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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 팀장님의 명퇴가 남긴 것.

한 사람의 퇴장이 남긴 것

by 도냥이

회사는 본래 일하는 곳이다. 하지만 사람이 모이는 곳인 만큼, 때때로 짬이 나면 이야기꽃이 피기도 한다. 물론, 대화를 주도하는 쪽은 대개 상사다. 어제도 그랬다. 나른한 오후 세 시, 차장님이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고릴라 팀장 명퇴한다는데요? 팀장님, 뭐 들으신 거 있으세요?"


기다렸다는 듯 팀장님이 몸을 돌리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러곤 어제 팀장 회의에서도 그 이야기만 나왔다며 맞장구를 쳤다. 여러 추측이 오갔지만, 결론은 없었다. 잠시 목소리를 낮추더니 팀장님이 말했다.


"명퇴금 받으려고 한 거래. 2억이래, 앞으로는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서 명퇴금도 못 줄 수도 있대."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나는 모니터를 보며 타이핑을 계속했지만, 귀는 그쪽에 가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회사에서 누군가의 인사이동은 언제나 흥미로운 화제니까.


하지만 고릴라 팀장님이 명퇴라니. 2억이라는 액수보다 그 사람이 떠난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같이 일한 적은 없지만, 몇 번의 회식자리에서 마주친 그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덩치가 크고, 얼굴이 각지고, 목소리가 우렁찼다. 전라도 깡패 같기도 했고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는 고릴라가 연상되기도 했다. 출세 지향적이었지만, 자기 사람은 챙겼다. 술을 좋아했고, 추진력도 있었다. 회사 안에서도 잘 나가는 축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떠난다니. 마치 마을 어귀를 든든히 지키던 정승이 아무 말 없이 짐을 싸 들고 떠난 듯, 텅 빈 입구만 남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 회사생활의 덧없음이 밀려왔다. 아무리 출중하고 잘 나가는 사람도 결국 회사를 떠난다. 그 냉정한 현실이 나를 덮쳤다. 나 역시 이 회사에 오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생활을 여섯 번만 더하면 회사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피부로 느껴졌다.


'회사가 나를 책임져주진 않는다'

그 말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가슴으로 느꼈다. 아마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질수록, 이 감정은 더 커질 것이다. 결국 사람은, 일이 자기에게 닥치거나 가까운 이에게 일어나야 실감하는 존재다.


요즘 이런 변화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롯데칠성음료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대기업 곳곳에서 희망퇴직이란 이름을 쓴 구조조정 소식이 이어진다. 요즘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속 회사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김 부장에게 독자들이 유난히 공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최근 읽었던 송길영 작가님의 책 <시대예보 :경량문명의 탄생>이 떠올랐다. 그는 '무겁던 중량문명의 시대는 저물고, 가볍고 빠르게 대응하는 경량문명이 대세가 된다'라고 말한다. AI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개인은 이제 거대조직과도 맞설 수 있다. 연공서열에 기대어 버티는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송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 잠시, 다시 만납니다.


능력 있는 개인들이 만나 전력을 다해 잠깐 일하고, 흩어진 뒤 다시 만나는 사회. 프리랜서형 사회다. 낯설지만, 이미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300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침착맨의 '초대석'코너를 보면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잠시 모여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좋은 만남이라면 몇 달 혹은 몇 년 뒤 다시 이어진다.


'지금, 잠시,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역량을 갈고닦아야 한다. 회사에 올인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아남기 어렵다. 우리가 살아갈 곳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로 이어진다. 사회 전체에 통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일도, 어쩌면 그런 준비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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