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노잼일 때 점검해봐야 할 것들
살다 보면 뭐든지 시들시들해지는 때가 온다. 내가 요즘 그렇다. 뭘 해도 재미가 없다. 오 년 넘게 하고 있는 독서도 예전만큼 열의가 있진 않다. 카페에서 아이스 라테를 시켜놓고 한 장 한 장 소중히 넘기던 감각을 느낀 지 오래됐다.
브런치에 글 쓰는 것도 그렇다. 내가 겪은 일을 활자로 풀어내봐야지 하며 신나 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자리에 앉아 "분량 채워야지, 이번주에도 하나 발행해야지"하며 기술적으로 쓴다.
이런 고민은 나만의 것은 아닌가 보다. 같이 일하고 있는 동료인 Y도 나와 같은 증상을 호소한다. 내가 볼 때 그는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데도 그렇다. 회사에 둘만 있을 땐 이런 고민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 찧곤 한다. 하지만 답이 나오진 않는다. 끝내 이야기는 다른 것도 해보자라는 결론으로 끝맺음된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봤는데 이런 권태로움이라는 감정이 보편화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란다. 권태는 근대의 발명품이었다. 근대 이전 사람들은 대부분 하루 종일 노동에 시달렸다. 이런 감정을 느낄 새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발명과 더불어 생산성의 증대로 인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유한계급들이 생겨났다.
이런 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고 여가 시간이 남았다. 이 사람들은 이런 시간들을 대부분 예술, 오락 등에 탐닉했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이들은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집고양이처럼 심심함을 느꼈다. 일상이 따분해지는 권태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 셈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이들과는 다르다. 강남에서 일 안 하고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일을 한다. 이 말은 즉 시간이 넘치진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남는 시간에 무언가를 짬짬이 한다. 내 경우는 그게 독서와 글쓰기 기타 러닝, 요가 등등이다. 이렇게 뭔가를 다양하게 하면서도 왜 나는 여기에 따분함을 느끼는 걸까?
이런 노잼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어떤 행위를 할 때 내가 선택했느냐 아니냐 하는 유무다. 회사 일이 재미없는 이유도 이런 면에서 회사일은 기본적으로 재미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남이 시켜서 하기 때문이다.
반면 게임은 재밌다. 내가 자율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스개 소리로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거나 게임을 못하게 하려면 반대로 하라는 말이 있다. 공부하지 말라고 하고 게임도 스케줄 관리까지 시켜가며 힘들게 시키는 거다.
이렇듯 인간은 기본적으로 주체적이어야만 재미를 느낀다. 내가 하는 취미도 주체적이다. 누군가 옆에서 칼 들고 협박해서 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 다만, 이것에 대한 유용성을 너무 생각하다 보니깐 재미가 떨어지는 것도 같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보다는 남들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할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책을 읽는다고 치면 교보문고에서 대강 유명한 작가의 것들과 내게 도움이 될만한 걸로 사서 읽었다. 이게 무슨 문제가 있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하다 보니 점점 책 읽는 재미가 떨어졌다.
순수하게 내가 당기는 책을 고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적절한 걸 골랐달까. 하지만 우리를 미치게 하는 건 적절한 게 아니라 딱 맞는 거다. 그래서 옷가게를 가서 적절한 옷을 사면 우리는 잘 입지 않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보통 아내 이야기가 조회수가 높게 나올 때가 많은데 이런 걸 보면 나도 모르게 이런 소재를 써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이런 압박감에 쓰다 보면 좀 오버해서 쓸 때가 많다.
이렇게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주제라기 보단 써야 하기 때문에 쓰는 비중이 커지자 재미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어떤 사람은 압박을 받으면 잘한다던데 난 압박을 받으면 도망가고 싶어 진다.
그래서 취미활동을 할 때만큼은 타인의 눈치를 덜 보면 좋을 듯하다. 회사에서도 매일 상사 눈치를 보는데 나와서까지 눈치 보면 숨 쉴 틈이 없다.
이렇게 문제만 나열하면 좀 그러니 나만의 해결책도 공유해 본다. 난 책볼 때 시들시들해지는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요즘엔 독립서점에 간다. 서점에 직접 가서 책을 보고 만져 보면서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직접 고른다. 온라인 교보문고에서 사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물고기도 내가 직접 낚시한 것과 마트에서 산 것이 신선도가 다르듯 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내가 쓰고 싶은 소재를 쓴다. 이것을 위해서는 평소에 노력을 좀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 써야지!”말만 한다고 이런 소재가 딱하니 찾아오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나와 타인을 좀 더 관찰한다.
내 마음에 오래 남는 것 탁하니 걸리는 것들을 낚아채기 위해서다. 이때 나는 세렝게티 초원에서 단 한 장을 찍기 위해 24시간을 대기하는 내셔널지오그래픽팀이 됐다고 스스로 빙의한다.
그리고 이렇게 브런치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저녁에 일기를 쓴다. 빈 종이에 만년필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휘갈길 때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서 이런 지루함을 이겨낸다.
이건 나만의 방식이고 다 각자만의 방식이 있을 듯하다. 없다면 만들어도 좋을듯하다.
핵심은 어떤 것을 할 때 재미가 없다면 그것을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나’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세심히 살펴봐야 한다. 나의 비중이 백 프로일 순 없겠지만 높일 필요는 있다.
그래야만 재밌게 꾸준히 할 수 있다. 이렇게 했는데도 재미가 없다면 다른 것을 찾아서 하면 된다. 이 세상에 할 건 많다. 핵심은 남보다는 ‘나’에 대한 비중을 늘리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옳다. 우리가 어떤 취미를 꾸준히 해나가기 위해선 거기서 내가 재밌어할 만한 요소를 노력해서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이라면 좋아하는 작가를 만들거나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정하는 등이 있겠다. 글쓰기라면 내가 쓰고 싶은 소재나 장르가 있을 것이고 악기라면 내가 연주하고 싶은 곡이 있을 거다.
이런 면에서 다 자기 관찰로 귀결되는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 가에 대해서 각종 매체들로 나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나를 발굴하는 것 그것에 우리는 재미를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