일 발견하며 살기를 바라본다.
순대국밥 속 수육 2조각의 힘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