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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팀장님도, 나처럼 걱정이 많았대요

회사는 걱정의 연속이지만, 그 대부분은 지나간다

by 도냥이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어려운 상사를 만나기 마련이다. 나에게도 유독 어려웠던 팀장님이 한 분 계셨다. 지금은 명예퇴직을 하신 그분은 키 170cm 정도에 마른 체형이었고, 항상 허리를 곧게 펴고 다녔다. 몸가짐에서부터 느껴지는 단정함과 엄격함은, 마치 조선시대 임금 앞에서 직언을 서슴지 않던 노년의 선비를 떠올리게 했다. 단 한 번도 허투루 행동하거나 말한 적이 없었고, 그분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자세가 반듯해졌다.


그분께 보고를 올리는 일은 나에게 회사 생활 중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보고가 한 번에 통과되는 경우는 드물었고, 보고서를 건네는 즉시 날카로운 꼬리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들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맹점을 정확히 찔렀다. 가끔은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도 몰라 당황하기 일쑤였고, 대답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다가 회의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일이 반복되었다.


특히 내가 말을 잇지 못한 채 침묵이 길어지면, 그 정적은 숨이 막힐 만큼 무거웠다. 그런 침묵의 형벌이 지나고 나면, 그분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묻곤 했다.


"그럼 어떻게 할 건가?"


그 질문은 본래 해결책을 묻는 말이었겠지만, 당시의 나는 이미 멘탈이 무너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 말은 내게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말이라기보다, '이 상황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는 무언의 신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상황이 심각할 때는 몸에서 이상 신호가 나타나기도 했다. 침묵이 이어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헛구역질이 올라오며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뇌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위기 상황으로 인식하고 스스로 퓨즈를 내려버린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보고서를 하나를 준비하는 데에도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게 되었다. 철저히 검토하고 가능성 있는 질문을 예상하며, 머릿속으로 수십 번씩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이러한 경험이 내게 철저한 준비 습관을 길러주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분과 함께 일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예퇴직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과의 마지막 대화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날도 나는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익숙한 긴장감 속에서 말끝을 고르고 있는데, 그분이 문득 말을 꺼냈다.

"일할 때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너무 많이 했어."


의외의 말이었다. '걱정'이라는 단어는 그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철저하고 냉정했던 그분 역시, 속으로는 수많은 걱정과 불안을 안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고, 동시에 이상하게 안도감도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래서 보고를 그렇게 꼼꼼히 받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마음속 불안이 크다 보니, 더 철저히 확인하고 점검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사실 그때는 너무 긴장해 그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지 못했다. 그냥 "아, 그런 말도 하시는구나" 정도로 넘겼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은 마음 한편에 조용히 자라났다. 어느 날 문득, 지친 하루 끝에서, 아니면 또 다른 어려운 상황 앞에서, 그 말이 다시 떠오르곤 했다.


회사 생활 5년 동안 나 역시 참 많은 걱정을 했다. 결재가 시간 안에 안 나면 어쩌나, 감사나 점검을 받을 때 실수를 지적받으면 어쩌나, 모르는 걸 물어보면 어떡하냐, 업체가 내 말을 무시하면 어쩌지. 걱정의 목록은 끝이 없었고 그때마다 나는 미리 긴장하고 조바심을 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결재는 결국 나왔고, 감사에서도 큰 문제는 없었으며, 모르는 건 솔직히 말하면 이해해 줬다. 심지어 지적을 받으면 오히려 개선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업체와 갈등이 있을 땐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대부분 수긍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지금은 그 많은 걱정들 중 절반 이상은 '왜 걱정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말해줘야 "아,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하고 떠올릴 정도다. 당시에는 모든 게 심각하고 중요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대부분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아마 팀장님도 퇴직을 앞두고 그런 사실을 스스로 체감하셨기에, 그 말을 내게 남긴 것이 아닐까.


우리 살아가면서 참 많은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며 산다. 그 걱정들은 우리의 시선을 '지금 여기'에서 떼어가 존재하지 않는 미래로 끌고 간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누려야 할 찬란한 오늘은 조용히 흘러가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아내의 가장 젊은 순간, 하늘 위로 피어오른 눈부신 뭉게구름, 함께 일하는 동료의 따뜻한 농담 한 마디, 점심시간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 퇴근길 버스에서 듣는 노래 한 곡.


이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 있다.


그날 팀장님의 한마디처럼, 이제는 나도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걱정하지 마. 해도 되지 않을 걱정은 그냥 흘려보내도 괜찮아.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누려도 좋아, 도냐."


그림출처 : chat gpt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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