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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냥이 Mar 29. 2024

미룸주의보 발령!

더 이상 미룰 순 없다.

“오빠 우리 결혼한 지 이 년 넘었어. 21년 9월에 결혼식 했으니깐 벌써 이년 반 지난 거야” 


아내와 방에서 이야기하다 이 얘기를 듣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벌써 아내와 같이 산 지 이 년이 넘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말처럼 내 인생도 썩어가고 있었다. 평소에도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간다며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던 나다. 하지만 그건 진심이라기 보단 살짝의 아쉬움 정도를 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도냥이식 레토릭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전에 시간이 빠르다는 것을 머리로 알았다면 이번은 몸으로 절감했다. 갑작스레 삶에 대한 위기감이 엄습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해보고 싶은 것들을 시도해보지도 못한 채 나이 들고 체력이 떨어져 세상에 순응하는 삶을 살게 될까 봐 두려워졌다.  


이런 생각을 하자 시간이 흘렀다는 증거들이 눈에 보였다. 어느새 이 회사를 다닌 지 삼 년이 넘어갔다. 엄마 아빠도 예전과는 다르게 주름이 선명해졌다. 포대기에 싸여 있었던 조카는 이제 초등학교에서 발표를 한다. 내 망상력은 현실을 넘어선 미래까지 간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예전에 엄마가 이랬지 하며 회상에 잠긴다. 조카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고민한다. 은퇴 후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아 오후에는 HJ를 병원에 데려다줘 야한다. 이로부터 시간은 더 흐른다. 어느새 내 주변에 남은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쓸쓸한 황무지에서 어느새 노인이 돼버린 나를 거울로 바라본다.  

 

그동안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표류해 버린 수많은 일들이 떠오른다. 장기 연애에 관한 글을 쓰겠다는 다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겠다는 다짐, 책 배달해 주는 서비스를 이용해 보겠다는 등등 크고 작은 결심들이 떠오른다. 몇 개 빼고는 대부분 귀찮아 무덤에 묻혀있다.     


얼마 전에 아내가 내게 “오빠 우리 2년 동안 뭐 했어”란 말이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나는 결혼 후 이 년 동안 뭘 했지? 일 년에 책 권은 봤고 브런치 글도 100개는 썼다. 헬스도 나름 꾸준히 했고 회사 일도 열심히 했다.


 써놓고 보니 뭔가 많이 한 것 같은데 성에는 안 찬다. 더 잘 보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최소한으로만 해낸 느낌이다. 아마 내 느낌이 맞을 거다. 이건 앞으로 남은 시간이 많다는 안일함에서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말한 게 일주일 전 이야기다. 이날 위기감을 느낀 이후로 어떤 일이든 미루지 않기를 결심했다. 아내에게도 선포했다. 돈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행동할 것을 약속했다.(단, 비싼 물건은 제외) 고맙게도 아내는 내 말에 동의해 줬다.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통화했고 저녁 약속을 잡았다. 어제 아내와 함께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갈비를 먹었다. 브런치 글도 더 열심히 썼다. 덕분에 나랑 비슷한 결을 가진 분의 글을 읽고 대화도 나눴다. 그분이 말한 대로 쿠팡 후기도 써서 체험단 해보고 조만간에 실제 가게도 찾아뵐 예정이다.     

 

가야지 하며 미뤄뒀던 병원도 가고 예약도 했다. 두 달 전에 했던 검사 결과를 물어보는 게 의사 선생님께 머쓱했지만 결과를 듣고 나니 속은 시원했다. 이렇게까지 하고 나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하기 싫어도 하고 나면 드는 생각과 같았다. 


다만 좋은 점만 있진 않았다. 급속하게 활동량이 많아지고 귀찮다는 감정적인 부하에도 밀어붙이다 보니 몸과 정신이 피곤하다. 몸이 계속해서 각성상태다. 이러다 보니 수면 시간이나 질도 좀 떨어졌다.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하나하나 없애고 있는데 신기하게 하나를 없애면 두 개가 더 생기는 느낌이다. 하나의 목을 베면 두 개의 목이 생기는 메두사를 상대하는 헤라클레스가 된 기분이다.      


지금은 어떻게든 처리해나가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가다간 끝도 없을 것 같다. 어느 지점에서 타협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 같다. 아니면 우선순위를 정해서 중요한 순서대로 처리하든가 해야겠다. 근데 일을 체계적으로 하는 게 힘든 내가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일단은 이 상황을 버티는 수밖에는 없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럼에도 오랜 멈춤 끝에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이 좋아 계속하게 된다. 이게 성취 중독인 건가. 지금도 잠이 안 와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원래라면 누워서 유튜브를 봤겠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을 미루지 않은 결과다.      

전반적으로는 만족스럽다. 의사결정의 속도가 빨라져서 결과물이 빠르게 나온다. 진작 이럴걸 싶지만 사람이라는 게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지금이라도 이런 순간을 맞은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다.   


Image by Keila Maria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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